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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형제의 눈속에 티와 내 눈속의 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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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형제의 눈속에 티와 내 눈속의 들보

본문 : 마태복음 7장 1-5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우리는 지난 수개월 동안 마 5장, 6장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말씀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의 산상설교는 마 5장, 6장,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따. 그런데 마 7장의 내용은 이전 내용들과 비교할때 명백한 연결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더구 마 7장 자체 내의 말씀도 여러개의 독립된 구절로 이루어져 있어 서로 잘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주석가들은 원래는 마 7장의 내용이 다른 문제에 속한 것인데 마태가 약간 서투르게 오리고 붙이는 편집 작업을 하여 여기에 첨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마 7장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관계’에 대하여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1-5절은 형제에 대한 관계, 6절은 개와 돼지로 불려지는 집단의 관계, 7-11절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관계, 12절은 모든 사람, 13-14절은 우리와 함께 좁은 길을 따라 걷는 우리의 동료 순례자들에 대해, 15-20절은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거짓 선지자들과의 관계, 21-27절은 우리가 순종하고 따라 가야 하는 우리 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우리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상당히 어려운 요청이고 이 문제를 가지고 설교한다는 그 자체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전달함에 있어서 그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가차없이 비판합니다. 죄를 책망하고 올바른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길을 제시하고 이끕니다. 설교 자체의 많은 부분이 죄에 대한 비판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잘못된 부분이 비판입니다. 비판이 많이 있기 때문에 비판하면서 비판하지 말라고 제목을 잡고 설교한다는 자체가 이상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저는 이 시간에 이 말씀에 의거해서 우리의 잘못된 비판의 모습을 비판하면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요새 우리 주변에서 상당히 고무적이고 바람직한 현상들을 봅니다. 한국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이름만 교인이고 주일날만 신자인 경향으로 흘러 가는데 몇몇 교회의 교인들은 대단히 열성으로 믿고 열심으로 신앙생활합니다.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합니다. 참으로 좋은 모습들입니다. 몇몇 교회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서 이런 모습들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가끔 염려스러운 것은 신앙에 대해 너무 열심을 갖다 보니 때로는 남을 비판하는데도 열심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하기를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심히 말씀대로 살고 교회봉사도 하고 전도도 합니다. 그런데 자기 동료 신자들의 모습을 보니 그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 열심도 없고 봉사도 없고 자기가 볼때는 꼭 말씀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눈에는 그들이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래서 같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신앙이 없고 열심이 없는 그들을 비평하고 나무랍니다. 때로는 정죄합니다. 이것은 열심히 있으면서도 대단히 해로운 일입니다. 여러분 기억합시다. 사탄은 종종 복음에 대한 2가지 방향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먼저 마귀는 기독교인들이 복음에 대해 냉담한 마음을 갖도록 자극함으로서 복음증거를 헛된 것으로 만들어 보고자 애를 씁니다. 우리 마음 속에 의심을 자꾸 불어 넣어 복음을 받아 들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안되면 이번에는 지나친 열심을 갖게 만들어 복음 사역을 방해하려 듭니다. 우리 주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하는 2가지 원인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 6장에서 우리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까?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주권만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을 받아 들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사랑하고 걱정하며 불안에 빠집니다. 그렇게 될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하나님이 나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일들에 마음을 쏟고 있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오늘의 본문 7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증거 사역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열심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형제를 비판하려는 열심입니다. 형제의 믿음 없음을 보고 형제의 조그마한 잘못을 보고 가차없이 날카롭게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가로막습니다.


언젠가 어느 형제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이 형제가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했고 학생회 시절에 회장도 했지만 구원의 확신은 대학부때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비로소 얻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구원 얻었다는 그 사실이 너무 기뻐 매일 감사와 찬송이 나오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정말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교회 일도 자기의 전 시간을 투자하며 아낌없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와 같이 신앙생활하는 형제들의 열심없는 것과 봉사하지 않는것,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잘못을 고쳐 주기 위해 열심히 가르쳐 주기도 하고 나무라기도 하고 비판도 했습니다. 이렇게 몇달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이 이 형제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형제는 다른 형제들도 자기처럼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로서 같이 주의 일을 하기 위해 그들의 잘못된 것을 지적했지만 다른 형제들의 눈에는 그 형제 말이 자기들을 비판하는 소리로만 들렸고 정죄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형제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신앙적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는 열심이 복음 사역을 막고 서로에게 상처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런 행위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비판하지 말라’ 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첫번째로 비판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1절,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 주님은 그리스도인은 비판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못본 체하며 모든 비판을 하지 말고 선과 악까지 분별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이 말씀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 법정의 심판을 금하신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법정의 판사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갖고 있는 다른 개인에 대한 책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선행과 악행에 대해 분별하는 일까지 그만 두라는 뜻이 아니라 한마디로 비난하기를 좋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태도를 주님은 금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재판관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모든 행위는 마지막 날에 진정한 재판관이신 예수님 앞에서 계산하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까? 그들은 남을 정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눅 18:9절 부터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기도합니까? 그는 세리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며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눅 18:11-12). 토색하고 불으하고 간음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자체보다 남의 잘못을 정죄하고 자기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그것을 더 책망하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의 결정을 즐거이 찾는 태도를 우리 주님은 금하고 있습니다. 어떤 수단을 써서든지 다른 사람의 결점이나 약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그런 결정을 찾을때 기뻐하는 태도를 주님은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 비판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에만 눈을 크게 뜹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죄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롭고 더 탁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죄하는 태도를 가집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칭찬만 듣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경멸하고 멸시합니다.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가만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왜 싸웁니까? 가끔 학생들간에 다툴때 왜 싸우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그들은 꼭 이렇게 대답합니다. “전도사님 저도 잘못했어요. 제 잘못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재가 더 잘못했어요. 저는 재보다는 덜 잘못했어요. 그런데 내가 더 잘못했다고 그러잖아요.”


