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세상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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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세상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
본문 : 마태복음 6장 19-24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또한 자주 애용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물질관을 소유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물질’은 우리의 생활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또한 누구나의 관심사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이 부분이 어떤 편협한 목적을 위해 이용되어 왔습니다.
설교자에게는 이 말씀이 헌금을 강요하는 것으로 사용됐고 성도들에게는 축복받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만 받아져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단편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한쪽 면만을 강조한 말씀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까?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오직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십니다.
하늘은 우리의 육체적인 관심이 아닙니다.
현재의 현실의 축복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에 더 우선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일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섰을때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취급하시고 어떻게 대할까? 하는 이 문제에 더 우선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현실적인 것 눈에 보이는 문제에만 집착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현세적인 군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만 오면 그의 통치 아래서 그들이 누리게 될 행복을 즉 정치적인 자유와 부와 명예와 쾌락을 즐기기 위한 세속적인 번영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은 외식으로 나타났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중요시하고 의식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이 항상 내 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보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에서 그들의 잘못된 모습들을 지적하시면서 메시야는 세속적인 행복이 아니라 영적인 행복을 나누어 줄 것이고 그 행복은 이 땅위에서가 아닌 하늘에서 완전하여질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물질관에 대하여 교훈하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물질에 대하여 무식하거나 무관심하시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물질이나 돈을 악한 것으로 규정짓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부자를 책망하거나 그를 나쁜 사람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질없이는 우리의 삶도 우리의 선교도 불가능합니다.
돈은 우리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합니다.
성경은 단지 돈을 사랑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돈이 제일이고 그저 돈, 돈, 돈만 아는 생활, 돈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양심도 하나님도 기꺼이 버리는 그 사상을 경계하라고 가르칩니다.
돈과 물질이 인생의 최고의 가치인양 생각하는 사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버려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물질관을 가질 것을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고 하셨는데 주님이 무엇을 금한 것입니까?
이것은 자기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금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사유 재산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저축하는 것을 금한 것도 아닙니다.
관광을 위해 저축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만약을 위해 어려운 때를 위해 저축하고 준비하는 것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개미에게 가서 겨울에 필요한 양식을 여름동안 준비하는 그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성도는 믿지 않는 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딤 5:8)
또한 이것은 가정의 안락하고 행복한 생활을 금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가 즐길 수 있도록 주신 좋은 것들을 멸시하기 보다는 즐겨야만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금한 것입니까?
이기적인 재산의 축적입니다.
입에 세끼 풀칠하기도 어려운데 기본적인 인권마저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에 대한 불쌍한 마음을 전혀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비난의 대상이 될만큼 호화찬란한 허황된 생활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물질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며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의지하는 태도를 금한 것입니다.
돈이 나를 너무 행복하고 좋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 붙들어 매는 물질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를 금하고 있습니다.
왜 금하고 있습니까?
보물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돈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돈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면 우리는 돈을 생각하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나에게 돈만 많이 주어진다면 하나님이 내게 축복해서 물질이 풍요롭다면 절대로 하나님은 잊지 않겠다‘
물론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간사합니다.
천하에 믿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나의 마음입니다.
사람은 물질이 풍요로우면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돈이 다 해결해 주는데 뭐하러 하나님께 의지합니까?
돈이 나에게 필요한 것을 다 갖다 주는데 뭐하러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이것은 세계 역사가 증명합니다.
유럽과 미국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수많은 어려움과 가난과 병마 가운데 하나님께서 물질의 풍요로움을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결과가 생겨 났습니다?
물질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니까 하나님이 있다는 그 자체가 귀찮아 졌습니다.
하나님이 싫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의 자유와 향락을 막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신은 죽었다‘ 사신 신학을 만들어 냈습니다.
믈질이 풍요롭고 물질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니까 하나님을 멀리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귀찮아 하나님을 죽여 버렸습니다.
이것이 간사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보물을 땅에 쌓아 두는 것은 금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그들의 삶이 실패하고 마는 비극을 경험해야 했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에 대한 탐욕때문에 전 인류를 죄악의 세계로 몰아 넣습니다.
아간은 외투 한벌과 금덩이에 눈이 어두워진 이 탐욕의 죄때문에 한 민족을 패전의 비극 속으로 몰어 넣었습니다.
게하시는 불의한 뇌물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문둥병이 들어 고생하였습니다.
