사도행전 11장 25-26절 말씀 묵상 [이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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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24)-‘발품행전’
행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좋은 생각이란 잡지에 중세 신성로마 제국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이 실려있습니다. 제2차 십자군 전쟁을 지휘한 ‘콘라트 3세’때 스토리입니다.
콘라트 3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등극한 직후 골치 썩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후들 가운데 하나가 그의 황제 등극을 심하게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자신에게 저항하는 게르프 성의 제후 ‘바바리아’를 굴복시키기 위해 그는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습니다. 하지만 쉽게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싸움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치열한 전투와 지리한 대치 상황이 반복해서 이어졌습니다. 결국 완전 포위된 게르프 성은 외부와 철저히 고립되었고 성에 마실 물과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콘라트 3세는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힌 바바리아를 쉽게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항복에 성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는 대신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성 안의 모든 남자는 이제부터 우리의 포로다. 다만 여자들에게는 자유를 줄 터이니 각자 자신이 들 수 있을 만큼의 짐만 들고 성을 나가도 좋다.”
황제의 명령이 전해지고 굳게 닫혔던 성문이 스르르 열렸지만 여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참 뒤 여자들이 우르르 성 밖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콘라트 3세는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즉 여자들 모두 유난히 더디게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콘라트 3세는 직접 말을 타고 성문 근처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습니다. 성문 밖으로 힘겹게 걸어 나오는 여자들의 등엔 모두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업혀 있었습니다. 많은 여자들이 커다란 남자를 업고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은 우습기까지 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낙뿐만 아니라 제후의 부인까지 남편 바바리아를 업고 나오는 모습에 그냥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인들의 지혜로운 사랑에 감동을 받은 콘라트 3세는 결국 모든 남자들도 풀어 주었습니다.
저런 아내들을 두고 있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남편들은 아내에게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갈까? 또 아내가 얼마나 예뻐 보일까? 무거운 남편을 업고 힘겹게 걷는 아내들의 ‘발’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자신들의 자유를 함께 공유하기 위해 무거운 남편을 업고 걷고, 뛰는 발이 사도바울이 말씀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롬10:15)이 아닐까?
사도행전을 많은 경우에 성령께서 행하신 일을 기록한 책이라는 의미에서 ‘성령 행전’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헬라어 타이틀은 ‘Praxeis’(프락세이스)로 사도들의 acts 또는 deeds(행함)을 기록한 책입니다.
요즘 많이 쓰이는 말로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후 열심히 ’발품‘을 팔았던 것을 기록한 책이라는 의미입니다. ‘발품'은 순수한 우리말로 ’걸어다니는 수고'를 의미합니다.
‘발품을 팔다'는 어떤 일을 위해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노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간과하면 안되는 것은 사도들의 열심입니다. 사도들이 열심히 발품을 팔았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 멀고 광활한 지역들을 걸어다니며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속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도행전을 ’발품행전’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사도행전에는 일일이 직접 찾아 다녔던 사도들의 열심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그냥 기도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발품‘을 팔았습니다.
멀리 다소까지 직접 가서 사울을 불러와 공동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 결과로 제자들이 양육되고 그들이 처음으로 ’크리스티아누스‘(그리스도에 속한 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후에도 그들의 ’발품행전‘은 이어집니다. 안디옥교회는 선교기지가 되었고 소아시아와 마게도니아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발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와 선교는 어떻습니까? 혹시 ’발품 팔기‘를 주저하거나 남의 일로만 여기지는 않습니까? 성령의 역사는 지금도 ’발품팔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큰 명제는 ‘오라’이지만, 신약의 명제는 ‘가라’인 것입니다. 이제는 ’발품행전‘입니다.
오 주여
우리도 ’발품팔기‘를
주저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발품을 통해
성령의 나타나심을 보게 하소서
이 아침의 기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