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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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본문 : 마태복음 6장 9-13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다음에 여섯개의 간구가 나옵니다.
그 중에 세개는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한 간구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개는 사람의 필요와 요구를 위한 간구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특히 마지막 부분은 우리의 보호를 위한 간구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 다음에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죄사함 받은 다음의 순간이 성도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생활속에서 죄를 범합니다.
한번 내가 저질러진 잘못은 한번 내가 범한 죄는 우리 힘으로 돌이킬 수도 고칠 수도 없습니다.
이미 시작되어서 끝나버린 그 일을 다시 뒤집어 엎을 수가 없습니다.
단지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용서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일 외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한 용서를 간구합니다.
이 때 주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줍니다.
우리의 죄를 자백함으로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확신할때 우리 속에는 죄사함의 감격과 기쁨이 넘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의 기도가 끝난다면 사탄은 곧 우리를 다시 자기의 세력안으로 묶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시험은 우리의 삶속에 시시각각으로 찾아옴으로 죄사함 받은 후에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가 없다면 우리는 곧장 전날에 범했던 죄속으로 떨어져 고민하고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자에게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신 후에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치 병때문에 고생하다가 그 병이 나은 사람이 다시는 병들지 않게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처럼 죄사함 받은 사람은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만약 내가 두번 다시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더 큰 불행과 후회를 가져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무릇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따라서 죄사함 받은 성도들은 끊임없이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이 시험과 대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다시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우리의 영혼과 삶을 깨끗하게 보존하기 원하여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도록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용서함 받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순간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케 했습니다.
우리는 더이상 죄가 있다고 정죄함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멸망받거나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죄가 용서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의롭다 인정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 속에서 죄가 남아 꿈틀거립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죄의 도전의 받고 있으며 죄와의 싸움이 끝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용서함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더이상 죄의 굴레에 얽매여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죄의 속박에서 풀려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부분은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부분을 각각 나누어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앞부분은 소극적인 면에서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할 것은 강조하고 있고 뒷부분은 적극적으로 우리가 악에서 승리하기를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성격상 한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 ‘시험’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두가지 방면으로 이 시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 시험은 우리를 테스트하고 혹은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이 시험의 목적은 우리를 파괴시키고 몰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숙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그 실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나 확인하기 위해서 시험 보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이 시험을 잘 극복하면 놀라운 유익과 축복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험을 기뻐해야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당한 것이 없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충분히 해결하고 감당하고 이길 시험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초등학생에게 중학교의 영어시험 문제를 내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초등학생은 초등학생에게 맞는 시험 문제를 내줍니다.
우리의 모습에서 이런 모습을 찾아 봅시다.
우리가 처음 예수 믿고 전도할때 전도에 실패될 때가 많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기뻐서 전도하는데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할 줄 몰라 잘 안됩니다.
그러나 그대신 처음 믿을때 모든 일들이 다 잘 됩니다.
기도하면 신기하게도 기도의 응답이 쉽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신앙이 성장하고 오래가면 갈수록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우리들에게 기다리게도 하고 또 어려움을 주시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가 쉽게 응답이 안됩니다.
이때 우리는 실망하고 기도를 안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내 기도에는 응답해 주지 않을까?”
“내가 뭘 잘못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은 나같은 놈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장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어떤때 충분한 고퉁을 주시기도 합니다.
기도의 성자 죠지 뮬러,
일생을 통해 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죠지 뮬러가 기도하기만 하면 무엇이나 즉시 즉시 응답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죠지 뮬러도 어떤 때는 한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10년 이상이나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기도는 죠지 뮬러가 죽은 후에 응답 받은 기도도 있습니다.
그래서 죠지 뮬러는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쉽게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으로 감사한다.
왜냐하면 쉽게 응답해 주셨다면 나는 응답으로 만족했겠지만 하나님께서 쉽게 응답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 했다. 또 매달렸다.
그래서 응답보다 더 깊은 만족을 누린다.
그것은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존전에 서 있는 감격을 나는 날마다 누린다”
이것이 죠지 뮬러를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릴때 어린 심령을 향해서는 쉽게 응답해 주시지만 성장한 사람에게는 기도하게 하십니다.
매달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도록 하십니다.
따라서 이런 시험을 겪으며 한가지씩 시험을 통과할때마다 우리의 인격은 보다 견고해지며 보다 빛나고 보다 영광스럽게 성숙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주십니다.
두번째 시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험은 사탄으로부터 옵니다.
이것은 우리의 성숙을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파괴시키려고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유혹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설교가는 이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실때 하늘로 끌어 올리기 위해서 시험하지만 사탄은 우리를 내려가게 하기 위해 시험한다” 고 했습니다.
오늘 주기도문 내용 가운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의 기도의 가르침을 바로 사탄으로부터 오는 파괴적인 시험에서의 해방과 보호를 의미합니다.
