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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이렇게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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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렇게 기도하라

본문 : 마태복음 6장 9-13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오늘 여러분과 제가 읽고 암송한 성경구절은 우리가 너무도 많이 외우고 또한 드려지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이 기도를 드립니다. 

때로는 나의 모든 모임도 이 기도로 시작해서 이 기도로 마칩니다. 

이 기도를 가리켜 우리는 흔히 주기도문 혹은 주의기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기도는 ‘주의 기도’가 아니라 ‘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입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 내용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데 이 기도는 우리 주님에게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히 4:15에서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하나의 모범적인 기도를 마땅히 우리가 기도할때 이렇게 기도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경외하는 방법은 대개 3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가 찬양입니다. 

오늘도 우리 에덴 성가대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찬송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찬송을 통하여 영원히 경배 받으실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보이십니다.


둘째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내가 좀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굳은 각오와 노력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릅니다. 

기도는 단지 말이 아니라 삶 전체를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린다는 고백입니다. 

기도는 나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눅 11장에 보면 주님께서 한곳에서 기도하고 돌아오셨습니다. 

그때 제자 중 하나가 주님께 말합니다. 

‘주여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오늘날 우리도 흔히 이런 질문을 합니다. 

“저는 기도할 줄 모릅니다. 기도를 어떻게 합니까? 기도를 가르쳐 주세요.” 

비단 이런 질문은 초신자나 믿음이 약한 신자들에게만 국한되는 말이 아닙니다. 

오래 믿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제자들이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요? 

주님의 전생애는 기도하는 삶이었습니다. 

주님은 한적한 곳에 가셔서 새벽 미명에도 저녁 어두울때도 심지어는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에 앞서서 그는 먼저 기도하셨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위대한 기적을 베풀기에 앞서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지새워가며 기도하셨고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운명하는 그 순간까지도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주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거룩한 삶의 기초는 기도였습니다. 

주님이 이적을 행하는 권능있는 삶의 기초가 기도였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그 순종이 살 자체, 능력을 행하는 그 삶 자체가 기도인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권능을 달라고 말하지 않고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삶을 가르쳐 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기도를 합니다. 

기도없이 인간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종교가 그들 나름대로 기도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질문을 묻습니다. 

“사람은 왜 기도하는가?” 

“우리 신자들은 왜 기도를 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어떤 학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왜 기도하는가?” 하는 질문은 마치 뻐꾸기는 밤에만 우는가? 독수리는 왜 끝없는 높은 창공을 저렇게 나는가? 하는 질문과 같다. 

뻐꾸기는 밤에만 울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기도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기도를 요구합니다. 


기도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산신령에게 부처에게 심지어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기도는 우리의 사람을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만듭니다. 

기도는 우리의 발걸음을 거룩으로 향하여 달려가도록 만듭니다. 

우리의 기도하는 무릎없이 우리는 거룩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거룩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능력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기도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처럼 거룩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마음 속에도 기도에 대한 목마름과 기도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찼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주님앞에 나아가 “주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고백하며 그 기도와 함께 매일 매일을 생활한다면 우리의 생활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생활이 되겠습니까? 

이러한 제자들이 기도에 대한 간절한 사모와 열정앞에 주님은 “너희는 기도할때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

이것은 단순히 기도를 암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정신을 강조하고 기도의 올바른 태도를 강조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기도생활의 전형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참으로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주기도라는 짤막한 기도를 통하여 기도의 형태와 기도의 모범과 기도의 전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가 지금은 의미없는 군중의 소리로 변화되었습니다. 

단지 염불 외우듯 그 의미는 알지 못하고 입에서만 앵무새처럼 중얼거립니다. 

아무 생각없이 예배가 끝날때 자기의 신앙고백 없이 그냥 의미없이 외워지는 예배를 끝내는 한 형식의 주문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여러번은 아니 수십번씩 이 주기도를 외웁니다만 그중에 한번만이라도 이 기도의 의미를 되새기며 드립니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말과 같이 어쩌면 이 기도는 최대의 순교자일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주기도를 암송하고 있지만 이 기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기도를 나의 기도로 삼지 있지 않고 있습니다. 

의미없이 이 기도를 반복하고 있는 수많은 성도들에게 이 기도는 순교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죽이고 있습니다. 

단지 염불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럿이 모여서 어떤 모임을 끝낼때 내가 가르친 이 기도를 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배나 기도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하나의 형식으로 이 기도를 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는 ‘이제 모임이 끝났으니 잘 가시오’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 기도에는 내 인격 전체를 싣는 기도입니다. 

내 삶 전체 내 영혼 전체로 드려야 하는 기도입니다. 

