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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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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본문 : 마태복음 6장 9-13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오늘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운데 6째 부분, 즉 12절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부분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주기도문을 드려 왔습니다.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이라면 적어도 1주일에 한두번은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저도 지금까지 내가 몇번이나 주기도문을 드렸나? 생각해 보니 적어도 일만번이상 주기도문을 외웠습니다. 

제가 매일 가정예배 때마다 혹은 교회의 예배 때마다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주기도문 가운데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래도 다른 부분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생각하면 다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고 기도하고” 

주기도문의 모든 부분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생각하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라고 했는데 우리는 언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었던가? 


저는 암만 생각해도 “내가 하나님께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 내가 오늘 나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나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드릴 자신도 없고 드린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나의 잘못을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매일 기도는 하지만 나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적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주기도문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나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의 죄를 내가 용서해 준 것을 근거로 해서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뇌물로 해서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드리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조건부 기도처럼 드립니다. 

오히려 이 주기도문을 이렇게 바꾸면 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었으니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게 하옵소서” 

그래서 이 기도는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기도를 잘못된 기도라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이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주기도문 전체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더구나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십자가에서 구속하실 때 과거에 지은 죄가 현재 짓고 있는 죄와 그리고 앞으로 지을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용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모든 죄를 완전하게 용서하신 것을 믿을진대 이 기도는 잘못된 것이 아닌가?”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는 이미 용서 받았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히 용서 받았습니다. 

내가 지금 짓고 있는 죄가 우리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내 모든 죄가 동에서 서가 먼것처럼 깨끗이 씻김을 받았습니다. 


제가 유년주일학교 다닐때 저의 부장 선생님이 설교하는 가운데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어떤 아들이 새해가 되어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여쭤 봤습니다. 

“아버지 제가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 수 있을까요?” 

“만약 네가 잘못하면 잘못 할때마다 문지방에 못을 박아라” 

아들은 자기가 잘못하고 죄를 지을 때마다 문지방에 못을 박았습니다. 

1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 문지방은 박힌 못으로 가득 찼습니다. 

아들은 문지방에 박힌 못을 보면서 ‘자기의 잘못이 그렇게도 많은가?’ 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말합니다. 

“애야 금년에는 네가 선한 일을 할때마다 못을 하나씩 뽑아라” 

아들은 착한 일을 했습니다. 

못은 점점 뽑혀 나갔습니다. 

못이 다 뽑아진 어느날 아들은 더욱 크게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못박았던 자욱이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가와 말합니다. 

“애야 죄를 지으면 이렇게 그 흔적이 남으니 죄 지으면 안된단다”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이 이야기를 아주 감명깊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이 예화는 상당히 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범했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 상에서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입니다. 

완전한 완성된 용서를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이룩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지었던 모든 죄에서 자유합니다. 

내가 과거에 범했던 모든 죄와 지금 짓고 있는 죄까지도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 아래서 다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니 누가 나를 정죄합니까?”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시면 그 어떤 죄악이라도 하나님의 구원에서 우리를 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았다면 “왜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고 또 기도해야 됩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죄는 우리의 근본적인 죄 즉 영혼이 멸망받아 지옥가는 죄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서 날마다 일어날 수 있는 일상범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마 5장, 6장, 7장의 산상보훈이 말씀은 주님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 즉 우리를 향해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신자들을 향해 ‘너희는 이미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존재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기도문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멸망받은 근본적인 죄는 용서함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속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일상의 죄를 위한 용서가 필요합니다. 


요 13장을 보면 주님께서 어느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베드로와 하신 대화를 통해 대단히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때 베드로의 차례가 되자 베드로는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라고 말합니다. 

이때 주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본문을 단순히 주님께서 겸손이나 봉사적 교훈을 가르치신 것만으로 생각한다면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씻는다’ 혹은 ‘씻긴다’ 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여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땅에 오신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러 오신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씻음을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을 들은 베드로는 생각을 바꾸어 발만 씻겨 주실 것이 아니라 목욕을 시켜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두가지의 씻음을 말씀하시는데 하나는 목욕이고 다른 하나는 발씻음입니다.

