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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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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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복이 있나니

본문 : 마태복음 5장 1-13절

설교 : 백의흠 목사 (엘림교회)


프랑스의 한 젊은이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 갔습니다.
그는 자기의 정서적 불안과 우울 증세를 말하고 그 처방을 물었습니다.
의사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던 중에 마치 그 도시에 유명한 희극 배우가 와서 쇼를 진행하니 관람하라고 권유하였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힘없이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병원 문을 닫고 나가며 신음을 토하듯 중얼거렸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나인 걸"


우리는 이 짤막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구합니다.
행복하기 위해 자신의 전 삶을 투자합니다.
도대체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시인의 말처럼 “저 산너머 먼 곳에 행복이 있다기에 찾아 갔다가 눈물만 흘리고 돌아오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 행복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들은 행복을 갈망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예의가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축복"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기도원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도 꽉 차 있습니다.
정초에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에는 만여명 이상이 북적대고 하늘산 기도원도, 일산의 아멘 기도원도 수천명이 모여 열심히 기도하며 은혜를 받습니다.
왜 이렇게 모입니까?
물론 일년 첫 날을 주님께 드리면서 기도하며 일년의 계획을 설계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신년 축복 대성회를 통해 금년 일년도 큰 축복을 받기 위해섭니다.
제가 연초에  아멘 기도원에 갔을 때 욥 8:5-7의 말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의 말씀을 가지고 축복 받는 비결을 설교합니다.


성경은 ‘축복'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고 또한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의 내용에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는 축복입니다.
이 ‘복'이라는 단어 안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약속하신 모든 은혜를 다 집어 널 수가 있습니다.


우리 가운에 복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설교할 때도 축복 받는 비결을 이야기 하면 설교하는 사람의 마음도 가볍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밝고 명랑합니다.
저주 받는다는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옥에 관한 설교를 듣고 기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복을 좋아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은혜를 가장 많이 받는 것이 어떤 설교인 줄 아십니까?
‘간증설교'입니다.
“예수 믿어서 사업 잘 되고, 자식 축복 받고 믿음으로 금식 기도하여 사형 선고를 받은 병에서 고쳤다고 하면 “아멘' “아멘"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또 간증만큼 나의 마음 속에 감격과 전율을 가져다 주는 것이 드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축복의 개념을 잘못 심어 주는 데 있습니다.
예수 이름이 요술 단지, 예수가 수단으로 변했습니다.
모든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고 또한 그 분의 빛에 비추어서 모든 진리를 해석하여야 합니다.

구약도 신약도 이미 계시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말세에 돌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말세를 사는 우리 교인들은 위기 의식을 가지고 주인을 기다리며 사는 청지기의 생활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희생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어떻게 구약적인 물질관이 일방적인 축복으로 대두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구약적인 물질의 축복을 하나님이 모든 신자에게 추시는 축복인 것처럼 가장하여 교인들을 유혹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비추어 보면 구약의 물질관은 그림자입니다.
진정한 실체의 축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복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처럼 축복데 대한 굶주림으로 가득차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산에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6,7장을 산상 보훈 혹은 산상설교 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산상 보훈은 유명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도 힌두교도인이었지만 산상 수훈을 너무 좋아 했습니다.

특히 3절부터 10절까지는 그 유명한 팔복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똑같은 내용이 누가복음 6:2-26에 이옵니다.

우리가 이 팔복을 가지고 우리 믿는 자들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며 누가 복된 사람인가?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팔복을 강해하기 전에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축복 개념을 짚고 넘어 가겠습니다.

히브리 저자는 초대 교회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히 5:10) 있음을 경고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을 향해 날카롭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서의 영적 무지에서 오는 잘못된 신앙은 교회 밖에서 오는 박해의 세력보다도 훨씬 위험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오늘날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왜곡된 신앙 가운데 잘못된 축복관은 한국 교회를 순수한 말씀에 바탕을 둔 교회에서 크게 변질되게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헌금 문제입니다.​


헌금을 왜 드린다고 생각하십니까?

헌금이 무엇입니까? 

