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네 원수를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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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네 원수를 사랑하라
본문 : 마태복음 5장 38-48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네 원수를 사랑하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기독교를 흔히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데 그들은 이 말씀을 인용해서 그렇게 말합니다.
정말 이 말씀은 “기독교 윤리의 극치’이고 ‘기독교 윤리의 집약된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기독교 생활의 최고의 절정’을 소개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며 예수님의 대표적인 교훈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 소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참으로 묵상하지 못하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데에 실패하는 일이 많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오늘 본문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우리의 모습들이 두가지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이 말씀은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님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기 일평생의 삶을 투자하고 자기 목숨까지도 바치는데 원수를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니! 그런 일을 저는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 중에 누가 감히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주님은 절대로 실천 불가능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이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그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인 그 원수를 용서해 주고 자기의 아들로 삼았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대할 때 또 다른 하나의 모습은 이 말씀을 주먹구구 식으로 막 이용합니다.
우리는 가끔 이웃의 물건을 빼앗고도 그것을 정당시 합니다.
“야, 예수님께서는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했는데 내가 이것 좀 가졌다고 그렇게도 뜰 보냐?”고 합니다.
친구를 한대 때리고 친구가 대어 들면 “애야! 예수님께서는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까지 돌려 대라고 했어!”하면서 점잖게 타이릅니다.
저의 친구 가운데 그런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는 유치부 때부터 저와 같이 지낸 친구인데 이 친구는 직장에서 자기가 숙직을 할때마다 꼭 저를 부릅니다.
그 때 제가 갈 수 없다고 말하면 이 친구는 꼭 이렇게 말합니다.
“야! 예수님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고 했는데 너는 친구가 심심해서 좀 와서 같이 있자는데 전도사라는 녀석이 친구의 그런 사정도 안 들어 줄거냐?”고 막 야단칩니다.
그러면 저는 마음이 약해서 전화를 받자마자 그 친구의 직장으로 갑니다.
이렇게 5년동안 수십번을 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 말씀을 잘못 인용하고 있고 그들의 삶에 잘못 적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43절을 보세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성경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네 원수를 미워하라” 이것은 성경이 아닙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에서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을 발견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무리 찾아 보아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결국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구약 성경을 해석하면서 첨부한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잘못 접근했던 가장 중요한 실수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그들이 편리한대로 뜯어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해석하면서 “이웃은 누구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러면 이방인은 누구인가? 그들은 우리의 적이고 원수이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원수라고 생각하면서 ‘이웃을 사랑해야 하지만, 원수를 미원해야 된다”라는 왜곡된 해석을 가져 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다시 시정하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까지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특별히 마음 속에 두어야 할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45절을 보면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말합니다.
즉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닝의 자녀다운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이 삶이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이 놀라운 삶의 실천을 위한 몇가지 대단히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옳고 그름의 원리”보다 더 위대한 “은총의 원리”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옳고 그름의 원리보다 은총의 원리에 의해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니”로 시작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것” 그 자체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는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살아서는 안되고 이제는 보다 더 위대한 은총의 원리에 의해서 인생을 살아야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의 나쁜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모릅니다.
그들은 자기의 유익과 행복을 위한 일이라면 나쁜 일도 서슴치 않고 합니다.
그러나 선하고 착한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분명히 따져 틀린 일들은 안하고 올바르고 정당한 일만을 합니다.
정의를 위한 일이라면 끝까지 싸워 꼭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올바르고 정당한 일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간혹 그것이 올바르고 정당한 일이라고 반드시 그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명한 중국의 ‘워치만 니’의 간증 가운데 이러한 대목이 있습니다.
중국에 가뭄이 들었을 때입니다.
이 때 예수 믿는 한 성도가 있었는데 다른 곳은 물이 없어서 쩔쩔매는데 이 성도의 논에는 물이 풍성하게 고여 있습니다.
