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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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본문 : 마태복음 6장 9-13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의 두번째 부분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이것은 주기도문의 내용 중에 본론에 해당하는 여섯 개의 간구 중에 첫번째 구절입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기도할때 가장 먼저 구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나라이 임하옵시며’를 먼저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를 먼저 기도해야 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은 먼저 우리에게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한 것을 권면합니다.
날마다의 일용할 양식이 있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이며 인생을 살면서 죄사함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이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명예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필요, 나의 개인적인 요구 조건과 그리고 개인적으로 부닥친 모든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주님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기도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습니다.
내 요구가 먼저 오지 않습니다.
기도의 첫째 시작은 하나님이십니다.
기도는 내 형편과 처지가 아니라 존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영적 요구가 아무리 필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영적 요구가 아무리 거룩한 것이라 할지라도 나 자신의 필요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의 필요를 제쳐놓고나의 소원을 뒷전에 물려놓고 하나님의 이름부터 찬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인생의 유익보다 반드시 우선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곧 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한 사람의 생애를 붙잡을때 그의 생애가 축복으로 넘쳐납니다.
내가 아무리 내 자신에 대하여 잘 알고 내 인생에 대해서 멋진 설계를 하였다고 할지라도 내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보는 관점하고는 다릅니다.
어린 아이들이 노는 것을 가만히 살펴 보십시다.
그들은 구슬치기, 딱지 따먹기 하며 노는 것을 아주 좋아하며 재미있게 놉니다.
저도 초등학교 다닐 때 여름에는 딱지치기, 겨울에는 구슬치기가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겨울 방학만 되면 그 추운 겨울에 아침 일찍부터 나가 하루종일 밥도 굶으면서 동네 아이들과 구슬치기하면서 보냅니다. 손발이 다 얼어 터져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구슬만 많이 따서 내 보물 항아리 속에 채워 놓으면 그저 싱긍벙글합니다.
그러나 내가 좀 더 커서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니까 내가 어렸을때 하던 그 구슬치기, 딱지치기가 왜 그렇게 유치한지 내가 저 구슬 하나 따기 위해 겨울에 손발이 다 터져가며 때로는 친구와 구슬 하나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또 거짓말을 했는지 한심스러웠습니다.
내가 나의 인생을 향한 요구 그것이 너무나 갈급하고 소망스럽고 또한 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우리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것이 시시한 것일 수 있고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는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 그분이 나를 향하는 풍성한 은혜로 인도해 주시기를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넘쳐날때 우리는 잘못될 수 없습니다.
나의 최대의 유익이 하나님의 영광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나의 간구 나의 필요 나의 갈급한 소원을 구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사람의 이름을 부를때 그 사람의 이름이 그 사람의 인격과 신분을 대표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대표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서 자기를 나타내실때 이름을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이름이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성경을 가리켜 “이름들의 책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그 이름은 거의 다 뜻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뜻입니까? 너는 열국의 아비다.
모세의 뜻은 무엇입니까? 물에서 건져냈다.
예수는 무슨 뜻입니까? 구원,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이름에는 그 사람의 생애가 다 요약해서 들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이 무엇입니까? 시몬입니다. 시몬의 뜻은 흔들리는 모래입니다.
그런데 그 흔들리는 모래인 시몬이 주님 앞에 나와서 주께서 그를 붙잡아 게바 곧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흔들리는 모래에서 굳건한 반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의 인물은 이름 자체에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도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글로 세상을 빛내라고 해서 글월 문자에다 빛날 희자에서 ‘문희’라고 지어졌습니다.
항상 의롭게 살고 의와 윗사람을 공경하라고 옳은 의에다 공경 흠해서 ‘의흠’ 이라고 지어졌습니다.
누구나 이름을 아름답게 지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는 ‘은별’이 ‘붉은 하늘’해서 ‘홍하늘’ ‘새회’도 있습니다.
또 ‘새롬’이 ‘아름이’ ‘금잔디’ ‘금나라’ 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 딸 이름은 ‘향안’인데 성씨가 ‘임’씨입니다. 그래서 붙여 부르면 ‘임향안’이 됩니다.
우리가 이름을 부르면 그 어떠 어떠한 사람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하면 그 어떠 어떠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하면 능력이 많으신 분 거룩하신 분 사랑이 많되 자기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분 내가 환난때마다 그분께 매달려 부르짖으면 내 생활속에 들어와 나를 붙잡아 주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분,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뒤따르는 많은 이름들이 생겨났습니다.