이 시험이 나에게 엄습해 옴으로 말미암아 나의 영혼이 타락하고 파괴당하고 깊은 어두움 속에서 빠져들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길 바라는 보호의 기도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시험합니다. 어떤 때는 삼킬 자를 두루 찾는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시험할 때도 있고 때로는 광명한 천사처럼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할 수도 있습니다.
사탄이 밀 까부르듯 어떤 때는 광명한 천사로 어떤 때는 우는 사자처럼 정신없이 우리 삶을 시험하고 넘어 뜨려 조종하려고 듭니다.
그래서 고전 7:5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도 우리가 이 시험을 극복하기 위해서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오히려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시험이 어떻게 우리에게 찾아 옵니까?
사탄은 우리의 어느 부분을 공격하여 우리를 시험에 빠뜨립니까?
첫째로, 이 시험은 우리가 가장 보잘것 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기본적인 작은 것으로부터 옵니다.
기본적인 하찮은 것으로부터 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예배를 자주 드리고 기도 모임을 자주 갖다 보니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행하는 하나의 형식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사탄은 내가 예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만들므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어떤 분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탄이 지금까지 많은 공작을 한 것 가운데 최대로 성공한 것 중에 하나가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영광된 교제를 나누는 것을 끊어버립니다.
그것이 ‘하찮은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오늘만 날이냐? 다음 주에 가면 된다’ 라고 생각하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
때로는 교회에 갈려는데 손님이 찾아 옵니다.
혹은 피치못할 일이 생겨 그곳에 가야 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가장 첫째 올무이고 가장 성공하는 올무입니다.
아주 하찮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찮은 것을 통해 하나님과 영광스러운 교제를 끊어 버립니다.
우리의 모든 중심을 바쳐서 하나님의 존전에 나와 내 삶을 비추어 보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며 하나님과 교통을 누리는 이 예배시간에 우리를 불참케 함으로 사탄은 많이 성공합니다.
제가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유년 주일학교 교샤를 하면서 애먹은 것이 있습니다.
주일날 아침만 되면 애들을 데려 올려고 애들집에 가서 전쟁을 벌입니다.
꼭 주일날 아침 9시만 되면 TV에서 만화영화를 해줍니다.
‘태권V’ ‘짱가’ ‘마루치아라치’ ‘집없는 소녀’ 저는 지금도 만화를 무척 좋아하고 만화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애들 심정을 압니다.
애들이 그 만화영화를 보려고 교회에 도저히 안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정부에서 기독교가 성장하고 또 반정부 운동을 하니까 기독교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 방법의 하나로 먼저 어린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을 막으려고 방송국에 주일날 아침 9시에 어린이들이 제일 재미있어 하는 만화영화로 방송을 내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성공했습니다.
볼테르라는 학자는 왕에게 기독교 막살 정책을 건의할때 기독교를 없애 버리려면 성경을 태우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그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주일을 폐지해 버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충언한 일이 있습니다.
성경은 불에 태우면 재 속에서 다시 생기고 무덤에 갖다 묻으면 되살아나니 사람의 힘으로는 성경을 이 세상에서 쓸어 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목을 베어 버리면 베는대로 신자가 더 늘어나서 기독교를 말살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성도들이 공적으로 모이는 주일을 아예 폐지해 버리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성도가 모이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그리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 성도들이 어떤 핍박하에서도 모이는 것은 끝까지 양보하지 않고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교회예배가 기독교의 생존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련이나 중공이나 저 동구 유렵의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적은 신자들이 비밀리에 집에서 주기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두세 사람이 혹시 들킬까봐 망을 봅니다.
숲속이나 산속 깊은 곳에 들어가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들이 이렇게 목숨을 내놓고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예배 드리는 것을 등한히 한다든지 포기해 버리면 그때에는 교회 자체의 생명이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배 모이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생명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이 영적 교제를 무시하는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을 무슨 구실로도 정당화 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가지 종류의 은혜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는 혼자서 받는 은혜이고 다른 하나는 여럿이 함께 받는 은혜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이 약속하는 은혜는 혼자 골방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체험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물론 골방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때 주시는 기도의 응답도 있지만 두세 사람이 땅에서 합심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구할때 얻는 이 기도의 응답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혼자서는 받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20C 영국의 대표적인 설교가인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예배를 한시간이라도 빠지면 굉장히 겁이 난다.
왜냐하면 내가 결석한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그 예배에 특별한 은혜를 주셨다면 나는 그 은혜에서 제외된 사람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놓쳐 버린 그 기회와 그 시간의 은혜를 내가 하나님 앞에 다시 매달려도 다시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이는 시간을 결코 등한히 할 수 없다”
그렇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기독교 역사를 흔들어 놓은 큰 사건들은 거의가 모두 몇사람이 모였든지 간에 성도들이 모인 공집회에서 체험한 은혜를 통해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성도의 모임을 등한시하고 예배에 잘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런 시간에만 주시기로 준비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놓쳐 버리는 손해를 피할 수 없습니다.