예배의 마지막에 이 기도가 드려진다면 내가 세상에서 이 기도의 내용대로 내 삶 전체를 드려 살겠다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 의미없이 녹음기처럼 되풀이해서 이 기도가 드려진다면 이 기도는 분명히 바로 앞에서 지적하는 외식하는 기도요,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됩니다. 

주님은 이런 기도를 드리는 사람을 책망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오랜 신앙생활과 오랜 기도생활로 말미암아 이 기도가 하나의 익숙한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기도가 되었다면 주님은 우리를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기도는 크게는 3부분, 작게는 8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부르는 부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속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가르칩니다. 

그 관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아버지시여” 이렇게 부르라고 말합니다.


둘째 부분은 6개의 간구 부분입니다. 

그 간구 중에 9절 하반절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이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웁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의 대상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대상으로서 우리는 그를 향하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부릅니다.


두번째 간구는 10절에 ‘나라이 임하옵시며’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우리를 다스려 주옵소서’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임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왕으로서 나를 다스려 달라는 말입니다. 

이 나라를 다스려 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주권이 우리의 국가, 사회, 가정, 교회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에까지 미치기를 바라는 간구입니다.


세번째 간구는 10절 하반절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 달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11절에 네번째 간구로 자신을 위한 기도가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네번째 간구는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과 은혜를 받아야 하는 나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공급없이 우리는 단 일분 일초도 살 수가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 간구에 앞서 우리 기도의 중요한 초점은 하나님의 뜻에 있어야 합니다. 

묻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의 기도생활에 참된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까? 

우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내 소원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내 자녀를 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묻습니다. 

다른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십니까? 

아프리카 정글에서 복음을 전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느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십니까? 

참된 기도는 내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실현되기 위해 그것을 위해 애쓰는 분들을 위한 기도도 포함됩니다. 

참된 기도는 그 기도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수행하기 위한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려진 예수님의 기도에서 우리는 기도의 극치를 발견합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 기도와는 정반대로 왜곡하여 뒤집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제발 하나님 뜻대로 마옵시고 제 뜻대로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는 아닐까요? 

물론 우리는 그런 기도를 드린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내 욕심, 내 요구만 채우기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혹시 내 생애를 뒤집어 놓아서 내가 즐기고 내가 기뻐하고 내가 감사할 조건에서 나를 변경시키지는 않을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를 저 아프리카의 정글속의 전도자로 보내시지는 않을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 재산 전부를 다 팔아 주님의 사업에 바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지금 누리는 이 행복스러운 가정에 어려움을 주어서 나로 하여금 신앙의 단련을 시키지는 않을까? 하고 두려움을 갖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고통, 그 고난을 체험하는 방편으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불행한 자로 실패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때 자식이 최선의 방법으로 잘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식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자녀들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모든 일들을 해결해 줍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 넘어 우리의 취미나 우리의 재능, 우리의 앞일까지 모두 포함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좋은 일로 인도하십니다. 

그 일은 결국에는 나에게도 말할 수 없이 좋은 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의 뜻보다 훨씬 나에게도 더 유익하고 좋습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어 기도 드리시기 바랍니다.


다섯번째 간구가 무엇입니까? 

12절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무슨 말입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구세주이신 주님과 죄인인 나를 가르쳐 줍니다. 

내가 회사에서 아무개 과장, 또 관공서에서 무슨 장, 내가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나는 집사, 권사, 전도사에 앞서 죄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죄악에서 구속하신 구세주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내 죄가 주님을 통해 용서함 받았기 때문에 내 이웃도 나와 똑같이 죄용서함 받기 위해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 때 때로는 미움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통도 받습니다. 

내 마음속에도 나를 못살게 구는 그 얄미운 사람을 향해 미움이 가득차기도 합니다. 

미움이 나를 향해서 나의 전체를 겹겹이 쌀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외롭습니다. 

이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미움을 실컷 쏟아주고 싶고 보복하고 싶은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후에 자기를 노예로 팔아 버린 형들의 잘못을 다 잊었습니다. 

형들이 미웠고 정말 원수 같았고 자기를 너무 고생시켰지만 다 잊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형들이 걱정합니다. 

“저 요셉이 우리가 이렇게 잘못했는데 저 애가 정말 용서했을 것인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만 효자인 요셉이 아버지를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 용서했지만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계시는 이 마당에 용서는 커녕 무서운 보복이 있을 것이라”고 두려워 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요셉에게 사람을 보내어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때 요셉은 울면서 말합니다. 

“형님들 오해를 푸십시오. 나를 여기에 보내신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땅에서 준비시키기 위해서 나를 보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은 그 악한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미움보다 더 크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촛점으로 맞추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움이 여러분에게 엄습해 올 때가 있습니까? 

내 속에 누구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으로 가득차서 고통당하는 때가 있습니까? 