주님은 목욕을 되풀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중생의 체험에 적용시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을때 우리는 거듭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단 한번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우리의 죄는 영원히 해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을 살아가면서 전혀 죄와의 싸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을 얻었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에도 불구하고 죄악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요 13장의 발씻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비록 목욕을 했으나 하루종일 생활하고 걸어다니다가 저녁에 돌아오면 우리의 발은 어느새 더럽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목욕을 해도 발은 쉽게 더러워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나 세상과 접촉하여 생활하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내 영혼 가운데 더럽혀져 있는 부분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또다시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다시 중생하여 의롭다함을 받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구원은 의롭다 함을 받음은 주님을 믿는 순간 단 한번만으로 영원히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단지 발씻음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사실을 오늘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을 믿고 신자가 된 성도들이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요한 일서 1장 9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발을 씻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 앞에 죄를 자백함으로서 우리의 영혼을 계속해서 순결하게 보존해 나가야 할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 하나님의 그 무서운 진노는 사라졌지만 자식으로서 우리 아버지께 잘못했던 그 죄는 우리가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위신을 손상케 한 일, 순종하지 못한 죄를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주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건강하게 일어납니다. 

만약에 나의 괘씸한 소행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감정적으로 나를 대하신다면 내일 아침에 내가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날마다 필요합니다. 

어느 정도로 필요합니까?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이 양식을 달라는 기도 다음에 있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하는 것처럼 용서를 날마다 구해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마음은 있지만 힘이 미치지 못해서 못한 일이 우리 속에 많습니다. 

내가 지혜가 부족해서 온전히 깨닫지 못해서 엉뚱한 길로 갈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마다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용서 받음이 없이 우리가 아무리 많은 떡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 감옥에서 아무리 많은 떡을 먹어도 조금의 위로도 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많은 떡보다도 용서와 자유를 원하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우리의 육체의 삶을 편안히 할 수 있다면 죄사함을 받는 용서는 우리의 영적인 삶을 편안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직도 범죄하고 있는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가르키는 말씀입니다. 

죄라는 단어는 본래 빛이란 뜻입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12절 말씀에 죄라는 단어에 ‘2’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2’밑에 각주를 보면 이 기도의 내용이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옵시고” 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마땅히 갚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그런데 갚지 않고 있는 빚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갚아야 할 빚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갚지 못하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죄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향해 이웃을 향해 가족을 향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온갖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빛이며 성경은 그 빛들이 바로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큰죄는 없습니다. 


블란서 철학자 파스칼은 이땅에 살고 있는 인간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죄를 범하고도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죄를 범한 후 자신의 죄를 깨닫는 사람인데 먼저 것은 희망이 없는 죄인이라며 나중 것은 희망이 있는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성숙해 가며 하나님의 귀한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내 삶속에 들어오는 온갖 부조리하고 범죄한 것들을 솔직히 주님 앞에 내 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오는 순간 우리 모든 죄가 다 용서함 받았지만 아직도 우리 속에 침투하고 있는 죄악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입니다.


둘째 이 기도는 내가 죄를 자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 선생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 것은 갚아야 할 빚을 갚고 있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사람들이 죄를 자백하지 않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겸허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란 죄짓고 또 용서받고 죄짓고 또 자백하고 죄의 반복만을 거듭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자백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더 큰 범죄 속에 바지는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발을 씻어도 또 다시 더러워진다고 아예 발씻음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발을 계속해서 씻으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깨끗해져야 하는 자기 모습을 발견합니다. 

내가 죄를 자백함으로 나의 영혼을 청결히 보호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다윗도 시편 32편에서 “내가 (죄를) 토설치 아니할 때에는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으나 내 죄를 여호와께 아뢰고 죄악을 숨기 아니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다”고 죄사함의 진정한 기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죄를 자백함으로 용서함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은 나의 인생을 위대하게 변화시킵니다.


셋째로 이 기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에 앞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아량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이 기도는 순서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조건부적인 기도도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그리스도인들이 용서하는 삶의 필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을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해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미워하는 그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독사를 품고 다닙니다. 

누가 먼저 해를 당합니까? 

독사를 품고 있는 자신입니다. 

남을 미워할때 제일 고통받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남을 미워해서 한이 맺혀 있는 사람은 저녁에 잠도 잘 안오고 그 마음에 평안도 없고 실제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마음에 있는 무서운 저주를 풀지 못합니다. 

그것은 꼭 이런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누구에게 늘 맞기만 합니다. 

