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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죄의 심각성과 극복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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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죄의 심각성과 극복 방법

본문 : 마태복음 5장 27-32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제가 군에 입대해서 가장 놀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군에는 남자들만 모여 있다 보니 자연히 성에 대한 이야기, 여자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고참들은 신병만 들어오면 그에게 꼭 물어보는 것 중에 하나가 그의 여자 관계 입니다.

쫄병들을 바꾸 불러 놓고 그의 이성과의 성관계를 추궁하고 그 이야기를 재미 있게 듣습니다.

그러면 쫄병들은 하나도 망설임없이 신나서 이야기 하고 고참들은 그것이 재미있다고 눈이 빨개서 듣습니다.

어떤 때는 내부반에 들어가면 고참들은 빙둘러 앉아서 사회에서의 성경력을 자랑삼아 경쟁하듯 돌아가면서 이야기 합니다.

저도 물론 그 때는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습니다만 그 때마다 놀랍니다.

“아니, 재가 그럴 수가, 저렇게도 순진하고 선량한 애가 저럴수가!”

“그래서 남자는 다 도둑놈이고 늑대하고 하는구나!’

제가 소총중대 생활을 하다가 상병을 달고 연대 군종가로 전출을 갔습니다.

군종과에서는 장병들의 신앙 뿐만 아니라 생활 상담도 하기 때문에 2주에 한번씩 저의 연대로 전입해 오는 40-50명의 신병들의 생활 설문조사를 제가 맡아서 합니다. 

그 설문 난에는 신병들을 개개인에 대한 생활과 전제적인 문제점을 파악하는 질문들이 백여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 물음 가운데 이성 관계란이 있는데 입대하는 사람 가운데 양 80% 정도가 이미 성경험을 하고 입대한다는 것입니다.

이 수치는 제가 제대할 때까지 1년동안 조사하면서 거의 변함이 없었습니다.

가장 적을 때가 60%이고 많을 때는 95%까지 됩니다.

참 놀랐습니다.

이것을 보고 “저에게 여동생 하나 있다는 것이 그렇게도 불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군인들의 그런 모습이 더럽고 역겹고 추해 보였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런 모습을 보다보니 그것이 더럽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죄같이 여겨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속에 섞여 있다보니 나 자신이 점점 변해 그것에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럴수도 있겠지”  “남자라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그런 짓을 못하는 것 뿐이지 누구나 다 똑같은 것이 아니냐?’하면서 오히려 그들의 그 모습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현대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그 위기는 바로 죄의식에 대한 위기입니다.

죄가 극도로 팽배해 있지만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시대입니다.

버젓이 죄를 범하고 있지만 그것이 죄인 줄 알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살인을 하고도 당당한 태도를 취합니다.

더럽고 추한 음란죄를 번하고도 그것을 “엔죠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이 가장 범하기 쉬운 두가지 죄악을 말하고 있습니다.

“살인과 간음”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범죄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피하지 않으면 안 될, 범해서는 안 될 반드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두가지 계명으로서 예수님은 “살인과 간음”의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는 성개방의 시대”라는 말을 흔히 듣게 됩니다.

그 이전의 우리 사회에는 남녀칠세 부동석이란 엄격한 도덕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덕관은 이제는 점차 타락하여 현재의 성개방의 풍조에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매스 미디어의 발달로 신문, 잡지, T.V, 영화, 그리고 유행가를 타고 들려 오는 모든 소리는 성의 환락과 성의 쾌락을 우리에게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상당수 많은 대학생들이 보수적인 정조 관념을 가지 사람들을 구식이고 스스로 따돌릴만큼 사회는 점차 변해가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가치와 윤리는 다 거부하고 이제는 시대에 맞는 상황윤리라는 새로운 도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상황윤리와 새로운 도덕의 오염속에서 현대인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을 매혹시키고 있는 이 상황 윤리, 나의 행위가 옳은가? 그런가?는 그 때의 상황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이 상황 윤리는 절대적인 가치를 거부하므로 세계를 혼란 속으로 빠뜨립니다.

그들은 율법을 거부합니다. 성경의 도덕적인 기준을 무시합니다.

율법을 거부할 때, 하나님이 세우신 도적적인 이 절대 질서를 거부할 때, 우리는 허무주의와 도덕적인 퇴폐주의와 정치적인 혼란의 흑암속에 빠져 들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구원얻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성경은 강조합니다.

더 나아가 이 상황 윤리를 인간을 우상화하고 우리 하나님을 무능케 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특수한 상황 속에서 결국 우리는 죄를 범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또 그것을 죄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는가?

