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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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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본문: 창세기 17장 1-14절

설교: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저는 가끔 저와 예수 믿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고민에 빠집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소위 말해서 '예수쟁이' '예수 꾼'입니다.

이 '예수 쟁이'라는 말은 과히 좋은 말은 아닙니다.

이 말은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 왔을 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깔보고 조롱하면서 부른 말입니다.

원래 '쟁이'라는 말은 사람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천민들에게 붙이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쟁이'하면 옛날에 '상놈' '백정'하듯이 낮고 천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쟁이'라는 이름이 오늘날도 불려지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 의해서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를 부릅니다.


그런데 저는 저 스스로 '예수쟁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저는 '예수쟁이'라고 불러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습니다.

그러나 고민이 있습니다.

'내가 정말 예수쟁이인가?'  '이 이름이 나에게 합당한가?'

예수쟁이라면 내 몸에서 예수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예수 냄새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내 속에 예수가 철철 넘쳐야 합니다.


인천 시내에 가면 수봉산 남쪽의 용현동에 독쟁이가 있습니다.

왜 독쟁이 입니까?   독이 만들어 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쟁이'가 붙었다면 적어도 그 사람은 그것을 만들어 내거나 그것에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대쟁쟁이는 철로 삽, 칼, 도끼를 만듭니다.

소금쟁이는 소금을 등에 지고 다니며 팝니다.  그 사람에게 소금이 항상 있습니다.

뻥쟁이, 거짓말쟁이는 그 사람이 매일 뻥만 튀기고 다닙니다. 하는 말마다 거짓말입니다.

욕심쟁이, 심술쟁이, 말쟁이, 요술쟁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예수쟁이는 그 사람은 예수님을 만들고 예수님을 지고 다니고 입만 열 때마다 예수만 전하고 다닙니다.

좋아도 예수, 나빠도 예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예수쟁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님을 만들지 못하고 내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쟁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뭔가 좀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예수 믿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예수쟁이들의 병입니다.

예수를 믿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답지 않다'는 것이 바로 병입니다.


보통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실망하며 한탄하는 말 중의 하나가 이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뭐 저래" "집사가 왜 이 모양이야!"  "목사가 뭐 저럴 수 있어!"

내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되어야 하는 수준이 있고 그 수준을 알고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것만큼 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고민이며 병입니다.


그래서 이 병을 이렇게 해결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바로 "---인척" 하는 것으로 해결합니다.

나는 고민이 없는 척, 나는 기도를 많이 하는 척.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생활하는 척,  나는 경건한 척. 봉사를 많이 하는 척. 신앙이 좋은 척.

"--- 하는 척"

그래서 교회에 나올 때는 가장 그럴 듯한 얼굴을 하고 나옵니다.

"나는 일주일동안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았어!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나옵니다"

그리고 가능한한 엄숙을 떨면서 가장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자기 삶이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위안'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뒤에는 눈물이 배어 나올 만큼 안타까운 진심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만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기에 이렇게 '척'이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안 되기에 회개하는 척, 예배를 잘 드리는 척합니다"

"설교를 잘 듣고 이제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과 행동이 다를 때 이것만큼 큰 괴로움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속의 자기를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갈등을 이기지 못하여 고민하고 괴로워 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고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시고 그를 지켜 주시는 모습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믿어서 하나님으로 부터 '의로 여겼다'라는 칭호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람인 아브라함이,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팽개치고 자기 방법으로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납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하나님께서 13년동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침묵을 지킵니다.


창 16장 16절 (마지막절)"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86세이었더라"

17장 1절,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은 13년동안 아브람에게 침묵하십니다.

어떤 말씀도 어떤 약속을 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 생활을 곧 잘 해 나가다가도 그만 넘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들은 내가 잘못했으니까 하나님이 더 이상 나를 축복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나무라고 힐책하고 때로는 우울증에 빠지고 자포자기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나와는 한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고 내게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는 듯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해서 나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내 믿음을 정돈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줍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잘못하고 실패했다고 해서 "너는 이제  필요 없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죄를 범했다고 해서 "나는 이제 더 이상 너를 축복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실패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나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나를 다시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내가 넘어지고 실패한 것보다 오히려 더 많은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실패한 나에게, 죄를 범한 나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려고 하나님은 나를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람의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보세요,  아브라함은 드디어 99세입니다.

이제는 인간적인 희망이 다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자식을 낳을 능력이 없는 완전 절망 상태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말합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못하실 것이 없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불가능한 상황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자기 자신을 가르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이 누군인가?를 가르칩니다.

"내가 불가능하고 도저히 이제는 어떻게 할 수 없어서 포기하고 절망했을 때 하나님은 내 속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니 네가 이 사건을 통해서 내가 전능자라는 사실을 알기를 바랍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불가능한 일이 닥쳐 올 때는 하나님의 위대성을 배울 수 있는 기회 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극한 상황은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내가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시기 시작하십니다.

내가 절망했을 때, 내가 낙심할 때, 내가 소망이 없다고 포기할 때, 내가 이 때가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통을 통해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합니다. 말씀 한마디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비다.

그런데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일 때 모든 문제가 달라 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분이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목사님의 하나님만 되고 우리 어머니의 하나님만이 되고 나의 하나님은 되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17장 4,5절, "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마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어 아브라함의 이름을 바꾸어 줍니다.

