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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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본문 : 마태복음 6장 25-34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 카알라일에 대하여 이런 일화가 있다.
그는 항상 생각하고 글을 쓰는 분이며 자연히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 옆집에서 닭을 몇마리 기르는데 새벽마다 우는 소리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그 주인을 만나 ‘당신네 닭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고 사정을
말하였습니다.
그때 그 주인이 ‘하룻밤에 세번 밖에 울지 않는 것을 뭐 그러시오’하고 말했다.
그러자 카알라일이 대답하기를 ‘그런데 문제는 닭이 우는 것보다 내가 그 닭 울음소리를
기다리느라고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얼른 납득이 가지 않지만 이것이 인간의 현실인 듯 합니다.
우리는 흔히 염려하지 않아도 될 일을 염려하는 때가 많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군에 입대하기 전에 상당히 두려워합니다.
‘군에는 자유가 없다는데’ ‘군대는 힘들다는데 나의 약한 몸을 가지고 어떻게 견딜까’
‘군에는 구타가 많다는데 한대만 맞아도 울고짜는 내가 어떻게 지낼까?’
저도 군에 갈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추위에 약합니다.
영하 7도만 되면 방안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꼼짝 안합니다.
그래서 겨울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제가 입대를 11월 4일에 해서 전방 사단 훈련소에서 10주 훈련 받고 1월 10일날 훈련소를 퇴소했습니다.
그해 따라 겨울이 유난히 추운데 훈련소에서 어느날 아침에 기상하여 막사 앞의 온도계를 보면 영하 28도였습니다.
그 속에서 훈련합니다. 내무반 온도도 0도 였습니다.
그래서 내무반에서 저녁에 잠들려고 누우면 목포를 뒤집어 쓰고 덜덜 떨면서 내가 이 추운 계절을 보낼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습니다.
도저히 보낼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충분히 지냈습니다.
어떤 때는 영하 20도에서 얼음을 깨고 빨래하고 매일같이 그 차가운 물로 발을 씻고 때로는 영하 10도에서 팬티바람으로 밖에서 1시간 동안 양팔을 벌려 기압을 서고 소대배치 하자마자 혹한기 훈련, 동계 종합훈련 등으로 두달동안 영하 20-30도에서 산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면서 그 추위를 견뎠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염려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에 대한 염려, 자식에 대한 염려, 사고와 불의에 대한 염려, 대인관계의 염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염려가 내뿜는 독소에 시달리면서 바삐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염려의 비중은 커지고 염려가 남긴 상처는 더욱 깊어갑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 그 염려의 대부분은 그대로 되지 않습니다.
생각하던 만큼 염려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염려로 오는 피해는 막대합니다.
염려는 나의 건강을 해치고 나의 마음과 영혼을 좀먹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해 버립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며 어리석게 살아가는 많은 이웃들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를 도와주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염려하고 걱정하고 의심하는 것이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말씀을 들으면서도 기도를 하면서도 나의 영혼은 염려로 인하여 점점 시들어가고 병들어 갑니다.
이런 나의 병든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음성이 바로 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본문에서 염려의 본질을 두가지로 규정합니다.
이 본문에서는 ‘염려’라는 단어가 6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염려가 지닌 개념에는 2가지로 구분되는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가 염려는 불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전혀 필요성이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염려의 노예가 되어 기쁨을 잃고 목적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2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여러분 염려한다고 키가 더 자랍니까?
우리 교회 학생회 고등부 2학년 자매들은 약 20명정도 되는데 그들 중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키가 작습니다.
소위 말하면 짜리몽땅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끔 서로 키를 재면서 ‘내가 너보다 조금 더 크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본 선배들이 하는 말이 “도토리 키재기지 암만 재봐라 그 키가 더 커지나?”
자기들은 키가 작은 것이 싫어서 자꾸 키에 대하여 신경쓰고 염려하지만 여러분 염려한다고 키가 자랍니까?
저는 좀 뚱뚱해지려 아무리 많이 생각하고 애써도 살이 안쪄지던데요.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전혀 불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걱정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처량한 모습을 우리 주님께서 바라 보시고 계셨습니다.
