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40b3f5e2c2989e5eb2a312d2d64e3ece_1674517773_4484.jpg
 
 

사도행전 15장 18절 말씀 묵상 [이강 목사]

작성자 정보

  • 복음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오늘 복음(35)-논리와 권위


행15: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세상에서 가장 사기를 잘 치는 사기꾼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사기꾼이 말합니다. “하나님, 인간에게 10억 년이 하나님에게는 1초라면서요?”


“물론이지!”하고 하나님이 답하십니다. 그러자 사기꾼이, “그럼 인간의 10억 원이 하나님에게는 1원이겠네요?” “당연하지!” 하고 논리의 공방이 오고갑니다.


그러자 사기꾼이 자기 ‘논리의 결정타’를 하나님께 날립니다. “하나님, 그럼 저에게 1원만 적선해 주실래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답하십니다. “오냐, 알았다. 1초만 기다려라!!”


세상의 그 어떤 논리로도 하나님을 당해낼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논리는 그저 목전의 이익을 노리는 ‘꼼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학자의 논리가 기도하는 할머니를 넘어설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 어떠한 논리도 믿음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것이 곧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이단에 빠진 경우가 그렇습니다. 너무 ‘순수’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이단의 성경해석이나 신학적 논리에 속아 넘어들어 갑니다. 신천지나 JMS 등에 젊고, 논리적인 대학생들이 빠져든 사례들이 그렇습니다. 황당하기만 합니다.


실제로 피지에 가 보니, 한국이나 미주에서 온 젊은 한인 청년 수백명이 이단에 빠져, 그곳에 와, 임금도 받지 않고, ‘투자자’라는 명목으로 그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인구 90만에 불과한 조그만 섬나라에 그 이단의 이름으로 뉴저지에 있는 대형 주유소 겸 편이점 마트인 ‘Wawa’를 본 딴 점포 15개를 오픈하였고, 지금도 더 많은 점포를 짖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지의 ‘하이엔드’ 상류층을 겨냥한 식당 및 마트를 계속 오픈하고 있고, 그들 점포에는 영락없이 ‘한인 청년’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이단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영업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옛날 ‘신앙촌’이 하던 형식의 영업을 ‘Truemart’란 이름으로 하고 있습니다. ’진리‘라는 이름을 장사에 사용한 것입니다. 여기저기 성경구절을 인용해 벽에 써붙였습니다.


신앙은 논리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인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논리적일수록 오히려 진리에서 멀 수 있습니다. 성경이나 신학적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람들도 이런 식입니다.


그들은 성경 여기저기를 찾아가며 설명합니다. ‘짜깁기’ 식의 성경해석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논리에 필요한 성경구절들을 모두 외워서 말해,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의 말에 빨려 들어갑니다. 


더 논리적이면 더 진리에 가까운 것 같이 들립니다. ‘여호와의 증인’도 그렇습니다. 너무 논리적이라 반박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무섭습니다. 그러나 반박할 수 없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도 무서울 정도로 논리적이었습니다. 지독하게 논리적인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고소에 예수님은 아무 반박도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은 유명한 ‘거룩한 회담’ (Holy Conference)이라고 불리는 예루살렘 회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소아시아 지역 선교를 다녀와 선교보고를 합니다.


수많은 이적과 표적이 나타났고,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왔음을 전합니다. 그러자 유대주의자들이 반발하고 나섭니다. 그들을 받아들이려면,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해야한다는 주장입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른 논리의 공방이 서로 팽팽히 맞선 가운데 ’예루살렘 종교회의‘에 상정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인 선교보고에 이어 유대주의자들의 반대발언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자신의 선교 경험을 간증하면서 지지발언을 합니다. 소위 ‘거룩한 회담’의 토론을 나눈 것입니다.


이에 예루살렘 교회 담임 목사였던 야고보가 최종 ruling(판결)을 내립니다. 말씀에 근거한 판결입니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15,18)


결국 이방인의 믿음을 인정하고, 한 형제 자매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권위가 인정된 것은 그가 ‘낙타무릎’이라는 별명을 지닌 사도였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말씀의 논리와 기도의 권위로 초대교회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진리’로 믿는 이들만이 이러한 겸손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판단하기 어렵게 느껴지면 주저없이 무릎 꿇고 성령께 물읍시다. 묻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내가 틀릴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의 권위가 무릎으로 묻는데서 났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이처럼 주님께 물읍시다. 매일 말씀을 읽고 ’샤알‘하면서 삶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은 여유가 있습니다. 그 여유가 ’영적 실력’이고 권위입니다.


오 주여

늘 샤알하며(주님께 묻고)

말씀과 기도의 실력을 쌓게 하소서

삶의 여유가 이에서 나게 하소서

이 아침의 기도입니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1,181 / 10 페이지
번호
제 목
이름



최신글 모음


새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