가령 서로 사랑한다면 사랑이 동기라면 아무리 관계를 가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얼마든지 죄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치 않게 만들면서 이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런 앏팍한 세속적이며 타락적인 도덕관념에 굴복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의 성문화와 성도적은 더욱 더 어두워지고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주님의 말씀은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시 다가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바라보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안중에 두시면서 이 말씀을 하십니까?

그 당시에 성적 어두움과 무질서와 무절제속에 빠져 들어가 있는 죄인들이 수많이 있는데 도덕적인 범죄와 타락에는 전혀 무관하고 오히려 그것을 혐오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이 말씀을 하십니까?​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간음하는 행동만 피한다면 나는 순결한 사람이다. 나는 의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도 무절제속에 빠져서 죄를 범하는 사람 못지 않게 제 7계명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나에게서 간음이라는 구체적인 행동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순결한 것이다. 나는 의인이다. 

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예수님은 더 무섭고 근원적인 그들 내부에 있는 간음의 범죄를 보신 것입니다.

죄는 행동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인과 동기 속에도 있다는 사실은 주님을 보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27절에서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에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체적으로 간음을 범하는 행동만 없으면 이 계명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진정한 의도를 약화시키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왜곡한 것이라고 예수님은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죄를 행동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행동 이전에 숨겨진 있는 동기와 원인까지 살피시며 하나님은 그것이 죄라고 정죄하신다는 사실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예수님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강조하신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이 계명을 통하여 죄의 교활성과 심각성을 깨우치기 위해서 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만약 우리가 이 계명을 범했을 때 어느 정도의 형벌을 요구하는 죄입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29절부터 보세요.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약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한마디로 이것은 지옥에 가야 할 죄입니다.

간음은 가정을 파괴하고 간음은 사회를 파괴하고 간음는 나 개인의 건강을 파괴하고 이 간음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지옥으로 몰고 가는 죄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죄 문제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간음 범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 범죄였습니다.

인간의 죄문제가 아니었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겠습니까?

오직 나의 죄가 그 원인이었습니다.

죄는 하늘에까지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인간이 죄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만 한 것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할만큼 죄문제는 심각한 것입니다.

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들이 노력하는 복음 증거나 거룩한 생활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복음을 증거하며 무엇 때문에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까?

우리 속에 있는 근본적인 죄 문제 때문에 복된 소식이 전파되어야 하고 또 거룩한 생활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그의 친구의 고백을 기록한 것을 한 목사님의 책에서 읽어 보았습니다.

한목사님이 어떤 대학에 교섭하여 입학허가증과 재정보증서, 그외에 서류를 보내 주어 그 분이 그 대학에 공부하러 미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배에서 부두까지 계단을 내려 오다가 그만 발을 헛디어 발꿈치를 좀 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곡 이민국이 있는 천사도라는 작은 섬에 가서 조사를 받는데 다른 것은 별일이 없었으나 발꿈치가 아파 저는 것을 보고 그 의사를 며칠 치료하여 좀 나은 후에 상륙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병원에서 유하는데 이상하는 것은 발목의 부기가 점점 더하여 졌습니다.

그렇게 되니 의사의 말이 “이제는 당신의 혈액을 좀 검사할 수 밖에 없소”하고 혈액검사를 한 결과 불행하게도 화루 병균이 나와 결국 상륙을 거절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과거 생활을 회상하며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대학에 있을 때에 한 여름 방학 때 친구 몇 사람들과 같이 중국 북경에 가서 구경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친구들의 유혹을 받아 학생으로서 안 길 곳을 하루 저녁 갔다가 결국 성병을 얻었습니다.

그 후 그는 비밀히 치료하여 완쾌 되었는 줄 알았는데 그 병균이 그의 혈액속에 잠자고 있다가 발의 상처를 따라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죄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죄라는 것은 한번 지으면 언젠가는 그 값을 찾아내고야 맙니다.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서 이 계명을 범한 죄인들의 죄의 심각성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영혼 순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은 이 계명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영혼이 성결하게 되는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간음치 말라’는 계명을 외적으로만 취하고 있었으나, 주님은 더 깊은 곳에 있는 마음에서부터 이 ‘간음치 말라’는 계명을 취급하십니다.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주님은 우리의 마음과 사고의 순결성을 이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29절에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가장 중요한 지체인 눈, 손을 희생시킬 만큼 단호히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지체를 희생해서라도 영혼의 순결은 보존되어야 할 값어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안목 앞에서 내 동기는 순결한가, 내 생각은 순수한가, 내 마음은 깨끗하고 올바른가. 