그래서 꾀를 내어 자기 몸에 다이나마이트를 장치해 놓고 때리기만 하면 터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속에 다이나마이트를 품은 것보다 영적으로 더 독한 것이 있다면 용서 못하는 마음,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는 마음이라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주님은 가장 크고 첫째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용서할때 완성됩니다.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용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용서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군병들이 뺨을 때리고 침을 뱉으며 머리를 흔들어 조롱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거기서 뛰어 내리라”면서 고통받는 주님의 그 고통을 더 가중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한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첫마디는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미움을 받고 있는 그 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기도는 무엇이었습니까? 

가장 첫째 기도는 무엇입니까?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살 때 미움을 받습니다. 

우리의 삶이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삶이 거룩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잘못해서 실수해서 미움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미움이 밀물처럼 우리에게 밀려 올 때가 있습니다. 

이 미움의 절정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네가 먼저 기대할 것이 있다면 우리 주님처럼 원통하다는 소리를 하지 말고 네가 먼제 저들의 죄를 위하여 기도해라” 이것이 우리 주님의 삶의 모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미움이 엄습해 올 때가 있습니까? 

미움이 여러분을 향해서 전체가 겹겹이 쌓일 때가 있습니까? 

그럴때 우리는 그들의 미움보다 더 크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눈길에 촛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미움 위에서 역사하시는 선하신 섭리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이 미움을 통해서라도 나의 생애를 향해서 하시고 싶어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찌르고 고통을 줄 때는 괴롭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찌르는 가시가 없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이만큼 겸손하겠습니까? 

내가 그 고통이 없다면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시겠습니까? 

나의 삶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때 우리는 그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얼마전에 서점에서 책을 구입해서 읽다가 도전을 받았습니다. 

저 동유럽의 루마니아의 한 목사가 공산치하에서 14년동안 지하 교회를 이끌며 복음을 전하면서 체험한 사실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다가 그 댓가로 감옥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주님 믿는 신앙을 버리게 하기 위해 혹독한 고문을 가합니다. 

불에 달군 젓가락, 포크 그래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목사님의 14살난 맏아들을 데려다가 그 목사님이 보는 앞에서 그가 신앙을 포기할 때까지 때립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 아들을 향해 “네가 맞는 것을 더이상 참을 수 없다. 이들이 요구하는대로 다 하겠다” 

이때 아들이 “아버지 부모로서 저에게 배반자라는 낙인을 물려 주지 마세요. 

아들이 나를 죽이면 저는 예수님이란 이름을 남기도 죽겠어요” 라고 말합니다. 

결국 이 아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맞아 피가 감방의 사방에 튀어 벽에 붉게 물들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죽어갑니다. 

어떤 형제는 감방에서 다른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끌러가 무수히 매를 맺았습니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감옥 바닥에 내동댕이 쳤을때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합니다. 

‘형제님 제가 복음을 전하다 끌려 나갔던 그 장소가 어디입니까?’ 그리고 그는 그 감방에서 복음의 멧시지를 계속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들이 무수히 매와 고문을 당하면서 그를 때리는 공산주의자들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반쯤 죽어 감방에 끌려 들어 왔습니다. 

그의 얼굴과 몸에서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는 몸서리치게 매를 맞았습니다. 

다른 죄수들이 그를 씻어 주었습니다. 그때 어떤 죄수가 공산주의자들을 저주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제발 그들을 저주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아무런 말씀도 마십시오.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죄인을 사랑해 공산주의자들을 죄에서 구원해야 한다.” 

그들의 멸망은 자기들에게 고난을 준 공산주의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받은 구원을 전해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고 부끄럽습니까? 

나의 마음에 미움이 몰려올때 미움의 파도에 휩쓸리지 마시고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 미움속에서 미움보다 더 크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오히려 내 주변에 나를 향해 이처럼 오해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칭찬을 해버리면 우리의 상은 이미 다 받은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이해해 주지 않은 것을 감사하기 바랍니다. 억울한 눈물을 흘린 사람을 하나님께서 그냥 놓아주지 않습니다. 

천국에 입성했을때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저희 두눈에서 눈물을 씻겨 주실 것입니다. 

억울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씻겨주실 눈물이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오해받고 그를 향한 미움이 생기더라도 하나님을 보시며 그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속에 남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이 몰려올 때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나는 사랑할 수 없사오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심에 의지해서 내가 저를 사랑하겠습니다. 

나는 저를 용서할 수 없사오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용서하심을 내가 믿음으로 이 형제를 용서하겠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할때 비로소 사랑하고 용서하는 능력의 삶을 살게 됩니다. 

날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기도는 내 삶속에서 드리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체험하시며 사시는 바른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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