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기도할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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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도할 때에
본문 : 마태복음 6장 5-8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하는 가운데 우리 믿는 신자들에게는 누구나 이런 욕망이 있습니다.
“내가 기도 좀 더 많이 하고 싶고” “성경을 좀 더 많이 읽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내 몸이 피곤하지만 않고, 졸립지만 않다면, 새벽 기도에도 매일 나가고 싶고, 철야 기도도 하고 싶은 것이 하나의 그리스도인 적인 삶의 바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나의 이상과 나의 행동이 일치되지 않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기도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더 나아가 부끄러워 합니까?
이것은 그의 마음 속에 기도가 참된 경건 생활의 필수불가결의 요소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 생활하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그 자신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의 하나의 덕목입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은 하나님을 향하여 창을 여는 생활입니다.
내가 기도한다는 것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해서 나의 창을 여는 것을 뜻합니다.
나의 마음의 창을 하나님을 향하여 열고 나의 마음 속에 있는 심정과 괴로움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며
“나는 어찌할 수 없사오니 하나님! 이것을 맡아 주시고 도와 주세요!”하고 의탁의 부르짖음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너희는 기도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기도할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히 밤중에도 새벽에도 홀로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강조하시며 자주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성경 말씀에도 예수님이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가르쳐 주시되 인간의 죄의 간교함과 무서움이 기도속에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시면서 모범적인 기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면전에까지 우리를 엄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대화하는 순간까지 우리를 따라 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순간까지도 죄는 우리를 놓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잘못된 기도, 기도하는 순간까지도 우리 속에 죄가 있는 기도이 모습을 지적합니다.
그것이 어떤 기도입니까?
첫째로, 외식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성경 말씀 5절에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외식한다”라는 말은 “가면을 쓰고 연극하는 배우”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진짜 얼굴을 안 보이고 자기의 진정한 마음은 없이 가면을 쓰고 단지 대사만 외우듯이 중얼거리는 기도, 관객이 보아 달라고 손짓, 몸짓, 발짓, 입질 다해가며 떠뜨는 기도.
이런 기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단지 자기의 인기와 자기를 찬양하고 남이 나를 “저 사람이 기도 많이 한다. 신앙 좋다”고 인정해 주기만 하면 족한 기도가 외식하는 기도입니다.
외식하는 기도의 모습은 누가복음 18장 9절부터 1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하면서 자신의 선행 목록을 열심히 낭독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지극히 낮추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사람 중 세리가 의롭다 인정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의 기도의 태도는 자리를 찬양하고 자기를 숭배하는 자기 중심적인 기도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시간까지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이 생각하면 자기 자신을 기쁘게 생각하는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이런 기도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 자신을 생각하는 기도, 나 자신을 높이는 기도,
물론 나는 나 자신을 높인 기도를 드린 적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대표 기도를 시키면 싫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 기도 시키면 교회에 안 올레요!”라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저녁에 자기가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 주보에 나오면 그 날은 예배에 빠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할 줄 몰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기도는 신자면 누구나 다 할 줄 압니다.
기도는 자식이 아버지께 나아가 “아빠! 나 할 이야기가 있어요”라고 말하듯이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하면 됩니다.
“오! 아버지!” 하고 부르기만 해도 하나님은 “그래 내 사랑하는 아들아!” 무엇을 원하니. 나는 너를 위해 나의 외아들을 죽이면서까지 너를 살려 내 아들로 삼았단다. 그런데 너를 위해 못해 줄 것이 있겠니?”라고 말합니다.
단지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을 못한다고 서로 발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들으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들으라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 자꾸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고 그들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가 대표기도하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기도 잘한다” “그 기도 은혜스럽다”라는 말을 듣기를 원합니다.
“기도 못한다”는 망신이라고 생각되는 말은 듣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가능한한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사용해서 기도하고 논리가 정연하게 일사천리로 줄줄 기도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기도를 원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말을 써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논리가 정연하게 일사천리하게 나오는데 입에 발동기가 달려 처음부터 끝까지 숨한번 안 쉬고 오토바이 처럼 “투투투투”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하고 말을 하고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해도 정말 감격해서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하고 부르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아름다운 말은 인간이 좋아 합니다. 미사여구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합니다.
분명히 기억합시다.
