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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유다의 회개와 하나님의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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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유다의 회개와 하나님의 섭리

본문 : 창세기 38장 12-30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이 12명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이12지파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고 지도자 위치에 있는 지파가 어느 지파인지 아십니까?

유다 지파입니다.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 40년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가장 지도자적인 위치에 섰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12아들 가운데 유다가 제일 중요한 사람은 아닙니다.

야곱에게는 맏아들 르우벤이 있습니다.

그는 장자였지만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혀서 장자의 칭호가 요셉에게로 갔습니다.

또 야곱의 세째 아들 레위도 중요합니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셔서 하나님의 성전 일을 감당하는 제자장 지파로 삼아 주었습니다. 제사장은 만드시 레위 지파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모세도 아론도 다 레위지파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12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축복받은 아들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자기 가족 전체를 구원하고 살렸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장자로 삼았습니다.

요셉 지파만은 특별하게 2지파의 분깃을 주어 요셉 지파는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한 분깃을 가져 레위 지파 대신에 12지파에 가입됩니다.

성경 창세기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의 기록으로 이어져 나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지파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고 축복받은 지파는 유다 지파입니다.

유다는 이중적인 신앙을 가진 세속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른 형제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특별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죽으면서 자기의 아들들에게 축복할 때 유다의 후손을 통해 메시야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유다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이 태어났습니다.

다른 지파가 망했을 때에도 유다 지파는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유다 지파를 통해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명분 가문이 유다 지파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유다 지파가 엄청난 부정과 분륜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그것도 유다가 며느리와 관계를 맺음으로 낳은 불륜의 아들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아마 유다 지파에게 오늘 본문의 성경 말씀보다 더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기록은 없을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본문의 기록만큼은 지우고 싶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부끄럽고 수치스럽다고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지나간 과거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셔야만 새롭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지파의 수치스러운 비밀을 폭로합니까?

좋은 일도 많았을텐데 그것들은 기록하지 않고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기록합니까?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나올 지파이고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가 나올 지파라면 오히려 미화시키고 좋은 내용만 기록해야 할텐데 왜 이런 불륜의 과거를 폭로합니까?

이런 일이 있었어도 기록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성경은 이런 사실을 기록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누구나 약하고 죄가 많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죄가 없고 깨끗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죄 용서함 받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유다의 불륜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이 있는 신앙의 공동체를 버리고 이방 땅에 가서 거기서 장가하고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던 유다가 그 두 아들이 죽은 후에 자기 아내마저 죽습니다.

세상 재미 보고 잘 살려고 세상으로 내려갔는데 비극적인 슬픔이 연이어 일어 납니다.


오늘 성경에 일어난 사건을 통하여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로, 본문은 유다의 불륜의 장면을 상세하게 말해 줍니다.

유다는 도적적으로 무장이 되어 있거나 가정 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장성한 세 아들을 두었을 정도이니 젊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내가 죽자 그것을 계기로 하여 성적 욕구를 억제하지 못하고 거리의 여자와 간음을 합니다.

물론 유다가 처음부터 창녀를 찾아갈 의도는 없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창녀를 보고 유혹을 느꼈고 이 창녀가 고맙게도 외상이 된다고 해서 그에게 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자의 유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솔선하여 그 여자에게로 들어 갔습니다.

이것이 다음 장에 나오는 요셉의 모습과 얼마나 다릅니까?

요셉은 주인 여자가 매일 같이 유혹하는데도 거절했습니다.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가는 한이 있어도 죄 짓는 것을 뿌리쳤습니다.

그런데 가장 거룩한 체하고 똑똑한 체 하는 그의 형 유다는 창녀를 보자 스스로 그 여자에게 먼저 다가갔습니다.

창녀를 본 순간 참을 수 없는 충동에 사로 잡혔고 수중에 가진 것이 없자 도장을 담보로 주고 지팡이를 맡기면서 자기 정욕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유다는 그 창녀가 관계를 맺고 곧 바로 그 곳을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외상으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담보물로 주었던 도장을 찾으러 친구를 보냅니다.

친구가 창녀를 찾지 못하자 소문이 날까 봐 조용하게 이 문제를 덮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석달 후에 자기 며느리가 다른 남자와 행음하여 임신했다는 소문을 듣고 며느리를 끌어 내여 불에 태워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자신의 간음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며느리가 행음했다는 말을 듣고 분노합니다.

그리고 선한 재판관이 되어 일의 자초지종도 듣지 않고 그를 죽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의 실수에는 혹독하게 대합니다.

사람의 심리가 다 그렇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 잡혔다면 남자도 있었을텐데 연약한 여자만 끌고 와서 돌로 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가 사람 앞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볼 때 그 사람 안에 있는 잘못이 나에게는 없는 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는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로 보고 나 자신의 문제도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로 바라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는 크게 보고 나의 문제는 작은 것으로 축소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유다의 모습을 보세요.

겉으로는 얼마나 깨끗한 체 하고 도덕적인 사람처럼 보입니까?

그러나 그의 두 얼굴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얼마나 위선적이고 구역질이 납니까?