‘여호와 살렘’ 무엇입니까? 평강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여호와 이레’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너희 삶 모든 생활에 앞서서 내가 너희를 인도하는 하나님이다.
‘여호와 닛시’ 승리의 깃발이신 하나님.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
‘여호와 라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이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그는 나를 홀로 들판 가운데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내곁에 계셔서 나를 붙드시며 간섭하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이십니까?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여러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흔히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이란 호칭입니다.
이것은 우리말 성경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가 능력이 많으신 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인데 나의 모든 문제를 내어 맡기고 나의 모든 상황을 위로하며 내모든 현실을 그분께 맡기는 순간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모든 문제를 맡으시고 내 현실을 붙잡으시고 내속에 역사하셔서 내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또 구약에서 흔히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 여호와란 이름이 있습니다.
그 본래 발음은 ‘야훼’ 로 여호와 하나님, 곧 야훼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그 뜻은 영원하시고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약속하시고 계약을 맺으시며 그리고 그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이루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구속자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속에 들어 오셔서 나의 상황을 변하시고 친히 약속하신 약속을 반드시 실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그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 왜 우리 백성을 이대로 놓아 두십니까?
약속하신대로 우리 백성을 구원하옵소서”
절실하게 외치면서 ‘야훼 여호와 하나님이시여’하고 불렀습니다.
야훼 하나님.
그는 나를 망망한 사막가운데 홀로 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내곁에 서서 나를 붙드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이십니까?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부로 ‘야훼’라는 단어를 입술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단어를 발음하기 위해서 목욕을 했으며 그리고 오랜 세월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단지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씩 거룩한 옷을 입고 양의 피를 칠하고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가 야훼 하나님을 불렀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경을 읽다가 ‘야훼’라는 단어가 나오면 이 단어는 그대로 발음하지 않고 ‘음음’하면서 묵음으로 그냥 지나갔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휴지든지 인쇄된 글자가 있으면 절대로 밟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인쇄된 글자 속에 혹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있을까봐 겁이 나서 지금도 그들은 휴지조각을 밟지 않고 다닙니다.
만약 그 휴지에 하나님이란 이름이 있다면 하나님을 짓밟고 다니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만큼 하나님의 이름은 소중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주님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냅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 자신이 보여 주고 싶으신 성품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의 권세를 알았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골리앗 앞에 섰습니다.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합니다. 그때 어린 소년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큰소리로 외치기를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나에게 나오지만 나는 네가 모독하는 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가 나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예가 걸려있는 돌맹이입니다.
이 하나님의 명예가 걸려있는 돌멩이가 미사일보다 더 정확하게 골리앗의 이마를 뚫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의 확신있는 삶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나의 생애를 의에 길로 인도하시도다 자기 명예를 걸어 놓고 나의 삶을 복되게 인도하신다”고 간증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참 아름답습니다.
베드로도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향해서 “내게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여기에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내용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운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여기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구별되었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다른 모든 것과는 구별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기구들은 왜 거룩하다고 합니까?
그것은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도록 거룩하게 그 사용 목적을 구별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도’라고 부릅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만 살도록 구별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그 하나님은 다른 모든 피조물로부터 구별되어야만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과 구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두번째 의미는 인간은 거룩하지 않지만 거룩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짐으로서 거룩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 거룩,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거룩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짐으로서 거룩해집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지어다”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거룩하지 않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음으로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까?
첫째, 우리가 주님 앞에 가까이 나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으로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옵니까?
예배로서 하나님께 나옵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이 예배에 참석해 하나님께 드린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이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이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시간입니다.
이 예배에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이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 예배 속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포함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이 나타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참된 경배가 그 앞에 있어야 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독백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전에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거룩이 마음에 깊이 묵상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찬송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합시다.
때로 우리는 찬송가를 부를때 감정이나 들뜨는 기분으로 흥분해서 부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불러서는 안됩니다.
찬송은 내 감정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의 신앙고백으로 정중하게 드려져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억눌림, 감정을 발산하는 도구로서 혹은 나를 유쾌하고 기분좋게하는 노래로서 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찬양은 아름답게 불러야 합니다.
나의 마음과 몸, 나의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한다는 자세로 찬양을 불러야 합니다.
그런 찬양은 비록 음치가 부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아름답게 받으십니다.
이렇게 매주일마다 부르는 우리 에덴 성가대의 찬양을 하나님은 아름답게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에서는 하루 종일 염불만 해도 됩니다.