사람 들으라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은 안 듣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 교회에 국민학교 4학년에 다니는 아들을 가진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친구들이 자전거 타는 것이 너무 너무 부러웠습니다.
“나도 자전거를 타고 싶은데 아버지께 말하면 돈없는데 자전거는 무슨 자전거냐? 딴 생각말고 공부나 하라”라고 핀잔을 줄 것 같아 말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가 제일 말하기 쉬워서 할머니를 조르기 시작합니다.
“할머니, 나 소원이 있어요” “그래 그 소원이 무엇이냐?”
“내 평생 자전거를 한번 타보고 싶은 소원이 있는데 아버지께 잘 얘기해서 자전거 쯤 사줄 수 있게 해주세요”
이 할머니는 예수를 잘 믿는 할머니였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듣고
“나도 네 아버지께 말할 수 있지만 그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너의 아버지 마음이 감동이 되야 돼.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하나님께 기도하려무나. 그러면 너의 아버지의 마음이 감동되서 너의 자전거를 살 줄거야!”
할머니의 말을 듣고 이 아이는 일주일 내내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시켜 나도 자전거를 타게 해 주세요”
일주일 내내 기도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아버지가 직장에 나가려고 옷을 갈아 입는데 이 아이가 건너방에서 소리 내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시켜 나에게 자전거를 사게 해 주세요”
할머니가 “애야! 조용히 기도하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떠들며 기도하니 작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네 사정을 모를 줄 아느냐?;
그러지 이 아이가 “할머니! 그게 아녀요, 이 기도는 하나님도 들어야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먼저 들어야 돼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혹시 사람 들으라고 하는 기도는 없습니까?
“이 기도는 아무 집사가 들어야 돼!” 그 집사 들으라고 기도하는 사람 없습니까?
“이 기도는 정치가가 들어야 돼!” 그래서 하는 기도는 없습니까?
사람 들으라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은 안 듣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대화이지 사람과의 대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지 사람에게 나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 사람들이 초점과 시선이 모이는 장소에서만 기도하기를 좋아 했습니다.
그 당시에 매일 오후에 성전에서 희생제를 드릴 시간이면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이것은 “기도하라”는 나팔 소리입니다.
그러면 길가던 사람들이 발을 멈추고 서서 성전을 향하여 될수록 경건하고 거룩하게 기도합니다.
마치 오늘날 애국가가 흘러 나올 때 우리들이 길을 멈추어 서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기도가 다 끝났는데도 혼자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사람은 자신의 경건한 모습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보라 나는 얼마나 신앙 좋은 사람인가? 나는 얼마나 경건하고 훌륭한 사람인가?”
이러한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합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에게 보이려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에 보이려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은 안 보십니다.
이런 기도는 기도 그 자체를 무가치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듭니다.
특히 공중 기도를 인도하시는 분들은 회중 앞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아니라 회중을 향하여 기도하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엄격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중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많은 시간을 개인적으로 기도하지 않으시면 안됩니다.
자기 마음을 부지런히 성찰하고 나의 교만함을 꺾어 주시도록 하나님께 진실하게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기도의 생활이 전혀 없이 단상에서만 기도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이 경고하신 이 잘못된 형테의 기도를 하고 있는 것에 속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잘했다”는 칭찬을 듣지 못한다면 교인들이 나에게 좋은 평판을 해 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을 매혹시킬 좋은 말로 기도를 표현하려 애쓰지 말고 마음 가짐을 참되게 하여 기도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마음으로 참되고 성실하게 기도하는 것이 아름다운 말을 선택하여 기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미사여구를 사용하는 말은 아니지만 고통 중에 하나님께 울부짖는 가련하고 애끓는 영혼이 기도를 하나님은 더 원하시고, 그런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의 잘못된 기도의 또 다른 형태는 중언부언입니다.
7절을 보세요.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때때로 우리의 잘못된 생각은 나의 기도의 효험이 기도의 분량이나 특이한 기도 자세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고민하는데 “내가 기도를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하는 문제로 고민합니다.
“하루에 몇 시간을 기도해야 할 것인가?” “나는 새벽 기도회에 꼭 나가야 하는가?”
종교 개혁자 Martin Luther는
“하루에 2시간씩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중대한 일이 있을 때는 하루에 3시간씩 기도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하루에 2시간을 기도하지 않으면 그 날은 마귀에게 진 날이다.
나는 바쁘기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기도해야겠다.”