인간의 마음을 조절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양심과 도덕과 그리고 신앙입니다.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어서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떨립니다.

그리고 도덕 교육을 통해 사람의 수치감을 알게하고 죄악을 억제시킵니다.

학교에서도 도덕이나 윤리 교육을 많이 시킵니다.

그러나 이 도덕이라는 것도 어두운 곳에서만 들키지 않으면 얼마든지 포장될 수 있습니다.

들키면 부끄러운 것이고 안 들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도덕입니다.

윤리 도덕 교육만을 가지고 인간을 바르게 만들 수 없습니다.

신앙 교육을 해야 합니다.

신앙 교육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도덕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만 하지만 신앙은 사람이 안 보더라도 하나님은 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죄를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의식을 느끼고 회개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놓고 회개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유대인들은 죄인과 접촉을 하면 죄가 감염되기 때문에 사람이 죄를 짓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단순히 죄인과 접촉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마음이 이미 타락해 있고 썩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타락한 마음이 죄스러운 분위기에 접촉되기만 하면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불이 붙게 됩니다.

유다가 아버지의 집에서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죄성이 통제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혼자 가나안 땅에 있고 더구나 아내가 죽자 길에서 창녀를 보자 도저히 정욕을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유혹에 빠져 들어가 죄를 짓는데 하필이면 그 상대가 바로 자신의 며느리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유다를 비난하지만 비난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도 유다처럼 죄성이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거룩하게 앉아져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예배들 드리니까 우리가 다 깨끗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마음속을 비디오로 촬영하여 여기에서 방영한다면 부끄러워서 여기 남아 있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다 문을 박차고 도망 갈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들여다 보고 계십니다.

음란하고 더럽고 거짓이 있고 미움과 질투가 있는 것을 다 보십니다.

겉으로는 남을 동정하고 사랑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동기를 보시고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의 입으로 드리는 찬양소리 기도소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내 신앙의 깊은 곳에 정직함이 있는가? 순결함이 있는가? 나쁜 동기는 없는가?’

이것을 보고 계십니다.

교회 올 때는 악한 생각이 더 드러나지 못하지만 그러나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배가 끝나면 조금씩 조금씩 드러납니다.

지금은 그런 것들을 억누르고 있을 뿐입니다.

들킨 죄인과 안 들킨 죄인의 차이일 뿐입니다.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안 들켜서 여기에 앉아 있을 뿐인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면 내가 어떠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다 용서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우리 주님이 필요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셔서 주님을 통해 죄용서함 받고 새로움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번째로 회개하는 유다의 모습이 나옵니다.

유다는 다말을 끌어내어 불에 태워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다말은 끌려 나오면서 자기를 임신시킨 사람의 물건을 제시합니다.

이 모든 일이 드러 났을 때 유다가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모습입니다.

유다는 그물건을 보았을때 그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비록 알지 못하는 가운데 저지른 죄이지만 그 대상이 바로 며느리였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나는 도저히 구제받을수 없는 인간이구나. 정말 갈데까지 다 가버렸구나!’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자기 안에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죄악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이 여자보다 훨씬 더 악하고 무서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5,26절,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 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것이니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 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유다는 다말의 행동이 죽임을 당해야 할 죄라는 것을 분명하지만 사실은 자기가 며느리보다 더 큰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만일 유다의 양심이 철저하게 죽어 있었다면 자기 체면을 위해서 시치미 잡아 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순간에 유다는 모든 사람 앞에서 자기의 죄를 자백합니다.

“저 물건은 진정 내 것이며 저 여자의 몸 속에 있는 아이는 나의 아이입니다. 물론 저 여자의 행동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내 행동은 더 악합니다. 나는 셋째 아들을 준다고 약속해 놓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 여자가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은 순전히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약속을 하고서도 지키지 않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다말의 행동을 옳은 것으로 판단합니다.

여기서 유다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 자기가 다말을 재판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재판하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말이 제시한 도장과 끈과 지팡이는 유다 자신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으면 그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증거였습니다.


여기서 유다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자복합니다.

그는 여러 사람 앞에서 여러 가지 핑계나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자기의 죄를 인정합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이 말은 “내가 다말보다 더 큰 죄인이다”라는 자백입니다.

“다말이 불에 타 죽어야 한다면 자신은 여러번 타 죽어야 마땅하다”라는 말입니다.


유다는 자기의 추악한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회개합니다.

유다는 사람의 눈만 속이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증표가 자기 며느리 손에 있고 그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가 모든 사람 앞에서 폭로 되었습니다.

그 때 유다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의 타락한 생활과 죄를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이 자백이 유다와 다말과 뱃속의 있는 아이를 다 살렸습니다.

만일 유다가 끝까지 거짓말을 하고 자기 책임을 다말에게 뒤집어 씌었더라면, 다말과 아이는 죽었을 것이고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유다도 죽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죄를 인정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다 살 수 있었고 다말이 낳은 아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내가 나의 죄를 인정하고 자백할 때 나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더 사랑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가 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따랐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가 지적 당할 때 “내가 죄를 졌습니다.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이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유다의 죄는 결코 정당시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 안 짓는 자도 사랑하시지만 죄 짓고 그 죄를 회개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십니다.

