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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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장 4절 말씀 묵상 [이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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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1)- 약속


행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오늘부터 사도행전을 아침에 묵상합니다. 저는 사도행전을 한글성경으로 읽은 후, 영어성경으로 읽고 세번째로는 스페인어 성경으로 읽습니다. 번역의 미묘한 차이도 발견하고, 언어의 뉴앙스가 다른 것을 봅니다.


다른 번역본들을 대조하며 묵상에 도움을 얻으려 합니다. 물론 앞으로 세 언어로 복음을 증거하는데 도움을 얻으려는 ‘욕심’도 묻어 있습니다. 복음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초대교회 때 성령의 나타나심을 기록하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에도 나타날 성령 행전을 계속 기록해 나갈 것을 말씀합니다.


스페니쉬 성경은 이것을 ‘Dios habla hoy(오늘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오늘 복음”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록할 Acts 29(우리 삶에 나타난 사도행전 29 장)입니다.


사도행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단어는 ‘약속’입니다. 왜일까? 믿음은 ‘약속’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약속(Promise)을 믿고, 또한 그 약속을 주신 분(Promisor)를 믿는 것입니다.


오래 전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단체로 가는 소풍을 주로 ‘서오릉’으로 갔습니다. 왜 피크닉을 묘지로 가는가? 의아해 할지 모르지만 많은 아이들이 뛰어 놀 수 있는 ‘명당자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오릉에 얽힌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숙종 왕 때 한 청년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수원의 한 냇가에 묻기 위해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선비가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 왜 사람을 개울에 묻으려고 하느냐고 나무랐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눈물을 훔치며 ‘갈 처사’라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선비는 민심을 살피던 숙종임금이었습니다. 왕은 무식하지만 효심이 지극한 그 청년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쌀 삼백 섬을 하사하고 명당자리에 어머니를 모시게 했습니다. 왕은 ‘갈 처사’라는 사람을 괘씸히 여겨서 그를 찾아가 왜 청년에게 그런 어리석은 짓을 시켰냐고 따졌습니다.


따지는 선비가 누군지 모르던 갈 처사는 말했습니다. “개뿔도 모르면 잠자코 있으시오. 그 곳은 그 곳에 시신을 묻기 전에 많은 곡식을 얻고 또 새로운 명당자리를 얻게 할 ‘명당’이요. 묻기 전에 복이 들어오는데 그 곳이 냇가든 무슨 상관이요?”


갈 처사의 능력을 알게 된 숙종은 자신의 묘자리도 그에게 물어, 서울 서북쪽 서오릉에 자리한 ‘명릉’이란 자리를 잡게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릴 적, 소풍을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한 묘 선정이었습니다.


이 스토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바로 ‘약속’입니다. 믿음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갈 처사’의 뜬금없어 보이는 약속을 믿고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에 비길 수 없이 엄청난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따르기만 하면 복이 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로 어머니를 냇가에 묻으려 했던 청년보다 더 무모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한 ‘약속’입니다. 성경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때 쓰인 영어 단어가 Testament 또는 Covenant입니다.


신약과 구약에 쓰인 Testament는 ‘유언’의 의미이고 Covenant(언약)는 서로 간 ‘합의된 약속’이라는 의미입니다. 특히 Covenant는 ‘피로 맺은 합의’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어 모두 ‘약속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라고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가 우리의 ’중보‘가 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교회도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다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성령 강림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며“(14절) 기다린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in one accord)에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과 기도하는 이들의 마음이 먼저 하나가 된 것입니다.


무엇을 말씀합니까? 약속을 믿음으로 마음 가운데 화합하는 것이 먼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는 무리들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기도에 힘쓰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은 제자들에게는 떠나고 싶은 곳으로, 실패와 상처를 받은 곳입니다.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은 장소였습니다. 

 

삼년동안 모든 생업을 포기하고 따랐던 주님이 힘 한번 쓰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신 실패한 기억만 있는 곳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끔찍한 기억이 사무친 곳입니다.

 

그런 예루살렘을 왜 떠나지 말라고 하실까? 문제를 피하지 말고 돌파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보면 ‘예루살렘’ 같은 환경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기대했던 일들이 실패로 찾아오고 병들고 배신당하여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고 그냥 포기하고, 떠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딪쳐 해결해야 합니다. 

 

무엇을 믿고 기다려야 할까? 약속을 붙들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때 약속의 결과로 오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에 앞서 우리의 망가진 내면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약속을 붙들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감히 행함에 옮길 때, 그때 홀연히 은혜는 다가옵니다.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오 주여

오늘도 약속을 붙들고 기다립니다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 아침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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