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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8장 2, 3절 말씀 묵상 [이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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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44)-소명과 사명


행18:2,3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우리는 때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궁금해 하며 주님께 기도로 여쭐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 삶에 주님의 인도를 느끼지 못하고 삶이 ‘공전’되는 듯 할 때, 그 의문은 증폭됩니다.


자신이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는 ‘사명자’일수록 그런 ‘자괴감’은 더 깊습니다. 마치 삶이 ‘제 자리에서 맴돌고 전혀 진전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런 고민은 더 깊어집니다.


어떤 목사님이 10년 동안 고생하며 목회를 했는데 성도가 전혀 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낙심해서 십자가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주여, 저의 사역은 이렇게 실패로 끝나는 겁니까?“


”주여, 저를 부르신 목적이 뭡니까? 저는 실패한 목사입니다.” 한참 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실패한 것이다.” “아니요, 주님 제가 실패한 겁니다. 어찌 주님이 실패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그러자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만약 성도 수가 많이 늘었다면 네가 성공한 것이냐, 내가 성공한 것이냐?“ 이 목사님은 그 음성을 듣고, ‘사명’에만 집중한 채, 자신을 드리는 ‘소명’에는 무관심했던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을 더 깊히 깨닫고, 회개하며 회복하셨다는 간증입니다. 소명(召命)과 사명(使命)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명은 무엇일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도록 맡겨주신 일일까?


흔히 ‘부르심’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소명은 “생명을 요구하신다“는 뜻입니다. 소명은 그냥 우리의 존재를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무언가 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은 ‘사명‘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배반할 것을 미리 아셨던 주님께서 왜 가롯 유다를 구태여 제자로 부르셨을까? 소명과 사명의 차이를 확실하게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가롯 유다는 소명의 의미를 사명과 혼동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주님께 무언가 해 드리려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그가 세속적인 계산에 빨라 주님께서 그에게 돈주머니를 맡기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일이 그에게 독이 됩니다. 그는 점점 자기 식으로 주님을 섬기려 했고 결국 주님을 팔아넘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명에 집중하는 사람은 ‘업적 주의자’가 됩니다.


눈에 보이는 일을 해내지 않으면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처럼 여깁니다. 그런 그의 배반을 아시는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13:27).


사명은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은 소명입니다. 소명이 있으면 사명은 필요할 때 저절로 주어집니다. 기도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시46:10).


예수님은 우리의 일이 아닌 우리를 원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큰 고초를 당한 후, 베뢰아를 거쳐 아덴에 이릅니다. 아덴에서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일도 없었지만, 성령의 역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철학적 토론과 변증만 했을 뿐, 데살로니가와 같은 성령의 역사와 삶의 변화가 나타난 기록이 없습니다. 단지 데살로니가 교회의 추이를 근심했던 바울이 디모데와 실라를 데살로니가로 보냅니다.


그리고 자신은 아덴에서 고린도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도 별다른 역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더. 그저 평일에는 장막 깁는 일을 하였고, 안식일에만 회당에 나가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침체된 모습입니다.


그의 사역이 ‘위축’되었을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납니다. 위축된 영혼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그때, 디모데와 실라가 데살로니가에서 돌아와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바울님, 데살로니가가 안정되었고, 그들의 믿음이 성장해서 엄청난 ‘믿음의 역사와 소망의 인내, 사랑의 수고’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게도니아 전역에 믿음의 소문이 자자합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바울은 기쁨을 회복하고 복음을 힘있게 전합니다. 누가는 이 상황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행18:5).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행적에서 배울 것은 아무 역사가 없는 듯 보여 우리 영혼이 위축될 때, 묵묵히 주를 기다리며 주 안에 안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주어진 일, 할 수 있은 일에 전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때가 오매 주님의 인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일을 시키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주 안에 있을 것을 당부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는 가지다. 나에게 붙어 있어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분께 우리의 영혼을 맡겨드리고, 붙어 있을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명은 그때그때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끔 인도하십니다(빌2:13). 마침내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 주여

소명을 사명으로 오해하지 않게 하소서

주 안에 머물며 주의 뜻을 깨닫게 하소서

Show me your way!

주의 길을 보이소서

이 아침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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