한국의 성도들의 신앙 속에 가장 깊게 뿌리박고 있는 잘못된 헌금관은 헌금을 축복받기 위해 드린다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고 싶으면 신앙의 씨앗을 심으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갑절을 주신다"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헌금은 축복받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이란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마음과 몸을 바치는 뜻에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런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헌금은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돈이 없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헌금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 50:10-14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먼저 바치는 자의 마음의 제사, 곧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는 참된 헌금 자체의 액수보다 헌금 하는 사람의 정성과 진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부의 엽전 두 렙돈을 주님은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성도들의 헌금 경향은 축복을 받았음으로 감사한 마음에서 바치기 보다는 축복을 받기 위해 바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자기가 하고 있는 가게에 에어컨이 있었는데 용량이 적어 쓸모없게 되자 교회에 가져와서 사무실에서 쓰라고 바쳤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파시지 뭘 가져 왔어요?”

이 집사님의 말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이것을 축복의 씨앗으로 심고 싶습니다. 그리하면 내게 필요한 더 큰 에어컨을 하나님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절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날 지경에 빠져 있을 때 어는 목사님이 와서 1억을 내가 1억을 하나님 앞에 바치면 암이 낫는다"

두 달 가까이 찾아 와 식구들을 괴롭혔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의 씨앗이 헌금이고 그것이 더 큰 축복을 받는 첩경이라며 기독교가 불교의 시주와 조금도 다른 것이 없습니다.​


십일조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들 말라기 3장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복을 받기 위한 십일조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만 인용하여 “드리면 받는다"라는 인과 법칙을 적용할 때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 신앙의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어느 교회 청년이 목사님을 걸어 고소를 제기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목사님이 십일조하면 반드시 물질의 축복을 갑절로 받는다고 해서 오랫동안 십일조를 바쳤으나 물질의 축복이 내려질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의 헌금을 다 돌려 달라는 반환 소송이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말라기의 십일조의 교훈은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앞에는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5절) 타락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교훈이 나옵니다.

이 교훈 다음에 주어진 부수 교훈입니다.

그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7절) 물으매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도적질하는 것을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에 강조점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이스라엘의 불의에 대한 회개와 또 다른 하나는 어려운 사람을 학대하여 물질 관리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의 표로서 십일조를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신앙과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가 없는 어떠한 십일조 헌금도 무의미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회개함이 없이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하늘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말라기에서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가장 큰 축복은 3잘 10절에서 시작되어 17절에서 성취됩니다.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리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라"고 하신 이 말씀속에 성취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고 “아들처럼 아껴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십일조를 내면 복을 주시느냐?  안 주시느냐?의 문제로 따지는 것은 유치한 문제입니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아빠, 나 오늘 밥 줄거야. 안 줄거야!”하고 따지는 것과 똑 같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십일조를 수도꼭지에 비교하여 십일조를 드릴 때는 수도 파이프가 수원지에 연결되었고 수도꼭지도 활짝 열렸으므로 이제부터 축복이 꽐꽐 쏟아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이고 시원한 축복의 소리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바른 십일조는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십일조는 모든 소유가 주의 것인줄 알고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한 마음으로 조건없이 주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므로 이미 수도꼭지 정도에 비교할 수 없는 수원지 이상의 축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일조의 참 뜻을 깨달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십일조 이상의 물질을 바치며 주를 섬겼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고”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습니다" (고후 8:2)​


초대 교부 이레네우스도 십일조에 대해 언급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사업을 위하여 모든 재산을 바칠 각오를 하고 필요할 때는 재산의 가치 있는 부분을 즐겁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바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라는 것은 모든 소유가 주의 것인 줄 알고 감사함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사업을 위해 더 많은 돈이 요구되면 십일조가 아니라 그 이상도 바쳐야 합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을 십일조는 구약의 제도이니 신약 시대는 반드시 드릴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잘못입니다.

마 23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실 때 십일조 드리는 자의 정신 자세의 잘못된 점을 지적 하셨을 뿐이지 십일조를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 헌금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일조의 양적인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박하와 회향과 근채까지 무게를 따져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본받아야 될 아주 정확하고 철저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선을 버렸습니다.

이것은 외적 종교 활동에는 분주하면서 내적 영적 생활을 등한히 하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책망한 것입니다.