그런데 한 밤이 지나고 나면 이상하게 자기 논에 고여 있었던 물이 다 빠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성도의 논과 가까이 붙어 있는 이웃집의 논에서 밤새도록 그 성도의 논에 고여 있었던 물을 다 배 가버린 것입니다.
그 물은 본래 자기 논에 고여 있었던 물이어서 당연히 그 물이 내 논의 뭉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당당한 권리가 그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그 성도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 이웃에게 가서 따집니다.
“왜 나의 논에 고여 있는 물을 당신이 다 빼내어 가는 것입니까?”
그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해서 이겼습니다.
그래서 물을 다시 빼 왔습니다.
그런데 이튿날에는 또 다시 물이 빠져 나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그러면 또 다시 가서 빼오고 이런 일을 몇 번 거듭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물을 빼와도 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도무지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님, 제가 정당한 일을 하는데 왜 저의 마음 속에 평안이 없습니까?”
주님의 음성이 들려 옵니다.
“너는 정당한 일만 하려고 하느냐? 정당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없겠느냐?”
다시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제가 정당한 일보다 그 이상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그에게 “내가 너에게 베풀어 준 것처럼 그 사람에게 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마침내 그의 마음속에 깨달아 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날 밤 위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튿날 새벽녘이 되어서 이웃집 사람이 자기 논에 물을 빼내어가기 전에, 자기 논의 물을 빼어 이웃의 논에 물을 대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마음 속에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다시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보다 더 위대한 원리에 의해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은총의 원리입니다.
이 은총의 원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은총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은혜”라는 것은 받들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지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옳고 그른 것을 따져서 나를 대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중에 아무도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소망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나를 조건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 주셨습니다.
불순종의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죄에서 구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죽어야 되는 나를 살리신 그것도 자기의 독생자를 죽시시면서까지도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이제는 행위의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총의 원리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느 교회에서 제직회 할 때 일입니다.
어떤 한 안건을 처리하는데 제직 사이에 여러가지 말이 많아 왈가불가 했습니다.
이 때 갑자기 청년 하나가 손을 들더니 큰 소리고 “법대로 합시다”라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합니다.’이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이 아주 놀라운 애기를 했습니다.
“여보게, 젊은 집사, 법대로 하기를 원하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법대로 자네를 다루었다면 자네는 어쩧게 될 것인가?
자네는 벌써 지옥에 가 있어야 마땅할 것일세”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법대로 처리했다면 우리는 벌써 지옥에 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법대로 우리를 처리하지 않고 은총으로 우리를 대하셨습니다.
우리는 법보다 더 위대한 원리에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은총의 원리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다루신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대하겠다”
“주께서 나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겠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은총의 원리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옳고 그름의 원리보다 은총의 원리에 의해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째 본문 말씀은 우리가 ‘인간 본능의 원리’를 따라 행하지 말고 자기를 죽이는 “죽음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본능의 원리가 아닌 죽음의 원리에 의해서 살 줄 아는 사람만이 순종할 수 있는 명령이 바로 오늘 말씀의 명령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인간 복수의 본능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 할 수 가 없습니까? 소유 본능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합니다.
붙들고 싶어 합니다.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41절 말씀을 보세요.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이 말씀대로 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의 정상적인 고백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편리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살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죄로 인해 부패한 인간 본능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본능의 원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이 결코 순종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본능의 원리가 아닌 죽음의 원리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이것은 쉬운 것입니다.
누가 나를 한 대 칠 때, 같이 한대 치고 싶은 것.
이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또 하기가 쉬운 결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또 내 재산을 지키는 것은 누구든지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편리하게 살고 싶어하는 것, 그래서 내가 움직이고 싶어하지 아니하는 것, 그것은 나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이 본능의 원리를 극복하기 위한 대답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죽을 때입니다.
월치만 니도 “자아가 죽을 때”라는 책에서 내가 죽을 때가 곧 사는 때이고 내가 죽을 때만이 내 속에서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사람은 그 속에 그리스도가 살 수 없습니다.