회개는 그 사람을 용서받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위대하게 만듭니다

이런 모습속에서 유다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를 특별히 택하셔서 그의 후손을 통하여, 이 불륜의 자식을 통하여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사람에게는 성장할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십니다.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후로는 다시는 다말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철저하게 회개하는 것은 말로만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유다는 회개의 열매를 맺은 사람입니다.

오늘 유다의 모습을 보시면서 혹시 우리가 실수하여 범죄를 한다 하더라도 주님 앞에 용서를 구하시 바랍니다.

주님은 어떠한 죄라도 다 용서하십니다.

나의 죄보다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더 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의 죄를 덮고도 남습니다.

항상 우리 속에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셋째로, 다말의 신앙과 하나님의 섭리가 나옵니다.

왜 다말이 유다 집안의 자녀를 가지려고 그렇게 애를 썼을까요?

유다는 나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에게 매력이 있거나 그를 보고 욕정이 들어서 유다를 끌어 들인 것이 아닙니다.

다말은 엄청난 죄악을 행하면서 시아버지를 유혹했습니다.

그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이스라엘의 씨를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14절, “그가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의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이방 여자 다말이 유다 집안에 들어 옴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죽어 버렸습니다.

그는 이제 다시 가나안 여자로 돌아 가서 재혼하여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다 집안에 남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형수가 시동생과 관계를 맺음으로 아이를 가진 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식을 구걸하는 것이고 그렇다고 시동생이 자기 남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며느리가 늙은 시아버지와 관계를 가져 자손을 갖는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고 죄입니다.

그러나 그는 치욕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씨를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여자로 돌아 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후에 이방의 모압 여자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남편이 죽었을 때 시어머니 나오미가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서 결혼하여 잘 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를 쫓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보아스를 만나 다윗의 할머니가 되고 그의 후손에서 예수님이 탄생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방 여자인 다말은 자기 목숨을 걸고 이 씨를 가지려고 했습니다.

그의 방법은 올바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의 씨를 갖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결국 그는 쌍둥이 아들을 얻게 됩니다.

다말은 자기 품에서 두명의 남자가 죽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두명의 아들을 대신해서 주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인간의 가장 부끄러운 본성과 죄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장 부끄러운 치부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고 이런 우리를 찾아 오시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상식을 뛰어 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보세요.

마리야는 처녀가 임신을 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리아도 수태할 것을 예언하는 천사에게 자기는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성령으로 잉태할 것이라고 말하자 마리아는 순종하며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는 부정한 여자로 낙인이 찍히고 예수님은 사생아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가장 부끄러운 죄악 가운데서 우리를 찾아 오시고 권하며 축복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런 취급 받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약한 자를 들어 쓰시고 미련한 자 가난한 자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우리 속에 강한 것, 좋은 것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우리 안에는 고상한 것 보다는 음란하고 더러운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창녀같은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축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추한 모습 그대로,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내 모습 그대로 내 놓고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의 모습 있는 그대로 보고 하나님께서 이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말을 보세요.

그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시동생에게 약속의 씨를 구했습니다.

그것도 안되니까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그 씨를 도둑질했습니다.

다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둑질한 여자입니다.

그는 사생결단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온갖 부끄러움과 멸시를 무릎쓰고 약속의 씨를 얻어 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복받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말이 무엇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까?

유다가 준 그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월절에 애굽의 장자를 칠 때도 문설주에 붉은 어린양의 피가 있는 집은 다 살았습니다.

여리고성의 라합도 창에 붉은 줄을 달므로 그 가족이 다 살았습니다.

그 붉은 줄은 생명을 건 증표였습니다.

왜 이런 증표가 필요합니까? 사람의 마음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무엇 때문에 살았습니까?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만약 십자가의 증표가 없었다면 우리도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만 있으면 아무리 무서운 죄를 지은 사람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사형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수치스러운 십자가로 우리를 구언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십자가가 멸망당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얻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재산이나 권력이나 성공이 아닙니다.

나의 훌륭한 인격이나 착한 행실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다말도 유다가 준 수치스러운 증표 때문에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를 구원하는 이 증표인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다말이 쌍둥이 아들 베레스와 세라를 낳습니다.

이 베레스가 바로 다윗의 조상입니다.

베레스는 불륜의 자식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계보에서 다윗과 메시야가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악한 씨마저 용납하시고 선하게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큰일을 맡기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과 힘이 됩니까?


인간은 언제라도 범죄할 수 있는 존재이기만 하나님 앞에 깨닫고 돌아올 때에는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그를 선하게 만드시고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인간이 흠이 없고 완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좋이 않은 일마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늘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희망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베레스와 세라 같은 불행한 과거와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시고 그런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약속의 아들을 바로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유다 같고 다말 같지만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의 어떤 죄라도 용서하시고 부끄러운 나지만 내가 수치를 무릎쓰고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은혜를 주십니다.

이런 용서와 은혜를 다 받으셔서 연약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어 나가는 축복이 넘치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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