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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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11-18절 말씀 묵상 [민경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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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선한 목자 예수의 음성을 들어라!_자기선언4

본문 : 요 10:11-18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임을 선언했습니다 (본문 11, 14절).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유일한 선한 목자 the good shepherd임을 선언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반면에 삯군 목자는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본문 12절). 하나님은 이런 현상을 구약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 내 양의 무리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음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의 무리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겔 34:8).

왜 같은 목자인데 이 같은 서로 상반된 일이 벌어질까요?


1.삯군 목자는 양과의 관계가 이익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 전반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본문 13절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hired hand

삯군은 양의 주인이 아닙니다. 양을 진정으로 보살피는 목자도 아닙니다. 단지 품삯을 받고 일하는 고용된 사람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라고 양 무리의 목자들을 경고한 바를(벧전 5:2) 거슬리는 죄악입니다. 하나님도 이러한 삯군 목자들을 강하게 경고하며 벌하셨습니다(겔 34:10; 렘 23:1-2).


2.반면에 선한 목자는 양과의 관계가 생명관계입니다

본문 14-15절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선한 목자는 두 가지 부류의 양, 즉 우리 안의 양과 우리 밖의 양과 생명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1)자기 양과의 생명 관계

(1)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구체적으로 압니다. 그 실례로 주님은 목자가 양떼를 우리 안에서 불러낼 때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고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성격과 그의 장단점을 아십니다. 그가 괴로워하는 일도 아십니다. 성부와 성자가 피차에 깊이 아시며 뗄 수 없으신 사이인 것처럼 목자이신 주님과 우리 양떼들이 그런 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3).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으셨기에 우리를 참으로 알고 도우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2)또한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립니다. 

선한 목자의 모형이었던 다윗은 자신이 아버지의 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사자와 곰 등 맹수와 싸우던 경험을 말했습니다 (삼상 17:14-15). 진실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시기 위하여 그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셨습니다. 할렐루야!

이 같은 예수님의 모형은 성막의 번제단입니다. 번제단에는 피와 불과 뿔이 있습니다. 먼저 제물의 피 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습니다. 번제단에는 항상 불이 피워져 있습니다. 돌단과 성막, 성전, 교회의 시작은 불이었습니다. 그리고 제단 뿔은 죄인을 구원하는 생명의 뿔입니다.


우리 모두 이같이 예수님과 우리 신앙인들이 단순한 이익관계가 아닌 생명관계임을 늘 명심하시길 축원합니다.


2)둘째로 다른 양들과의 관계도 생명관계입니다

본문 16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미 우리에 들어 있는 양들에게만이 아닙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이미 우리 밖에 있는 모든 양들을 위해서도 그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요 3:16).

여기에는 너무나 애뜻하고 진한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내 것이기에 내 목숨을 바쳐 살려 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어 아직 울안에 들지 못한 이방의 영혼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천명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잃은 양을 찾으시는 주님의 목소리는 국경을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하여 멀리 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내주겠다고 말씀할수 있었을까요? 선한 목자 예수님은 목숨을 버릴 권세를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본문 17-18절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나아가 예수님은 다시 목숨을 얻을 권세도 가지셨습니다. 이 권세를 계명으로 하나님에게서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7-18절 “...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 놓으셨습니다. 특별히 우리 가운데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감탄했습니다.

“...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 (갈 2:20).

나아가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롬 8:32) 않겠느냐고 단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세상의 불의의 압력과 죄악의 유혹과 생활의 문제 때문에, 신앙의 길에서 잠시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은 끝났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을 것이다'라고 절대 생각하지 마십시다. 

우리 예수님은 배반하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 제자들조차(요 21:2-3)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찾으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21:15-17).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님은 동일하게 행하십니다. 이러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우리는 따라 가고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예수님이 다시금 살아나셨습니다. 그러한 부활의 생명의 주님을 우리는 따라 갑니다.


그렇습니다. 사망 권세가 죽이지 못하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나아가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인데 그 생명의 예수님을 따라갈 때 어떠한 사망 권세도 깨뜨려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 위를 걸으시며 풍랑을 멈추게 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7대 표적중 5번째 표적에서 봅니다(요 6:16-21). 예수님은 육지에서 제자들이 괴로이 노젓는 장면을 처음부터 지켜보셨습니다(막 6:47-48전반). 그리고 바다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셨습니다.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It’s I! I Am! Don’t be afraid!

나야 나! 너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준 선한 목자인 나야! 그러니 두려워 하지마!

마침내 예수님은 제자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에 그 위험을 제거하시며 구원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자신의 목숨까지도 우리에게 내어 주신 선한 목자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불어 닥치는 어떠한 큰 풍랑이라도 잠잠케 하십니다.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 예수님의 음성만을 듣고 따라 가십시다. 이 세상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한 발자국 앞으로 전진하십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거짓 삯군인 마귀와 세상의 거짓된 소리, 거짓 협박에 속지 마십시다. 선한 목자 예수님의 온전한 보호와 인도를 받는 축복의 신앙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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