내가 하나님의 위치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정죄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 4:4에서 말합니다.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라”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해야 할 일을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 앞의 심판 받는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향해서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호소할 장본인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제일 먼저 호소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대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말할까요? 틀림없이 주님께서 나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기를 호소할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세상에 살때 너무 부족했습니다. 저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저희를 용납해 주십시오.” 이때 주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다른 사람에게 관용과 사랑을 얼마나 베풀었는가? 너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얼마나 용서해 주었는가? 나는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것을 따라 너에게 베풀겠다.” 그러면 이때 우리가 주님 앞에 뭐라고 또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앞에서 비판을 받지 않고 용서와 사랑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비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주님이 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나는 비판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속에는 더 큰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3,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우리는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도저히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갈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하나도 없는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이제는 죄인이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내가 너를 의롭게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용서함 받았습니다. 나는 용서함 받은 죄인, 의롭게 된 죄인입니다. 그런데 나는 용서함 받았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용서함 받는 것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용서함 받지 못한 그냥 죄인인채 남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죄를 범하고 잘못을 범하면 가차없이 ‘너는 죄를 범했어’ ‘너는 죄인이다’고 정죄합니다. 자기는 용서함 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때문에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작은 죄를 지은 자들이 발견되었을 때 어떻게 내가 그들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범했지만 주님께서 오히려 자기 몸을 죽게 내어 주는 사랑으로 우리를 대했다면 어떻게 내가 그들을 사랑으로 용서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만 합니다. 죽어야만 하는 죄인, 용서받지 못하는 죄인, 자기의 눈속에 들보로 가득찬 죄인의 모습을 먼저 깨달아야만 합니다. 상대방의 눈에는 티가 들어 있지만 내 눈속에는 들보가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남을 비판하려는 그 유혹이 내 속에서 자꾸 일어날 때마다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인간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헬라 사람들이 자주하는 이야기 가운데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옵니다. 사람은 두개의 자루를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하나의 자루는 앞에 달고 다니고 하나는 뒤에다 매달고 다니는데 앞에 있는 자루에는 남의 허물을 집어 넣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계속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뒤에 매고 다니는 자루에는 자기 자신의 허물을 집어 넣고 다닙니다. 뒤에 있는 자루가 우리 눈에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허물은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자는 대부분의 남의 허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정말 채워져 있어야 하는 자루는 자기의 자루인 뒷자루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약점과 잘못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눅 9장에 보면 사도 요한이 실수하는 유명한 장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많은 실수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실수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촌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주님과 제자들은 이 촌에 들어갈 수 없다는 냉대와 괄시와 박대를 사마리아인으로 부터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화가 났습니다. “구세주 주님이 들어가는데 우리 일행을 무시하디니” 그래서 그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서 선생님을 박대하고 우리를 냉대하며 괄시하는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모두 다 태워 버리고 맙시다.” “이 사마리아 모든 사람을 불을 내려 죽어 버립시다.” 얼마나 끔찍합니까? 이때 주님께서는 얼마나 슬퍼하셨을까요?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님의 일행을 냉대했다는 것, 그것은 그들의 ‘티’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용납하지 못하고 그들을 향해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터뜨리며 불을 내려서 그들을 태워 버리기를 원했던 그들의 심정은 그들의 눈속에 있는 더 커다란 ‘들보’였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복수와 분노의 감정은 다른 사람을 괄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똥 묻은 개가 누구를 나무랍니까? 겨 묻은 개입니다. 자기 속에 남을 향한 분노와 미움의 똥이 있으면서도 남의 속에 있는 겨같은 죄만 나무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범하는 것은 ‘눈속의 티’입니다. 그러나 그 잘못 때문에 내가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 이것은 ‘눈속의 들보’입니다. 그가 범한 죄때문에 그를 정죄하고 그를 미워하는 것 이것은 들보입니다. 주님은 ‘형제의 눈속에 티’때문에 슬퍼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눈속에 ‘들보’때문에 슬퍼하십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한 것 때문에 슬퍼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그를 정죄하는 것 이것 때문에 더 슬퍼하십니다. 형제의 잘못을 보시기 전에 내 잘못을 먼저 보고 그것때문에 슬퍼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주님이 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주님은 남의 잘못을 비판하는 사람을 위선자로 정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주님은 자기의 잘못을 그냥 지닌채 형제의 잘못을 비판하는 자를 ‘위선자요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중인격자나 속과 같이 다른 사람만이 위선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보다 자기의 잘못을 감추면서 남의 잘못만을 끄집어 내는자 이런 자를 향해 주님은 위선자요 외식하는 자라고 지적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잘못을 범한 이웃의 형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슬퍼하며 고통속에 있는 이웃의 형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형제가 잘못을 범하면 그 사람을 비판하기에 앞서 그의 인격을 정죄하기에 앞서 그의 죄를 깊이 슬퍼하는 마음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형제가 말씀대로 살지 못할때 “왜 너는 바로 살지 못하니?” 