나로 꽉 차서 그리스도가 들어 갈 틈이 없습니다.
유명한 영국의 설교자 로이드 존스는 오늘 이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가장 중요한 원리는 “죽음의 원리”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에 대하여 죽은 사람, 자기의 본능에 대해서 죽은 사람, 이러한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는 원리가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죽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삶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가르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앞에 나와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 들여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구속함을 얻었다면 이제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고 말합니다.
나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둘 수 있는 사람만이 순종할 수 있는 삶의 원리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 자기의 본능과 자기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충동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못 박아 죽어 버린 사람만이 복종할 수 있는 원리입니다.
유명한 기도의 성자인 죠지 뮬러는 주님을 만나고 난 후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나는 이제 죽었다. 이제 나는 다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만 살고자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국의 초대 교회에 응력의 종 김익두 목사님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는 깡패였다가 예수 믿고 회개한 다음에 자기가 죽었다는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
깡패 김익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얼마나 망할 짓을 많이 했으면 그의 부고장을 받고 그렇게도 좋아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죽었다는 이 사람이 시장에 나타났습니다.
시커먼 책 하나를 가지고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수근거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김익두 목사님을 시험하려고 지나가는 목사님에게 물통으로 물을 뒤집어 씌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물을 툭툭 털고 쳐다보면서 하는 말씀이 “너는 옛날 김익두가 죽었다는 그사실을 인해서 기뻐하라 살았다면 너는 요절이 났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너의 옛 몸이 죽은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미국 교계에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고 있는 Tom Skinner라는 부흥사가 있습니다.
그는 뉴욕 할렘가의 불량 청소년 갱단 두목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홀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영혼과 삶이 뒤바뀌었으나 그가 변화 되었다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옛날의 동료 하나가 탐 스키어를 시험했습니다.
지나가는 탐 스키너를 갑자기 한대 후려 갈겼습니다.
땀 스키너는 쓰러졌다가 일어 나면서 그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여,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나는 너를 용서하노라”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죽음의 자기에 둔 사람만이 살아 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본능은 “복수하라”고 말합니다.
본능은 나에게 보복의 원리를 가르칩니다.
본능은 여전히 나에게 소유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본능은 편리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죄에 대해 자신이 죽은 사람만이 겸손하게 순종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본능의 원리에 의해서가 아닌 죽음의 원리에 의해서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본문은 인간의 원리가 아닌 하나님의 원리에 의해서 살아 갈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원리는 복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리는 사랑입니다.
44절을 보세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인간으로서 좀처럼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원수를 위해 자기 아들의 목숨까지 내어 준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들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나를 괴롭히는 사람, 나에게 가시 같은 사람, 내가 무척이나 미워하는 사람에 대하여 최소한 침묵은 지킬 수 있지만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한가지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원수인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면서도 죄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상황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내가 어떤 문제를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내 기도를 응답하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내가 나의 천한 환경속에서 어떤 어려움을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 기도할 때 우리가 누리는 최대의 축복은 기도하는 내가 변화된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미움은 해결하는 가장 실제적인 능력은 기도에 있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한 대 때려줘도 그 미움이 안 사라집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홀딱 망해라” “아 참 고소하다”라고 외쳐도 그 미움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 기도하면 그 미움이 사라집니다.
미움 대신에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에게 관심이 생기고 더 나아가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참으로 기도하고 있을 때 그 기도는 놀라운 변화를 내 속에 일으킵니다.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대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는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성경을 말합니다.
다루기 힘든 사람, 나에게 많은 상처를 입힌 사람, 나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사람, 나에게 침을 밷는 사람. 그들을 위해서 지금부터 기도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가 악인이나 선인에게 모두 은혜를 베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5절,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입장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요.