얄미운 그사람을 한대 쥐박고 싶고 욕이라도 실컷 해주고 싶을 때가 있습니까? 

그럴때 우리는 이 요셉처럼 하나님께서 이 미움 위에서 역사하시는 선하신 섭리가 무엇인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미움을 통해서 나의 생애를 향해서 하시고 싶어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찌르고 고통을 주는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없다면 그 찌르는 가시가 없다면 내가 이만큼 겸손하겠습니까? 

나에게 억울한 일이 없고 고통이 없다면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겠습니까? 

오히려 내 주변에 나를 향해 이처럼 오해가 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우리를 향해서 칭찬을 해버리면 우리의 상을 이미 다 받은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이해해 주지 않은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억울한 눈물을 흘린 사람을 하나님께서 그냥 놓아두지 않습니다. 

천국에 입성했을때 주님께서 가장 첫번째 해 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희 두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고’입니다. 

억울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주님께서 씻겨 주실 눈물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칭찬을 다 받아버렸고 박수갈채를 받은 사람에게는 이 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억울한 눈물을 흘린 사람에게만 주님게서 친히 오셔서 그의 눈에 눈물을 닦아 줍니다. 

이웃을 향해 억울한 일을 당해도 미움이 생겨도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시며 우리의 입에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고 기도가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섯번째 간구는 13절에 나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여기서는 하나님이 나의 삶의 인도자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순례자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순례길을 가는 인생길에는 참시험을 받습니다. 

내 본향에 갈 때까지 그 시험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입에서 그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는 기도가 나와야 합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환난과 고통을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주기도문의 마지막 결론 부분, 크게는 3번째 부분이고 작게는 8번째 부분입니다. 

그것은 13절 하반절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읻. 아멘’ 

이것은 모든 기도의 목적과 끝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나의 영광이 아닙니다. 나의 이익이 아닙니다. 나의 소원 성취가 아닙니다. 

내가 훌륭하게 되고 나의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기도를 드리시렵니까? 

정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이 기도는 우리의 영적인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이 기도는 간결하고 단순합니다. 

헬라어 단어로는 모두 72단어입니다. 

우리말 단어로는 49단어 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이 주기도문을 암송하는데 단 20초의 시간밖에 안걸립니다. 

그러나 이 간결하고 짤막한 기도속에 우리가 기도해야 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모든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내 생호라속에 나타나기를 원하는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기를 원하는 기도가 들어 있고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위해서 하는 기도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이 기도속에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 용서,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들이 들어 있습니다. 

넘치는 확신, 감사와 찬송이 있고 기도의 모범 중에 모범입니다. 

이 기도속에서 우리는 완전한 모범을 발견합니다. 

이 기도는 무엇을 먼저 기도하고 무엇을 나중에 기도할 것인가에 대한 완벽한 모범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때 기도의 순서를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기도할때 내 필요를 항상 먼저 구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나의 간구부터 구하고 그다음에 식구 이웃 교회 국가 하나님. 그런데 여기 보면 여섯 가지를 구하고 있습니다. 

세가지는 하나님의 것을 구했고 그리고 세가지는 인간의 필요를 구했는데 이 순서가 뒤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쉽게 급해서 내 필요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기도는 내 필요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하나님이 해답이십니다. 

내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풍성하신 하나님이 문제입니다. 

항상 우리는 자기로부터 시작하려고 듭니다. 

여러분, 

탕자가 집을 나갔습니다. 주려 죽게 됐습니다. 

이 탕자에 있어서 최대의 문제 해답이 무엇입니까? 

먹을 음식입니까? 옷입니까? 친구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그의 아버지입니다. 

탕자의 문제에 대한 근본 해결은 그의 아버지입니다. 

더 많은 재산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문제 해답의 전부인 것입니다. 

우리가 늘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간구할 때마다 잊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내 문제의 완전한 해답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채 조그마한 내 필요에만 내 적은 부족을 채우기에만 급급해 버리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의 순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가장 좋은 기도의 모범입니다. 

이 기도는 간결하고 간단하지만 완전합니다. 

순서에 있어서 완전하고 내용에 있어서도 완전합니다. 

이 기도는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포함합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을 다 가르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 주기도는 기독교의 극치이며 하나님이 선물입니다. 

기도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를 허락하시고 기도할 수 있게 하신 그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으시렵니까? 

우리 주변의 모든 상황이 또 환경이 절망을 선언하지만 우리가 아직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또 우리의 눈이 하늘을 향해 전능하신 하나님께 ‘아버지여’라고 부르며 그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아무쪼록 우리가 앞으로 8주동안 이 주기도문은 각 부분을 살펴보는 동안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시고 이 기도에 나오는 참된 간구와 축복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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