하고 나무라기에 앞서 그의 영혼을 위해 흐느끼며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형제가 죄를 범한 것이 발견되면 그를 먼저 감싸주고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면서 말씀에 따라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다른 사람들의 티를 발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의 잘못을 고치도록 같이 도와주고 힘써 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내가 남의 잘못만을 비판하면 먼저 인간관계의 단절을 가져옵니다. 형제와 형제 사이의 거리가 생기고 미움이 생기고 원망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인간관계의 단절과 아픔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우리 주님이 산상수훈 5장 23절 이하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인간관계의 단절과 위기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결단코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누구와 싸우고 나면 기도가 잘 됩니까?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기도가 잘 나옵니까? 안나옵니다. 인간관계에서 단절의 아픔은 기도생활을 방해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나의 믿음을 점점 약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축복을 받을 수 없게 만듭니다.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그를 비판하지 말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형제에 대해 원망이 생길 때마다 그를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내가 저를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주님께 용서함 받아 천국가기 원하면서 그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주님께서도 나를 용서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하려면 형제의 잘못을 잊어 버려야 합니다. 지난 날의 아픈 과거를 다시 기억나게 만드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고 그 사람을 찾아가 화해를 합니다. 화해한다고 찾아가 다시 그때 일을 기억하며 그때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다고 하다가 한바탕 더 싸웁니다. 용서는 과거의 잘못을 다 잊어 버리고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를 향해 내가 더이상 너의 허물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때로 남을 용서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도 우리들을 용서하시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댓가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으로 주님께 내 죄를 용서함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나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마음을 바늘로 꼭꼭 찌르는 그 얄미운 사람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를 위해 축복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마음에도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남에게 칭찬 받기를 원한다면 이제 남을 칭찬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남을 인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 입에서 여러분이 격려받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이 먼저 입술을 열어 그들을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영국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때 런던 도시에 유명한 세개의 교회가 좋은 의미에서 서로 경쟁을 하면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 교회의 목사님들은 세계를 흔들던 유명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한분은 그리스도교회의 F. B Meyer(마이어)목사님, 다른 한분은 침례교의 저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 그리고 또 다른 한분은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켐벨 모르겐 목사님이었습니다. 이 세분이 말씀을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분이 한 도시에서 같이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펄전 목사님과 캠벌 몰간 목사님이 인도하는 교회가 큰 부흥을 이룰 때 마이어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기도를 드리는데 그 자신이 스펄전 목사님과 캠벨 목사님을 시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여 시기심을 없애려고 아무리 노력하여도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질투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이어 목사님은 그 문제를 위해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 내 속에서 그 두분을 시기하는 마음이 없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시기하지 않게 도와 주시고 평화의 영을 갖게 해 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지만 그 시기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시기가 자꾸만 일어납니다. 어느날 깊은 기도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이어 너는 지금까지 시기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만 했지 스펄전 목사와 캠벌 몰간목사를 위해서 축복하는 기도를 해 보았느냐?” 그는 이 음성에 부딪혀서 기도의 방법을 바꾸어 무릎을 꿇고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스펄전 목사님의 교회와 캠벌 몰간 목사님의 교회를 더욱 크게 부흥시켜 주시고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드리고 나자 비로소 마이어 목사님에게 참 평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이제 자유를 얻었다. 평안을 얻었다. 내 마음 속에 기쁨이 샘솟는다. 평화가 넘친다. 나에게 이러한 자유와 환희를 가져다 주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나는 비판했다. 그리고 시기했다. 오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는 이 비판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나를 도와 주시고 계속 사람들을 축복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 가슴에 칼을 들이대는 사람들을 위해서 축복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를 위한 용서의 기도를 사랑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이 베푸시는 산상수훈의 절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인격을 닮아가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한 우리 자신을 발견하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그리고 오늘 본문 다음의 12절에서도 말씀하십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는 모두가 죄책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 나와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남을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그리고 비판하던 저를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옵소서” 라고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때 주님께선 나에게 용서를 베푸실 것입니다. 이 용서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용서해 준 주의 사랑에 감사하며 여러분은 이제 다시 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 안에 거하겠다고 주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 이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성령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임하고 나도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그 능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랑은 나를 사랑하사 피를 흘리신 십자가에서 시작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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