특별히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커다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나라를 침범하여 지배하고 있는 로마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자기들이 로마인들보다 키가 더 작다는 그런 열등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문제로 부질없는 걱정을 계속하는 그 당시의 자기 민족들에게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염려가 필요없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지혜 문학서에도 이러한 멧세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을 염려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쩔 수 있는 것을 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염려해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쩔 수 있는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을 해내기 위한 행동을 시작하면 되지 왜 염려하십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을 염려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고 어쩔 수 있는 것을 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염려란 어떤 일에 대한 나의 생각일 따름이지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은 아닙니다.
긍정적 행동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염려는 모두 나의 마음과 육체를 위협하는 파괴적인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미국의 한 설교가는 염려를 가리켜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염려란 마치 흔들의자와 같은 것이다”
흔들흔들하는 의자와 같다고 합니다. 그 의자에 앉아서 아무리 흔들어 보십시오.
여전히 제자리에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흔들어도 제자리입니다.
아무리 염려해도 한 발자욱도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나는 노상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염려속에 몰두하여 계속 염려하고 또 염려하고 염려를 계속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들을 봅니다.
염려해서 해결할 수 있다면 염려하십시요.
그러나 해결할 수 없다면 왜 염려하십니까?
그래서 염려는 불필요합니다.
아서랭크라는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사업에 대한 고민과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전망 때문에 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한 가운데 시간에 쫓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서랭크에게 문득 떠오르는 지헤가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염려에 붙잡혀 지내기보다는 차라리 일주일 중 하루만을 염려하는 나로 택하여 그날만 염려하고 다른날은 염려로부터 좀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중히 생각한 끝에 수용일을 염려하는 날로 택정했습니다.
그래서 ‘수요일 염려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염려가 생길 때마다 염려거리의 내용과 날짜를 기입하여 수요일 염려 상자에 넣어 두었다가 수요일에 한번 개봉을 하여 그날만 걱정합니다. 그런데 어느 수용일날 아서랭크가 한참동안 메모지를 뒤적이며 정리하다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메모지에 기입하여 상자에 넣을 때는 큰 염려거리로 생각되었던 것이 며칠이 지난 수요일에 꺼내어 보았을 때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탈바꿈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서랭크는 수요일 염려 상자를 통하여 시간이 지나고 일이 진전됨에 따라 염려 내용마저 희미해지고 염려할 이유마저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예화의 ‘수요일 염려 상자’가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분명한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염려를 해야 할 필요성이 전연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 사본에는 이 구절을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키’자에 2라고 써있고 2 밑에 각주를 보십시오.
‘목숨을’ 이라고 써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은 “네가 염려함으로 네 목숨을 한시간이나 더 연장할 수 있느냐?” 라고도 표현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염려한다고 내 임의로 키를 키울 수도 없고 내가 염려한다고 내 임의로 목숨을 연장시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염려는 우리에게 있어서 전혀 무가치하며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염려에 사로 잡혀 자신을 학대하며 길을 잃고 어둡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두번째로 염려는 전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은 신앙적인 아닙니다.
비신앙적입니다.
지나친 염려는 죄입니다.
그것은 불신앙의 죄입니다. 3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여기에서 염려는 다 이방인의 삶의 방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이방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없이 사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 예수없이 영생의 소망없이 내일에 대한 소망없이 오늘에 몰두하여 살고 있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
이것은 불신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손에 움켜쥐고 소유하기 위해서 삽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실 하나님이 안계시고 아무런 약속도 안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도움을 얻을만한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염려는 당연한 삶의 한부분입니다.
다시 말하면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없이 삶을 살고 있는 신앙없이 삶을 살고 있는 불신자의 삶의 모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염려합니까? 염려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의 밑바탕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합니다.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내 삶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나를 돌보시며 나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지키시며 내 삶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창조자로 구속자로 그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믿는 구체적인 나의 신앙고백이 없기 때문에 염려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죄입니다.
우리 같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사단의 속박을 끊어 주셨고 지옥에서 건져 천국으로 옮겨 주셨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있고 또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께서 매일 먹고 입을 것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보다 큰 선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면서 보다 작은 선물에 대해서는 그분을 믿지 못하고 비틀거립니다.