어떤 부자 청년은 물질에 대한 탐욕을 극복하지 못하여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주님을 등지고 세상의 어둠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돈 30냥이 무엇이길래 그것 때문에 자기의 스승이며 인류의 구세주인 주님을 팔아 영원한 형벌을 당해야만 했습니까?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인하여 하나님앞에 거짓말 하다가 그들의 생명이 끝난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은 바로 우리의 비극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함으로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인하여 주님을 버리고 주의 제자들의 거룩한 선교의 대열에서 이탈했던 데마의 이야기는 바로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사람들의 이런 이야기는 탐욕이 가져오는 비극적인 참상을 우리에게 경계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생활에 물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돈이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성경은 결코 ’돈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성경은 돈이나 물질 그 자체를 정죄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기까지 하는 물질에 대한 탐욕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부패시키는 것은 돈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탐욕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마다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경고합니다.
그래서 돈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바르게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의 물질관의 확립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하느냐 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왜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십니까?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여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땅에 쌓아 둔 재물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물질은 모두 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곧 사라져 없어져 우리속에 허무와 좌절만 남깁니다.
재물만 쫓다가는 이세상 마지막날 그 물건이 불탈때 나도 같이 타버립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돈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 당하는 근본 문제는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부하면 부한대로 돈을 사모하다가 도리어 돈의 노예가 되어 혹사를 당하는 것이지 실제로 돈이 없어서 고통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자신의 전부이고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어서 돈 앞에만 가면 맥을 못쓰는 그것이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지 돈이 많아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나의 마음이 온통 돈에 매여 있으면 돈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염려와 불안이 떠나지 않습니다.
나의 마음의 자유를 돈에게 다 빼앗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돈이 인생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은근히 믿고 돈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사람을 보면 좀 어리석은 데가 있습니다.
돈이 나의 생활을 좀 편하고 호화스럽게 만들지는 모르지만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세계적인 거부하면 미국의 록펠러가를 생각합니다.
그의 재산은 천문학적 숫자입니다.
그런데 존 록펠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천만불을 모아 보았으나 그것이 나에게 행복을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또 자동차 왕으로 불리는 미국의 헨리포드도 이와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돈과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젊어서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할 때였다’
돈을 가장 많이 모아 본 사람들이 고백하는 말입니다.
언제였나요?
신문에 교통사고로 숨진 홍현자 여인의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부모 친척 하나 없는 천애고아로 그의 오빠와 같이 오누이가 결혼도 하지 않고 동냥에서 부터 구두닦이며 쌀배달이며 가리지 않고 일을 하여 돈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그 전해에 전국에서 가장 확실한 저축왕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그 날도 홍여인은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쌀가마니를 자전거에 싣고 한길을 가로질러 달리다가 그만 사고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건이 알려지자 그의 빈소에는 각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조의금을 가지고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 돈봉투를 받아 든 홍여인의 오빠는 ‘이놈의 돈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다’고 그 자리에서 돈을 찢어 버렸습니다.
돈이 전부인 줄 알고 자신을 송두리채 내던져 몸부림쳤는데 그 결과가 이렇습니다.
돈을 모은다는 것은 이처럼 허무합니다.
돈이 나에게 참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모아도 모아도 끝이 없고 더 모으고 싶은 것이 돈에 대한 사람의 욕심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말만큼 쉬지 않습니다.
내가 매일 대하는 것이 돈이고 내가 매일 이처럼 고생하는 것도 돈을 벌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으면 꼼짝도 못하고 아무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돈 자체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돈이 필요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 돈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20절에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나의 보물을 쌓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물질을 옳게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위해 복음사역을 위해 선한 사업을 위해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재물을 포기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돈이 필요없다고 선언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용하도록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나의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물질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불쌍한 이웃을 돕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물질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했고 우리는 단지 청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준 것에 불과합니다.
나의 지식도 재능도 나의 재물도 그리고 나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는 단지 잠깐동안 위임받은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사용하면 그런 사람을 가지고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뻔뻔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절도 잘하기로 유명한 남자와 소매치기 잘하는 여자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산모가 병원에를 가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손을 꼭 움켜쥐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손을 펴 보니 아이 손에 반지가 쥐어 있었습니다.
세상에 나오는 그 순간 간호원의 반지를 훔쳐 쥐고 나왔다고 합니다.
물론 꾸민 이야기지만 우리의 모습을 잘 풍자한 모습이 아닙니까?
