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장 31절 말씀 묵상 [이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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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50)-눈물로 한 훈계
행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오래 전 학창 시절에 아이들끼리 ‘잘난 척’ 하며 떠들던 ’개똥 철학‘ 가운데 독일 문호 괴테를 인용하던 표현이 있습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맛을 모른다.“
그땐 마치 인생을 다 살아본 듯, 치기 넘치게 떠들어 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목회에도 적용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눈물 젖은 설교를 해보지 않은 목사는 복음의 참맛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저도 설교할 때 가끔 울컥해서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원래 감성적이긴 하지만 사람들 앞에 눈물을 보이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제가 눈물에 자유로워진(?) 것은 성경을 읽은 후 부터입니다.
예수님도 우셨고, 사도 바울도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셨습니다. 영국 시인 로버트 헤릭의 말처럼 “눈물은 눈의 멋진 언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눈물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강력한 몸의 표현입니다. 슬플 때 울지 않으면 몸이 대신 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한 스트레스가 건강을 망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눈물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호르몬을 우리의 몸 밖으로 배출하므로 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실컷 울고 나면 신경이 안정되고 정신정화 효과에 의해 마음이 깨끗해지기 때문입니다.
1997년 Diana 공주가 죽었을 때 이것이 사실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전 세계로 중계되며 세기의 비극으로 소개된 사건이었습니다. 영국 시민들은 TV로 장례식을 시청하는 동안 슬픔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 후 한 동안 심리상담으로 의사의 도움을 받는 영국의 환자 수가 반으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Diana 효과’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실컷 울어서 온 효과입니다.
SBS 스페셜 92회 방송은 ’신이 내린 묘약 – 눈물’이란 제목으로 ‘왜 우는 사람이 더 행복한가?‘에 대한 리서치를 사례를 통해 소개했습니다. 사례의 주인공, 김진성씨는 전형적인 한국의 40대 가장입니다.
군인 장교 출신인 그는 여러 번 사업이 실패해도, 아내와의 이혼 위기에서도, 혹독한 사춘기로 방황 하는 아들 앞에서도 절대로 울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아빠는 감정도 없는 냉혈한“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던 그가 변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우는 모임’을 통해 스스로 마음속에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아내 앞에서,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가정이 변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상처받았던 아들과 아내의 마음이 아빠의 눈물로 녹아내린 것입니다. 눈물이 신이 내린 묘약이었습니다. 눈물은 우리 자신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치유 촉매제입니다.
눈물은 ‘자아의 피’와 같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때 눈물은 흐르지 않고, 우리 영혼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나 자아가 죽으면 나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생명의 눈물이 되어 흐릅니다.
그리고 그 눈물이 다른 영혼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내 영혼의 정화가 곧 다른 영혼의 정화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마음 성전’이 세워져,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전이 됩니다.
그리고 그 눈물 때문에 정화된 사람도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주님의 안식처가 되어드리며 동시에 자신의 안식처를 눈물로 닦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울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 자신이 쉴 안식처를 마련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눈물로 마음의 성전을 마련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때에 눈물로 준비한 성전이 우리의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 교회 장로들을 데려오도록 합니다. 그리고 고별 설교를 통해 그들에게 당부합니다. 그가 그들 가운데 어떻게 행했는지 기억하라는 겁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긴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하실 때 사용하신 ‘키 워드’ 중 하나인 ‘기억하라’를 사도 바울이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기억하라(remember)는 바울의 당부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만찬을 제정하며 들려 준 말씀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베푸신 성만찬을 ‘눈물로 한 훈계’로 기억시킨 것입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기억하라)“(고전11:24). 기념하라로 번역된 단어는 원래 ‘기억하라’ 입니다.
그래서 성찬은 ‘눈물 젖은 떡’을 받아 먹는 예식입니다. 그 떡에는 모든 ’겸손과 눈물‘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 떡을 먹은 후 받는 잔은 우리의 자아를 죽이는 피가 담겨 우리 영혼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기억하라(remember)는 당부는 곧 돌이키고 회개하라(return and resolve)라는 당부로 이어지고, 결단하라(resolve)는 당부로 이어져 ‘눈물로 한 훈계’가 우리 삶에 나타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오 주여
오늘도 ’눈물로 한 훈계‘를 기억하고
우리의 자아가 죽어 눈물이 흐르게 하소서
그 눈물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게 하소서
이웃의 영혼도 깨끗게 하여
우리 모두 주의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소서
이 아침의 기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