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40b3f5e2c2989e5eb2a312d2d64e3ece_1674517773_4484.jpg
 
 

사도행전 9장 15절 말씀 묵상 [이강 목사]

작성자 정보

  • 복음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오늘 복음(17)-그릇론(論)


행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세계 최대의 빈민촌인 인도 뭄바이의 ’다라비‘ 출신 고아 ‘자말’은 거액의 상금이 걸린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라는 최고 인기 퀴즈쇼에 참가합니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스토리입니다.


처음 모두에게 무시당하던 ‘자말’은 예상을 깨고 최종 라운드에 오르게 됩니다. 정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18세 소년이 모든 퀴즈를 맞혀나가자, 부정행위를 의심한 경찰은 그를 사기죄로 체포합니다. 


그러나 ‘자말’이 살아온 모든 순간 순간들이 그가 정답을 맞출 수 있게 한 실마리였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삶 자체가 얼마나 큰 지혜의 실마리를 줄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스토리입니다.


다라비는 2.1 km2(약 60만 평) 지역으로 100만이 훨씬 넘는 ‘불가촉 천민’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곳입니다. 약 7-8평의 좁은 집에 평균 5-12명의 가족이 삽니다. 1평 당 1.8명이 거주하는 밀집도입니다.


여러 차례, 다라비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인상 깊게 느낀 것은 그 곳 젊은이들의 열정입니다. 그들의 ‘깊은 눈’ 속에 담겨 있는 열망입니다. 복음을 통해 참다운 ‘신분상승’을 바라는 열망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뜨겁게 복음을 사모하고, 받아들이는지 모릅니다. 그릇은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보화를 담으면 보배합이 되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집 찬장엔 많은 그릇이 있습니다. 그 그릇 중에서 매일 사용하는 그릇이 가장 귀하고 비싼 그릇은 아닐 것입니다. 비싼 것은 나중에 귀한 손님이 올 때나 사용합니다. 


그렇다고 그릇들이 주인에게 항의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 쓰임 또한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결정합니다. 


오래 전 미국 선교사들의 우스꽝스런 그릇 일화가 있습니다. 요강에 빵과 초콜릿을 담아 손님들에게 내놓은 것입니다. 사기 요강에 사군자가 그려져 있어 귀한 그릇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강에 맛있는 초콜릿을 담으니 특별한 초콜릿 그릇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가치는 자신의 조건이나 형편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사울이라는 그릇에는 혈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율법주의가 담겨 있었습니다. 자기 의와 자기 자랑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울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큰 그릇, 멋진 그릇이 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가 그렇게 할수록 성령의 사역을 훼방하는 진노의 그릇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그릇을 택하신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아나니아는 바로 이의를 제기합니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불만을 한 마디로 일축하십니다.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주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은 많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하는데 사울만큼 적당한 사람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면 더 잘 할 것이라 생각하여 자신을 뽑아주지 않으면 불평을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이런 하찮은 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은 훨씬 더 우리 자신을 잘 아십니다. 


주님은 사울이란 그릇에 보배로운 복음을 담게 하시고 ‘Made in Jesus’라는 이름을 새기시고 빛과 사랑과 은혜와 진리를 전하는 도구로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뜻과 계획은 단순히 계획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전한 심오한 복음 진리는 고위 관리들부터 당대 지성인들까지 예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만들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논란이 뜨겁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는 금수저, 흙수저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스스로 ‘작은 자’가 된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후4:7)고 말씀합니다.


흙수저면 어떻고 질그릇이면 어떻습니까? 거기에 보배를 담으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보배로운 복음을 담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6년 전(2019년) 다라비의 좁은 공간에서 있었던 부훙회 사진을 올려드립니다. 8월에 있을 피지 집회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1,184 / 18 페이지
번호
제 목
이름



최신글 모음


새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