죽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면서도 이 세상 사는 동안 나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나를 돌보아 주실 것이란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염려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대한 쓸데없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 앞에서의 행동입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염려는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대한 우리의 단순한 반응에 불과하지만 신앙이란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들의 행동입니다.
조지 뮬러는 한평생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았고 그 믿음으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신앙의 기적과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던 기도의 성자 죠지 뮬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끝이다. 그러나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
이 말씀을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염려가 시작되면 나의 신앙이 끝납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모든 일을 시작하면 염려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고 나에게서 사라집니다.
그래서 염려는 비신앙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염려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염려를 해결하는 실제적인 충고를 하고 계십니다.
염려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세가지의 처방을 말씀하셨습니다.
첫번째로 자녀들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무슨 말입니까?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체를 하나님이 책임지고 기르신다는 것입니다.
참새 한마리도 백합화 한송이도 주님이 키우시며 온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 전부를 하나님이 기르십니다.
나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지고 돌보아 주십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실제적인 예화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루터는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자기 거실의 새장속에 갇혀 있는 로빈새를 들고 있습니다.
루터는 저녁식사를 끝내면 로빈새를 위하여 먹이를 갖고 새장 앞에 가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로빈새는 그 시간이 되면 루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루터가 다가오면 새는 좋아서 퍼드득거리며 장대위로 날아 앉습니다.
루터가 먹이를 던져 주면 정신없이 먹다가 배가 부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루터는 로빈새의 하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새는 많이 먹고 마시고 배가 불러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조물주를 찬양합니다.
“하나님 먹을 것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참 지저귀고 노래하다가 어느새 머리를 날개죽지에 쳐 박고는 새근새근 잠이 듭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루터는
“그렇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먹이시고 입히신다. 내 앞에 염려와 걱정거리가 많지만 나보다 못한 저 새도 염려하지 않고 깊이 잠드는데 내가 왜 잠을 못자고 방황하는가? 나는 저 새보다 훨씬 귀한 존재가 아닌가?”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되자 루터는 모든 근심에서 벗어나 깊이 잠들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물체를 하나님이 책임지고 기르신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사람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잘 보살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사람이 가장 귀한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공중나는 새를 먹이신다면 우리는 더 잘 먹이시고 더 알뜰하게 살피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떤 기독교 작가가 어린이들을 위해 이런 풍자적이고 인상깊은 이야기를 썼습니다.
“참새와 물새의 대화입니다”
어느 날 물새가 참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참새야 저 아래 지구 위에세 허덕거리며 걸어다니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봐.
저 아우성치며 허우적거리면서 살고 있는 인간들의 불쌍한 꼴을 보란 말이야.
사람들이 왜 저렇게 불안해하며 왔다갔다 돌아다니며 걱정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옆에 있던 참새가 말합니다. “물새야 그건 아마도 저들에게는 너와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모양이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왜 허우적거리십니까? 왜 그렇게 아우성이십니까? 무엇이 걱정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십니까?
여기 예수님의 이 선언을 다시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우리들이 이것들보다 귀하지 않습니까?
이 참새보다 들에 핀 한포기의 풀보다 우리의 존재가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신뢰하지 않으십니까?
나의 필요를 아시고 그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염려가 몰려 올때마다 그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 버리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두번째로 염려를 해결하는 방법은 나의 삶에 있어서 먼저 해야 될 것을 먼저하라는 것입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힁게 더하시리라”
너무 많이 들은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문제를 가장 소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만 섬기고 그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과 행복의 원천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염려하는 대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온전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너희들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염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앞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나의 신앙뿐만 아니라 생활도 엉망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나의 삶에 기쁨도 평안도 없습니다.
생활 전체가 뒤틀려가고 온통 걱정과 염려가 내게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된 하나님의 자녀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기만 하면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부탁하고 그분만 바라보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나의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염려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염려를 초월합니다.
그 모든 일이 시시히 보일 따름입니다.