사단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이것부터 못하게 하려고 듭니다.
여러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예배 출석만은 꼭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집에 와서 드리는 예배의 이 기쁨과 이 감격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즐거움을 사탄은 슬그머니 손을 뻗쳐 빼앗아 갑니다.
그 즐거움이 우리에게 없기만 하면 그 다음은 쉽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참 삶의 즐거움이 없는 그 인생은 사탄의 꼬임에 100이면 100 다 넘어지고 맙니다.
두번째로 시험은 우리가 약할때 나의 약한 부분을 찾아 꿰뚫습니다.
우리는 어떤 때는 강하고 어떤 때는 약합니다.
언제나 똑같지 않습니다.
이 변화를 사단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사단은 때마침 멋진 때를 잘 마련해 놓고 우리를 유도합니다.
예를 들면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욘 1:3).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습니다.
마음이 약해져 있는 그때 니느웨로 가기가 싫은 그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배를 타고 갑니다.
어떤 설교가는 이 ‘때마침은 사탄의 때였다’고 말합니다.
때가 잘 열린다고 그리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를 먼저 바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요구가 있는가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 ‘때마침’을 좇다가 결국은 큰 풍랑을 만납니다.
우리 주님에게도 약한 때가 있었습니다.
사십일 금식기도 하시고 배가 고팠습니다.
그때에 사탄이 쫓아왔습니다.
그리고 돌멩이를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 연약한 때에 사탄은 우리를 쫓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자기를 잘 보아야 합니다.
지금 내 영적 수준이 높을 때인가? 아니면 낮을 때인가?
그 연약한 때를 노려서 사탄은 공격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사탄은 우리의 약한 부분을 공격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에 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드에 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약합니다. 또 명예나 권력에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쉽게 성내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조절을 못합니다.
내 약한 부분이 무엇인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이 연약한 부분을 사탄은 노립니다. 그래서 쉽게 넘어지고 후회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나의 약점이 사탄에 잡혀 공격받을때 때로는 하나님은 그냥 넘어지게 놔둡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자기 영광을 가리시면서 자기 이름이 먹칠을 당하시면서 자기 영광이 땅에 떨어져 짓밟히면서도 우리에게 이 시험을 허락하고 넘어지게 만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약한 부분을 발견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더 큰 범죄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사탄에게 완전 K. O 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 이 시험을 허락하고 넘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약점을 발견하고 다시 그 약점을 향해 공격하는 사탄을 향해 싸워 이기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의 약한 부분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성령님께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약한 부분들이 무엇인가를 늘 깨우쳐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오히려 악에서 구하옵소서’
셋째로 사탄은 우리의 약점만 공격하지 않고 강점도 공격합니다.
모세를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그 시대에 가장 온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땅에서 가장 온유가 승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무엇에 넘어졌습니까?
화를 냈기 때문에 넘어졌습니다.
모세는 그 문제에 있어서는 ‘나는 자신만만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사단은 그 미움을 너무나 잘 압니다.
인간의 아무리 고상한 것도 아무리 위대한 것도 사단의 강한 유혹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는 그 어느 누구의 강한 덕성도 강한 성품도 강하고 귀한 아름다운 것들도 사탄의 유혹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삶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강하다고 생각할 때가 사실은 가장 무서운 함정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이 강한 것이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강한 것은 주님을 신뢰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이 강한 것 때문에 자기가 완성되었다는 것 때문에 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마귀의 시험에 농락당하는 중요한 이유는 마귀를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기 때문이다’고 지적합니다.
사단을 과소평가하면 사단이 놓은 덫에 걸립니다.
사단은 능력이 많은 존재입니다. 사단은 공중의 권세잡은 자입니다.
그 세력은 하나님을 제쳐 놓고는 아무도 그에게 대항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시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나의 감정으로도 그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단은 나의 감정을 내가 강하다는 그것을 쉽게 공격합니다.
사단을 이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은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입니다만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신뢰했던 하나님이 위대하십니다.
모세와 바울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믿었던 우리 하나님만이 위대합니다.
그래서 나의 강한 것을 믿으면 안됩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나를 약한 나에게 맡기지 않고 하나님이 맡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나의 길을 자주 넘어지는 나의 손이 이끌지 않고 능력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이 이끌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쁩니까?
그러므로 우리 삶을 우리 손에 맡기지 말고 하나님의 손에 부탁합시다.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강한 손으로 나를 붙들고 이끄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끊임없이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매일의 삶속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승리하는 믿음생활의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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