이것을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계명에 순종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간음하지 않으면서 죄를 극복하며 살 수 있습니까?​


첫째로, 죄의 심각성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죄가 지옥을 요구하는 범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의당히 있을 수 있는 범죄라고 간단히 생각하고 넘어 가서는 안 됩니다.

지옥에 가야 할 죄입니다.

우리를 지옥에 보내는 심각한 죄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내 마음속에 음욕을 품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마음 속에 음욕을 품지 않는 사람이 인간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찾아 보시요?’​


오늘 예수님은 본문에서 “음욕을 품는 자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을 좀 더 풀이하면 이것은 이성에 대해 불의한 방법으로 그를 소유하고자 하는 계속적인 욕망이고 구체적인 계획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성으로 창조함을 받았기에, 남자나 여자를 향하여 갖는 자연스러운 호기심이나 성적인 충동 그 자체를 예수님이 여기서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의 아내나 남편 외에 다른 대상, 다른 성을 향하여 불의한 방법으로 그를 취하려는 계속적인 욕망을 벗어나지 못할 때, 그리고 고의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때 이것은 죄라고, 지옥에 가야 할 바로 그 죄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중생한 사람이 이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성을 보면서 마음 속에 호기심을 갖을 수가 있습니다.

좋아하고 싶은 유혹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것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 여자에 대하여 음욕을 품기 위해서, 그 여자를 완전히 소유하기 위해서, 그 여자를 자기의 쾌락의 도구로 삼기 위해서 그 여자를 쳐다보고 있고 응시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 마음 속에 부당한 행동을 생각하며, 상대방을 불합당한 방법으로 소유하기 위한 구체적인 욕망과 그리고 고의적이고 지능적인 계획을 세워졌을 때 예수님은 그것은 이미 간음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죄 하나 하나 때문에 쓰리고 아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세상 모든 죄를 묶어 버린 그 십자가, 그 십자가에 나의 죄도 묶여 버리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그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은 적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고자 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고난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지만,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함께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그 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지 아십니까?

죄에는 쾌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하는 것은 신나는 일입니다.

죄를 범하는 것은 아름다운 환락과 쾌락을 맛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당장 맛볼 수 있는 쾌락, 오늘 당장 즐길 수 있는 삶의 쾌감, 그것이 그들이 삶의 가치관의 전부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잠깐의 즐거움을 누릴려고 죄를 범합니다.

성경도 그 사실을 시인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져다 주는 쾌락은 잠시 잠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잠시 죄악의 낙”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후에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줍니까?

그것이 우리 가정에 나의 인간관계에, 나의 정신 건강에, 나의 삶속에 어떤 결과를 가져 올까요?

아니 그보다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 올까요?

끔찍합니다. 그 때는 너무 부끄러워 감히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만 합니다.​


둘째로, 이 말씀에 우리가 순종하기 위해서는 이 음욕의 죄를 피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이 음욕의 문제를 말할 때마다 꼭 한가지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하라”는 것입니다.

“파하라”는 말이 성경 도처에서 계속적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대결해서 싸워야 할 죄가 아닙니다.

피해야 합니다.

피함으로서만 극복할 수 있는 죄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나는 이런 상황을 피하지 않고 버티겠다”  이것은 오만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부패성을 모르는 인간의 본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모르는 사람들의 교만한 진술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신앙의 아들인 젊은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

이 악한 세상에서 성문제에 자신있게 도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도, 믿음 좋은 성군 다윗도 한순간에 정욕 앞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성결한 사람인 요셉도 수없이 유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든지 아무도 자신 할 수 없는 약한 인간입니다.

정욕을 이기는 방법은 요셉처럼 도망을 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죄를 효과적으로 승리하고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옛날이 신앙의 위인들은 이 정욕의 문제를 다룰 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정욕은 불이다. 기름은 붓지 말라”

이 불을 태울 수 있도록 기름을 부어서는 안됩니다.

이 기름은 TV 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일 수도 있습니다. 비디오 일수도 있습니다.

이 기름은 우리의 손에 쥐어 있는 잡지나 소설책 일수도 있습니다.

내가 자주 찾는 잘못된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이 기름을 붓기 시작하면 그 불은 끌 수가 없습니다.

잠언 기자는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정욕의 기회를 피해야 합니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 주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에게 이용당하는 기회를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셋째로, 말씀대로 살겠다는 강한 의지의 신앙 생활이 필요합니다.