제가 하나님이라도 해를 비출 때 예수 믿는 사람들 집에만 햇빛이 들어가게 하고 안 믿는 사람들에게 해를 비추지 않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행동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대로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우리의 행동은 다분히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가 나를 이렇게 대했으니까 상대방이 나에게 이렇게 대접했으니 나도 그렇게 대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의 행동 원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행동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을 따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한 것과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주가 원하시는 올바른 것을 행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이런 삶의 원리를 붙잡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놀라운 사랑을 십자가에서 확증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 나타난 가장 위대한 장소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계시된 놀라운 장소였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그 사랑을 나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6.25 직후의 일입니다.
한국 나병 환자 수용소에 미국 로타리클럽 회원들이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미국에서 온 간호사 선교사 한 사람이 나병 환자의 고름이 흐르고 있는 상처를 간호하고 있는 뜨거운 인간애의 장면을 로타리 클럽 회원들이 보았습니다.
그 회원 중에 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사진을 찍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백만불 짜리 가치가 있는 사진이다. 그러나 나는 누가 나에게 백만불을 주어도 이 일을 못할 것이다”
간호원 자매는 이 사업가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도 그 일을 못합니다”
이 대답을 들은 사업가는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소”라고 물었더니 자매가 대답하기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를 강건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사랑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향해 보여주신 조건없는 그 놀라운 사랑, 이 사랑을 깨달은 사람만이 원수도,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세리도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46절에 말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나와 가까운 관계가 있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이방인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9절에 말합니다.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 없는 사랑, 성령 없는 사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세상이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마귀가 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대단히 능력있는 존재입니다.
마귀는 기적을 행합니다. 마귀는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마귀는 귀신을 쫓아 낼 수가 있습니다. 귀신은 사단의 쫄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결코 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귀가 모방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탄은 결코 사랑하지 못합니다.
십자가! 여기에서만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최대의 능력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병 고치고 귀신 쫓아 내는 것만이 능력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새롭게 변화되는 능력 만큼 큰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향해서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소리쳤습니까?
“네가 메시야거든 거기서 내려 오라!”
아마 우리 한국 교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 오셨다면 그 예수님께 더 많은 박수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가 당당히 십자가에서 내려 오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그 예수님 앞에 박수와 환성을 질렀겠습니까?
그러나 십자가에 나타난 위대한 능력은 그런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용서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사랑의 능력만큼 위대한 능력은 없습니다.
어떻게 살인마 고재봉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누가 도끼로 17명을 찍어 죽인 살인마 김대두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어떤 무력으로도 어떤 권력도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들어 갔을 때 그들의 마음은 변화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새 생명을 찾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며 살인마인 자기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미하다가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도 헛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봉사도 헛 것입니다. 전도도 헛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봉사, 사랑이 있는 섬김,
그것만이 주님 앞에 영원히 인정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하시렵니까?
신비주의자인 스웨덴 부르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 보았더니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와 있지 않고 사랑을 베푼 자들만 와 있었다”
너무 지나친 말이지만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할 때 이 사랑이 나의 인격을 완성시켜 갑니다.
사랑할 때 나는 살아 계신 그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도 사랑안에서 변화되어가는 나의 놀라운 인격을 바라 보시면 기뻐하십니다.
미움과 복수는 일시적으로는 내 마음 속에 시원함을 알겨다 줄 수 있습니다.
잠깐동안 나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나를 파괴합니다.
내 인격을 파괴합니다.
나를 둘러 싼 인간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나를 고립시킵니다. 이것은 내 삶속의 모든 축복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나 사랑은 궁극적으로 나를 유익하게 만듭니다.
이 축복, 이 아름다움 이 열매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이 크신 사랑, 우리가 알았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의미, 삶의 의미를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매일 매일을 살아갈 것입니까?
“원수를 사랑하라”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나에게 손해 끼치는 얄미운 사람, 나의 마음을 바늘로 꼭꼭 찌르는 죽이고 싶은 사람까지도 사랑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