오늘 우리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릅니까?
기도는 많이 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기도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에 근신하여 깨어서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밤이 맞도록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기도에 투자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생각들이 때때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새벽 기도에 안 나가고 철야 기도에 참석 안하면 신앙이 없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새벽 기도회 때 다른 성도들은 아직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데 자신은 기도를 마치게 되면 자신이 믿음이 적은 것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아직 기도하고 있는데 목사님이 기도회를 먼저 떠나면 경건하지 못하고 기도의 능력이 없는 목사로 낙인이 찍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갖는 죄책감은 내가 기도를 안했다는 죄책감, 즉 하나님 앞에 충분할만큼 기도 생활을 안 했다는 것입니다.
기도 자체를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지 기도 생활을 많이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만 갖습니다.
물론 기도를 하지 않으면 죄입니다.
사무엘은 기도를 쉬는 것을 죄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를 위해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귀하고 값집니다.
그러나 기도의 양이, 기도의 시간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기도의 시간적 길이가 그의 경건을 측정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고, 시간을 길게 해야만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물론 기도를 위해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성없이 한시간, 기도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마음과 뜻을 다하여 기도하는 30분이 더 훨씬 낫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한다면 30분 기도하는 것보다 한시간, 두시간 기도하는 것이 더 낫습니만 주님은 아무 의미없이 단지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기도의 반복 그 자체를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기도는 응답될 때까지 하고 또 해야 합니다.
문제는 마음이 실려 있지 않는 기도, 의미없고 생명 없는 기도, 아무 생각없이 마음은 딴데가 있고, 입만 중얼 거리는 기도를 위한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먼저, 하나님께만 드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인정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면 우리들의 기도는 목적을 달성한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기서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는 했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외식하는 사람들의 기도하는 모습과 정반대입니다.
외식하는 사람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큰 길 어귀에서 또는 회당에서 기도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경건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임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은 기도할 때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는 뜻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도 없고 또 기도하는 중에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것은 자기가 칭찬 받으려고.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마음이 다른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면 인자하신 아버지가 응답하실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산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기 때문에, “내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을 다 받는 자”라고 확신있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압니다.
아들이 원하는 것도 압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구하기 전에 아들이 필요한 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아들이 구할 때 즉시 줍니다.
죠지 뮬러는 일생을 통해 5만번이나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어두 컴컴한 창고에서 열쇠를 잃어 버렸을 때에도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어린 고아에게 먹을 것이 필요합니다. 창고의 열쇠를 찾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손으로 창고의 밑을 더듬어 보니 그 열쇠가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어린 아이와 같은 신뢰의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를 하는데 기도에 대한 상당히 잘못된 태도가 있는데 우리의 기도라는 것은 기도가 시작되는 근거가 나에게 해결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꼭 어려움이 있을 때만 기도가 나옵니다.
그렇지 않고도 기도의 제목이 섬기는 예가 없습니다.
내가 평온한데, 내가 건강하고 먹고 살만하고, 자녀들이 말썽부리지 않고 공부 잘하는데 열심히 애타게 기도가 나옵니까?
그런 경우가 우리에게 별로 없습니다.
꼭 어려움이 생기면 그 때에 가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건강을 잃었습니다. 건강을 회복시켜 주십시요, 실질했습니다. 직장을 주십시요.
이러저러한 우환이 있습니다. 해결해 주십시요”
우리의 기도는 나에게 고통을 없게 해 주는 것, 닥쳐온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 정도 밖에 기도를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그 이상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이런 것을 해결해 주세요!’ 정도가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을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약속은 “네가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모두 네게 주겠다”는 여호수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같습니다.
밤낮 “먹고 자고 고통을 당하는 것을 해결해 주십시요’라는 것을 뛰어 넘어 하나님이 내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 제게 인생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일이 무엇입니까?”
“왜 나로 살게 하십니까? 왜 이 어려운 시대에!”
“제가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해야 될 이 무엇입니까?”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해야 될 일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일을 하게 되고 그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성도들에게 기쁨이 있고 자랑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기도가 요청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뿐만 아니라 평안할 때도 항상 말입니다.
골방에 무릎 꿇는 한 무릎 한 무릎을 통해서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하십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의미를 되새기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외식하는 기도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중언부언의 기도를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런 기도를 드려 사람들로부터의 상급과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과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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