본래 이름인 '아브람'의 뜻은 '높으신 아버지'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름 때문에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교만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아브라함'의 이름의 뜻을 '많은 민족의 아버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이 몇몇 사람들에게서 높은 사람이라고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에게 영향을 끼쳐 모든 민족의 신앙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모든 민족의 아버지, 열국의 아버지가 되리라"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아!  이제 네 삶은 너 혼자만의 삶이 아니다. 너는 이제 변해서 네가 전능하신 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네 삶이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삶이 될 것이라"

여기에 바로 우리들의 삶의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내시면서 그에게 약속한 말이 있습니다.

12장 2절,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네가 복을 받으리라"하지 않고 "복의 근원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받아 나 혼자 잘 살고 행복해 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내가 받은 복을 가지고 이웃에게 영향을 미쳐 그들로 복을 받게 하는데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이웃이 복을 받습니다.

내가 이웃에게 아름다운 영향을 미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이 우리의 이웃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이웃에게 복의 근원이 되어 복을 나누어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구원시켜 주신 것은 나만 구원받고 천국 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복의 근원이 되어 우리 가정, 우리 이웃, 우리 사회와 민족에게 예수님을 전해 주어 그들도 예수 믿고 천국가는 복을 나누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나의 삶은 우리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대통령만, 지도자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에 수산나라는 한 부인이 있었는데 교회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목사님께서 "당신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라고 말할 때마다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때마다 이 부인은 생각합니다.

"한낱 가정주부인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괴로울 때마다 그녀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별로 할 것이 없이 보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에게 맡기신 이 많은 자녀들을 성실하게 기르겠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심고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겠습니다. 이 아이들 중에서 이 세계를 흔드는 사람도 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내가 내 자녀들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거룩한 삶의 영향을 미치기를 원합니다"

이 부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감리교회를 창시한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입니다.

이 부인이 가르친 자녀들은 위대한 전도자들 뿐아니라 영국을 도덕적인 파탄에서부터 구출하여 영국 사회에 혁명을 가져오는 위대한 지도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할수 없는 보잘 것 없는 일개 가정주부가 그의 자녀를 통해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계를 뒤흔드는 요한 웨슬레 처럼 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수산나 부인을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삼천명을 회개시키는 베드로는 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 베드로를 주님 앞으로 인도한 한 사람의 안드레는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삶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에게 이름을 바꾸어 주면서 "너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어 너의 삶을 통해 나의 뜻을 이루겠다고"고 선포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시 17장 1절을 보라 

"아브람의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한 다음에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눈을 의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나님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떤가? 에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범죄합니까?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나를 보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감찰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내 모든 행동을 보십니다.

내 생각을, 내 마음 속의 동기를, 내가 무의미하게 내 밷는 말 한마디를 그 분이 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십니다.

나의 눈물을 보십니다.  나의 아픔을 보십니다.   나의 고통을 보십니다.  나의 괴로움을 보십니다.

유혹에 빠지려는 나를 보십니다.  범죄하려고 하는 나를 보십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는 사실을 위로와 축복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범죄하려고 계획을 세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는 사실은 못내 괴로운 사건일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보십니다.

우리의 신앙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열쇠는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나를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장사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일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가정 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보십니다.  그 분이 나를 아십니다.  내 삶을 감찰 합니다.

내 삶의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여기에서 "완전하라"는 말씀은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무결을 명령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일편단심으로 한가지 일을 위해 전력투구를 하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꾀로 살려고 하고 적당히 편법을 쓰고 살았는데 이제는 죄악과 타협하는 자세를 버리로 하나님만을 향한 오직 한가지 목표를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세상을 향해 눈을 팔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푯대를 향해 전진하기를 원합니다.

한편의  발은 하나님께 두고, 또 한편의 발은 세상에 두고 적당적당하게 세상과 어울려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 안에서 바로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순히 교회만을 왔다갔다하는 교인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쟁이로' 예수님을 지고 다니고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본다면 그야말로 나는 죽일 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값없이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죄를 용서하여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

이제 내가 구원 받았으면 나의 신앙 생활이 달라져야 합니다.

삶의 모습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다워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냄새나고 썩는 것이 아니라 나는 소금으로서 그들이 썩는 것을 방지해야만 합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라, 그리고 완전하라"


그리고 오늘 본문 가운데서 아브라함에게 또 요구한 것이 있습니다.

9,10절,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할례를 받으라고 요구합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할례는 남자의 몸의 살가죽의 한 부분을 떼어내어 이제는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표시입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구별하는 기준입니다.

따라서 할례를 받았다는 것, 할례의 표시가 있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너희들은 구별된 사람이야.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를 육체에 가지고 다님으로 그들은 끊임없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의 표를 받았어, 나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라고 사실을 일깨움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 할례는 신약에 와서는 세례이고 또 신학적인 표현을 빌리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듭나는 중생의 삶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할례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죄를 끊어 버리고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할례는 그 자체로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 의식 자체가 나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 것이지 단순히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할례나 세례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써 거듭나고 중생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교회에 나왔다는 사실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맡은 사실이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고 구원받았으면 삶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삶속에서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을 통해서 구별되어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를 타나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아, 그리스도께 속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면 그 그리스도인이라는 할례의 흔적이 나의 삶속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에게 축복을 내리시는 그 영광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런 나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내 앞에서 행하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표적을 지닌 삶을 살아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예수님을 믿는 예수쟁이 답게 살아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당에 와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 드리는 나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이웃의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싸우는 나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주일날의 나의 모습과 월요일의 나의 모습이 다르지는 않습니까?

교회에서는 거룩한데, 가정에서는 일터에서는 엉망이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나를 향해 말씀합니다.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리고 내 백성임을 나타내라"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래서 나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는 놀라운 축복이 우리 삶속에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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