허우적거리고 안타까워하며 바쁘게 분주하게 소리치고 있는 이웃들을 바라볼때 우리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들 왜 저래. 뭐 그게 문제라고 그런 시시한 일 가지고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여유가 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배짱이 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평안이 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쁨과 놀라운 감격이 있습니다.
여러분 나의 삶에 있어서 먼저 구할 것을 구하십니까?
먼저 해야 될 것을 하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었습니까?
셋째로 염려를 해결하는 방법은 만족하는 생활입니다.
3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어떤 사람은 일주일 후에 한달 후에 일년 후에 염려해도 될 것을 미리 걱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직 봄도 안됐는데 ‘올 여름은 무척 가물고 덥다는데 그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보내지’ 하고 걱정합니다.
‘올 여름 피서는 돈이 많이 들겠군’ 이제 방금 아들 하나를 낳아주고 하는 말이 “이 애가 커서 결혼할 때 쯤에는 남자는 많고 여자는 적어서 장가 보내기가 힘들다던데”
20년, 30년 후에 장가 보낼 것을 뭐하러 지금부터 걱정합니까? 그렇다면 아싸리 딸을 낳아 놓지 남은 아들 못나서 끙끙거리는데 아들 낳아 놓고 무엇하러 걱정하십니까?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1년 후의 걱정, 3년 후의 걱정, 미래의 모든 걱정을 현실로 가져와서 그 염려와 걱정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생활과 인격을 파괴하며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기쁨과 창조성을 상실해 버립니다. 우리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염려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는 것을 참으로 믿으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일 일을 가지고 오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래에 있을 일을 가지고 지금 끙끙거리며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 그때 그때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어떤 일을 당하면 그때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저는 원래 생각을 많이 하고 걱정을 많이 하던 편이었습니다.
집안 일을 혼자 떠맡아 걱정하고 지냈습니다. 가끔 혼자 방에서 걱정을 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내가 더 공부 할 수 있는 길이 열릴까? 길이 열린다면 그 비용은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또 언어는 어떻게 마스터하고 내가 또 그 공부를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까? 그 지겨운 라틴어를 또 어떻게 하고 헬라어, 히브리어, 독어, 불어, 영어를 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또 결혼은 언제 할것인가?”
생각만 해도 머리가 복잡하고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인도의 손길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나의 삶을 인도해 주신 그 하나님께서 앞으로의 나의 삶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나는 그분의 인도하심의 손길을 보면서 단지 준비하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오 하나님 오늘은 또 저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시렵니까?
오늘도 또 저에게 어떠한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렵니까?”
날마다 벅찬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하루를 시작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미래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고 현재 하는 일에 몰두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하나님께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염려처럼 비생산적이고 나의 영혼과 육체를 좀먹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아뢰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나타난 제자들 가운데서 베드로처럼 제일 염려가 많았던 제자도 없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걱정합니다.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시면 어떡하나’ ‘세금을 안내면 어떻게 되나’ ‘로마 군대들에게 잡히면 어떻게 하나’ ‘파도에 빠지면 어떻게 하나’
그는 걱정과 근심속에서 헤어나질 못합니다.
그러나 이 걱정과 근심속에 사로잡혀 평새을 살던 베드로가 마침내 그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다루심에 의해서 그의 인격과 삶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벧전 5:7)
나를 권고하시고 나를 돌보시는 그 하나님,
참새보다 더 귀한 삶의 의미를 내게 주시고 나를 지켜 보시는 그 하나님,
들에 핀 한포기의 백합화보다 더 엄청난 삶의 감격과 더 엄청난 삶의 의미를 내게 주시고 나를 지켜 보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지키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먼저 해야 될 것을 하고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내가 해야 할 값어치 있는 일들에 열중하는 사람에게 삶의 기쁨과 감격과 행복이 있습니다. 염려 대신에 기쁨과 감사가 넘쳐 납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이 시간에 저 미국의 기독교 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를 소개하면서 니버의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 하나님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을 받아 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제게 주소서.
그리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을 직면하여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제게 주소서.
그러나 이 두가지의 차이를 헤아려 알 수 있는 지혜를 제게 주십시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