영국의 유명한 목회자요 설교가였던 스펄전 목사님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요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주일 도둑놈이요 예배시간에 예배 드리지 않는 것은 예배 도둑놈이요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가로채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 도둑놈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내것처럼 마음대로 막 사용한 ‘하나님의 것 횡용죄’로 수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날이 멀지 않습니다.
평생동안 재산을 모으는 일에 집착해 온 사람들도 물론 구원을 얻을 수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그가 하나님 앞에 내놓는 생애란 조금도 유익한 것이 없는 비참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구원을 얻긴 얻되 불가운데서 구원을 얻는 것 같이 비참한 모습으로 얻을 것입니다. (고전 3:13-15)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향해 너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 주님은 물질관의 확립이 나의 생애를 올바르게 판단하도록 만들어 준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22절과 23절의 교훈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눈은 우리 몸에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눈으로 보고 사물을 옳게 분별하고 올바른 판단을 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물질에 눈이 어두워지면 우리는 인생을 올바로 판별하고 바로 보는 시각을 상실하게 됩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일에 대해 정확하고 바람직한 일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물질에 대한 탐욕의 시선을 가지고 그 사건을 그 상황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탐욕 때문에 눈이 멀어 영적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어두움은 얼마나 심하겠느냐는 탄식의 말입니다.
탐욕은 인간으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력의 상실이라는 비극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물질관 확립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는 중요한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24절 말씀입니다.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재물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결정하라는 말입니다.
한 노예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노예가 된다는 것은 즉 한주인에게 속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 한 주인에게 복종하는 일을 계속적으로 완전히 전적으로 100%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다른 주인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지극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던지? 아니면 재물을 나의 신으로 모시든지 결정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재물을 버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재물은 필요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소유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재물을 섬길 필요는 없습니다.
재물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재물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돈벌기에 바빠서 예수 믿지 못하는 사람들, 돈때문에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들 그들은 돈을 신으로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재물을 믿고 물질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일한 물질이 신앙의 대상이 되면 그는 결코 하나님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상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냐? 물질이냐?
여러분들이 모든 것에서 참으로 자유하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우리는 이 물질에 대한 소유욕과 탐심으로부터 자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이런 것으로부터 참으로 자유할때 나는 비로소 마음을 다하고 내 삶을 다하여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속하사 우리를 그리스도안에 두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요롭게 즐길 수 있도록 주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실제 우리의 행동과 결정에 있어서는 돈을 섬기고 있음을 보여 준다면 하나님께 대한 얼마나 큰 모욕이겠습니가?
영국의 설교가 로이드 존스 박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떤 농부가 키우던 암소가 어느날 새끼를 두마리 낳았습니다. 한놈은 붉은 놈이고 다른 한놈은 흰놈이었습니다. 농부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면서 아내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두마리 가운데 한마리는 주님께 드립시다. 이 두마리를 같이 길렀다가 크거든 한마리 판 값은 우리가 쓰고 다른 한마리 값은 주님께 바치도록 합시다.”
아내는 두마리 가운데 어느 놈을 주님께 바칠 생각이냐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그 문제는 팔때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두놈을 똑같이 키웠다가 동시에 팔면 되지 않겠어요?”
몇달 후에 그 농부는 아주 슬픈 표정을 하고 부엌으로 달려 들어 왔습니다.
농부의 아내는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주 슬픈 소식이오.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소”
“그런데 여보 당신은 두마리 가운데 어느 것이 하나님의 송아지인가를 그때 정해 놓지 않았잖아요?” “그랬었지. 그러나 나는 항상 마음속으로 흰놈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그런데 바로 그놈이 죽었단 말이오.”
여러분 왜 늘 하나님의 송아지만 죽어야 합니까?
만일 우리가 주님을 분명한 태도로 섬기지 않으면 또 우리가 가진 재물에 대해서 분명한 태도를 보여 주지 않으면 죽은 놈은 언제나 주님의 송아지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재물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모든 재물을 소유하고 내가 그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나의 재물을 내가 소유하고 내가 재물을 섬기든지 두가지 태도 가운데 우리는 하나를 결정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재능, 시간, 친구, 야심, 재물 그리고 생명까지 모두 주님께 드리고 우리는 하늘에 썩어지지 않는 보화를 쌓는 일에 그 모든 것을 사용하여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삶이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엘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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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