회교는 메카를 향해서 하루에 다섯번씩 엉덩이를 쳐들고 기도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찬송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천군 천사의 찬송을 들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아름다운 찬송을 들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난 자는 찬송이 있습니다.
흑인들이 미국에 잡혀서 개, 돼지 같은 취급을 당했지만 누군가 모르게 전해 준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나자 그들은 괴로움과 고통속에서도 작사자와 작곡자도 없이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이것이 흑인명가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기독교에만 찬송이 있습니다.
우리는 찬송과 기도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때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해집니다.
시 33:21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며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며 그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알때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대접하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영광스럽게 하고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를 그분앞에 전폭적으로 내어 맡기는 순간 그의 이름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롬 4:20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에 대해 말하기를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가고 그의 아내가 늙어 더이상 후손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에 빠졌을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다시 한번 그의 약속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되리라”
이 약속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습니까?
이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고 하셨습니다.
이때 비로소 아브라함이 자기의 모든 의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때 아브라함의 이런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을 성경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때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때 그 하나님이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그 일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고 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생활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잘못되면 그의 이름이 욕먹는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잘못될때 그의 아버지가 욕을 먹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께서 욕을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자식이 나쁠때 ‘저놈은 뉘집 자식이냐?’ 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잘못될때 꼭 듣는 말이 “뭐 예수 믿는 사람이 다 저래?” 라는 말합니다.
내가 잘못 될때 주님이 욕먹고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집니다.
우리가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런 말들이 자주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 일을 행하시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더라’
주님의 행적 뒤에는 늘 이런 말이 따라 다녔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이 00다. 김 00다가 아닙니다.
밖에 나가면 “예수꾼이다. 예수쟁이다”입니다.
나의 첫 이름은 “예수 믿는 아무개다”입니다.
제가 군대 있을때 군인들이 저를 보면 “아 백일병 온다. 백병장 온다.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꼭 아 예수쟁이 온다” “할렐루야 아멘 온다” “군종온다” “새끼 목사 온다” 이렇게 불렀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지 않을때 하나님께서 욕을 당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나타내지 않을때 하나님의 이름이 먹칠을 당합니다.
그러나 나의 삶이 바로 나타난다면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의 영웅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황제가 휘하의 부하들이 야영하는 막사를 순찰했습니다.
다들 조용히 잘 있는데 어느 막사 앞을 지나려니까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무엇으로 저렇게 떠드나 하고 엿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떠드는 내용이 “보나파르트 그놈은 사기꾼이고 나쁜놈이고 죽일놈이다” 라고 욕하는 소리였습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황제는 자기를 욕하는 것에 분노하여 막사 안으로 쑥 들어 갔습니다.
막사 안의 병사들이 기절초풍하고 놀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부하들은 늠름하게 황제 폐하가 자기들의 막사에 왕림해준 것에 감격하는 빛들을 띠고 있었습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이놈들 내가 없는 자리라고 나를 그렇게 욕할 수 있느냐?”
그러자 병사들은 당황해서 “폐하 저희가 언제 페하를 욕했습니까?”
“내가 들어오기 전에 보나파르트 그놈 나쁜 놈이고 사기꾼이고 죽일 놈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하 그거요? 저희 소대에 보나파르트라고 아주 질이 나쁜 병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건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하고 같은 이름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보나파르트 황제와 같은 이름을 그대로 가진 사병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말을 듣고 보나파르트 황제는 보나파르트라는 사병을 붙잡아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병이 붙잡혀 왔습니다. 장군들도 감히 그 앞에서는 얼굴도 들 수 없는 황제 앞에서 보나파르트가 사시나무 떨듯이 앉아 있습니다.
영웅 황제 보나파르트가 사병 보나파르트를 향해서 준엄하고 명령합니다.
“네 이놈 너는 둘 중에 하나를 고쳐야 한다. 네 이름을 고치든지, 아니면 네 행실을 고치든지 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첫이름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고치시겠습니까? 아니면 행동을 고치시겠습니까?
우리를 볼 때 우리의 아버지가 어떤 분인 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볼때 ‘마귀 새끼 같다’라고 핀잔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주님 같다. 하나님 같다’라는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거룩을 들어 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불독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원숭이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원숭이가 나의 조상”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의 삶을 통해서 그분이 영광도 받으시고 멸시도 받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거나 우리의 삶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나지 않을때 하나님께서 욕을 당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매일의 삶을 향해서 그의 거룩을 진심으로 추구하고 그 거룩이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나서 복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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