29절의 말씀을 보세요.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 버려라”

30절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이것을 문자 그대로 “눈과 손을 잘라 내버리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대학자 오리겐은 과격한 금욕주의를 주장한 나머지 모든 소유를 버리고 마태복음 19장 12절에 근거하여 자신을 고자로 만들기까지 하였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문자 그대로 이것을 실험해 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오른 눈을 빼어 버렸더니 왼눈이 똑같은 작용을 시작하고, 오른 손을 잘라 버렸더니 왼손도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 그들의 고백입니다.​


이것은 각 개인이 결단을 내리고 각오하고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이 죄를 피해야겠다는 결심의 중요성을 예수님은 강조하고 계십니다. ​


우리나라 역사에 보면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은 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삼국을 통일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젊었을 때 늘상 다니던 기생집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꾸지람을 듣고 한가지로 결심합니다.

하루는 말을 타고 집에 오는데 그의 말이 그가 조는 사이에 기생집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는 말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렇듯 죄를 다스릴 때는 내 사지를 자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저도 몇 번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저의 마음속에 끊임없는 욕망과 죄악들이 물밀듯이 밀려와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죄악들을 끊어 버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굳게 결심하고 혈서를 두번이나 썼습니다.

한번은 이빨로 손가락을 물어뜯어 피를 가지고 죄라고 혈서를 쓰고 한번은 칼로 검지 손가락을 베어 뚝뚝 흘리는 피를 가지고 백지에다 중생이라고 크게 쓴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쓰니 얼마동안은 정말 깨끗하게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 마음 속에 몰려 오는 죄악을 끊어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죄를 끊고자 하는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2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영적인 결단이 없이는 우리는 이 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내 지체를 찍어서라도 이 죄를 극복하겠다”는 굳은 각오가 필요합니다.

이런 각오와 결심이 있을 때 우리 주님은 우리를 인정해 주시고 성령님은 나를 찾아와 주셔서 죄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1857년에 영국 런던의 하이드 팍 공원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그 유명한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처음으로 수여 했습니다.

여왕에게 그 훈장을 받기 위해서 한 사람씩 올라오는 중에 싸움터에서 용감하게 큰 공로를 세우고 팔과 다리를 잃은 한 군인이 여왕 앞에 올라와 섰습니다.

지팡이를 의지하고 간신히 서 있는 영국의 용사를 바라보던 여왕은 훈장을 떨어 뜨린 채로 뒤로 돌아서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여왕은 수천의 군인을 등 뒤로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에 진정한 여왕은 돌아서서 훈장을 집어 들고 용사의 가슴에 꽂아 주며 사례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군인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의 여왕을 축복하소서!  여왕폐하와 조국을 위해서라면 한번 더라도 이 몸 바쳐 싸우겠습니다.”

팔 다리를 하나씩 잃어 버린 용사의 심금을 감동시킨 것은 가슴에 단 훈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나라 위해 희생한 충성을 뜨겁게 인정해 준 여왕의 그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여왕도 나라와 자기를 위해 충성한 사람들을 인정해 주는데 하물며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죄악과 정욕으로 살로 있는 동안에도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거룩한 믿음을 지켜 열심히 충성했다면 그 분이 왜 이 모든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그 모든 사실을 아십니다.

나를 위해 몸을 바친 그 예수님은 우리가 그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 주십니다.

내가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의지. 이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의지,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부족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령님이 나와 함께 계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함께 계실 때 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구원 받았을 때, 내 속에 찾아 오신 성령님, 그 성령님이 나를 다스려 주시고 성령님이 나를 충만케 하시고 성령님이 부어 주시는 거룩한 능력의 사역으로 이 죄를 극복될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내 영혼을 채우고 성령이 나를 다스려 주실 때, 비로소 나는 이 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성령을 쫓아 살고 있습니까?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까?

성령님이 내 영혼을 충만히 지배하십니까?

성령의 능력이, 성령의 감동이, 성령의 거룩한 열망이 내 마음을 채우고 있습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비로소 우리는 살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알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당할 수치, 내가 당할 핍박, 내가 당할 십자가의 고통, 내가 당할 사망의 고통을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사망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여 주신 것입니다.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육체의 소욕을 죽이는 일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에게 날마다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이 지켜 주실 때만이 자신을 지켜 나갈 수 있고 정결한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미 이 계명을 파괴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마세요,

율법이 주어진 목적 중의 하나는 죄를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죄를 인정하세요, 그리고 이제 십자가 앞으로 나아 오세요,

주님의 용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약속합니다.

“만일 너희가 너의 죄를 고백하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너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고 우리 안에 거룩한 성령이 거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주장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아무리 추한 죄인이라도 주님 앞에 나오면 깨끗이 용서함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도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 질 수 있습니다.

이런 축복이 나의 삶 가운데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죄 용서함 받고 추악한 죄들을 성령님을 통해 극복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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