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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5장 19절 말씀 묵상 [이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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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56)-죽은 믿음 vs 산 믿음


행25: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예수는 역사다’(The Case for Christ)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시카고 트리뷴 지의 최연소 신입 기자로 입사한 후 능력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하던 ‘리 스트로벨’의 책을 영화로 만든 작품입니다.


리 스트로벨은 무신론에서 신앙에 이른 자신의 영적 여행을 역사학, 고고학, 사본 연구 분야의 여러 권위자들을 반대 심문하면서 이루어갑니다. 마치 베스도의 바울에 대한 공소장과 같이 ‘객관적 기조‘로 시작합니다.


그의 영적 탐구는 단순한 사건 사고로 비롯되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하던 자리에서 한 크리스천의 기도로 딸이 응급상황에서 구해집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아내가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무신론자였던 리 스토로벨은 사실과 이성적인 근거를 중시하며, 아내의 신앙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주장은 “사실을 통해서만 진실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리 스토로벨은 마치 예수의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실제’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영적 기행은 신문기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의 ‘헛된 신앙’을 깨버리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전문가들의 소견과 수많은 증거들을 따라 예수의 존재에 대한 수소문을 끈질기게 추구합니다. “나사렛 예수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을 만한 증거가 있는가? 신약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


“성경 외에 예수님의 존재에 관한 증거가 있는가?”, ”부활을 실제 일어난 사건으로 믿을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예일대 법대 출신 기자로 거칠고 날카로운 질문을 서슴없이 전개합니다.


그러다 자신의 기사로 인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기소된 ‘힉스 사건‘을 겪으면서 사실과 믿음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그는 예수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놀라운 진실을 발견해 가기 시작합니다.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신문 기자로서의 회의는 예수의 부활이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이라는 놀랄만한 역사적 증거 앞에 녹아내립니다. 오랫동안 품어 왔던 무신론은 역사적 진실의 무게 앞에 굴복하고 맙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결론만큼 역사적 증거에 잘 부합되는 설명은 아무리 생각해도 만들어 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600일이 넘는 시간을 끌었던 조사가 끝난 후, 예수에 대한 그의 결론은 명백했습니다.


조용히 책상에 앉았을 때, 그는 지적인 결단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로 예수님을 통한 죄 사함과 영생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죽은 믿음이 산 믿음’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산 믿음은 지금도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머리로만 믿는 ’죽은 믿음‘이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믿게 된 믿음입니다.


’예수는 역사다‘는 픽션이 아닙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은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사건, 곧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한 한 구도자(seeker)의 진실된 영적 추구입니다.


사도행전 24장과 25장 사이에는 2년이라는 간극이 있습니다. 그러나 2년이란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바울을 죽이려던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는 한결같았습니다. 심경의 변화도, 태도의 변화도 없었습니다.


바울을 죽이겠다는 일념에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2년 동안 매일 번제를 드리고 절기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고, 금식도 했습니다.


은혜에 대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2년 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2년 전과 똑같은 분노로, 2년 전과 똑같은 증오로, 똑같은 미움으로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변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과연 바울을 죽이려는 것이 옳은 일일까? 매일같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했을 텐데, 때로는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쳤을 텐데, 어떻게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것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성경공부와 예배가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면, ’죽은 믿음‘만 양산하고 있는 행위일 뿐입니다. ’산 믿음‘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믿음입니다.


변화가 없는 신앙 생활은 ’죽은 믿음‘의 행진일 뿐입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 생각을 변화시키는 해석이 아닌 문자적, 윤리적 해석에 머문다면, 누군가를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삶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계속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일은 지속될 것입니다. 지식적인 것으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적인 성경 공부는 십자가를 지게 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성경 공부는 부활이 있어서 현재를 참아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여기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감정’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은 행복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 사건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오 주여

부활의 영광을 늘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현재의 고난은 다가올 영광에

비할 바 없음을 늘 기억하게 하소서

’죽은 믿음‘이 아닌 ’산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이 아침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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