정확한 십일조의 구벽에 앞서 자신의 성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바른 성결된 생각을 하고 그리고 바른 십일조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만 바치고 나머지는 내것이기 때문에 십의 아홉은 마음대로 쓴다는 생각은 십일조를 바치지 않은 만큼 잘못입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많은 사람들이 십의 일에는 의무감을 가지고 바치지만 십의 구는 해방감을 가지고 마음대로 씁니다.

이것은 물질에 대한 청지기적인 생각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생의 전부, 내 물질 전부가 주의 것입니다.

이것은 청지지인 나에게 잠시 맡겨준 것에 불과합니다.

10의 일이 아니라 10의 10이 전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청지기로서 잘 관리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바른 헌금관을 가지고 바른 헌금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축복에 대하여 잘못 해석되고 있는 성경 구절을 찾아 보겠습니다.

먼저. 신명기 28장 1절에서 6절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많은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인용하여 형통과 부유한 것이라말로 축복의 증거이고 우리가 마땅히 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축복받는 변치 않는 법칙을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 그러면 너희가 그렇게 바라던 소위 말해서 잘 되는 복도 주마”​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좋아하고 보이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중요한데 우리는 그 중요성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가 그것의 중요성을 모르면 보이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잘 섬겨라.

여기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기기를 원하시는가?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영적인 복, 육신적인 복이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축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받는 축복은 복의 근원이 되는 아브라함에게 주는 축복에 근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축복은 아브라함의 씨에서 장차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갈 3: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물질의 복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통한 영원한 복을 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스라엘이 받는 형통과 물질 축복은 구속의 언약 관계에서만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축복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예표적 축복은 오늘날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적 차원에서 눈에 보이는 축복으로 적용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제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약에 약속된 모든 축복을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머리가 된다'는 축복은 반드시 출세하여 남의 위에 올라간다는 것으로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함이라"

“너희 중에서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나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0:26-29)

우리 신자들은 세상의 ‘높은 자리’만을 축복으로 보지 않고 ‘섬기는 종'의 삶도 큰 축복으로 보는 것입니다.

대접받는 것도 좋지만 남을 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더큰 축복이며 기쁨입니까?​


다음은 빌립보서 4장 13절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의 이 신앙 간증이 흔히들 적극적 사고 방식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요절이 되었습니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군생활할 때 군대 표어가 ‘하면 된다'였습니다.

경례할 때도 “필승. 하면 된다"입니다.

“안되면 되게 하는 것'이 군대 법칙인데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모든 것이 다 된다는 것’이 신앙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달나라까지 여행할 수 있으니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가능성의 철학'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크게 강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사상은 물질주의와 결부되어 우리의 이기심에서 출발합니다.

여리고성이 믿음으로 함락되었으니 오늘날 어떤 집을 소유하고 싶을 때 믿음으로 구하면서 그 집을 일곱바퀴 돌면 조만간 그 집은 내 집으로 함락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위 “땅 밟기 작전"을 폅니다.​


그러나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말한 것은 그런 이기적 동기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옥중에서 궁핍하여 고생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에바브로 디도를 보내어 선물을 전합니다.

그 때 바울은 그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사랑을 감사하면서 자기는 그런 선물을 받지 않아도 살아 갈 수 있는 비결을 가지고 있다고 그들을 위로합니다.

그 비결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가장 괴로운 환경 속에서도 만족하기를 배운 비결이 바로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이 말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신의 적응 능력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극적 사고 방식에서 말하는 자신감이 아닙니다.

‘할 수 있다'는 바울의 선언문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원하시면 내가 비록 배고프고 빈궁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만족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가 나에게 ‘신령한 힘'을 주신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빌 4장 13절을 인용하여 신앙만 가지면 모든 것이 다 된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내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한 구절만 더 살펴 보겠습니다.

요한 3서 1장 2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구절을 한국 교회에서는 ????박자 축복' 혹은 ????박자 구원'이란 이름으로 널리 쓰여지고 있습니다.

‘먼저 네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라'​


본문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엉뚱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영혼만 잘되면' 그래서 ‘범사가 잘 되고' 그리고 ‘육신도 강건해 진다'고 그저 잘되게만 하여 달라고 기도 드리기도 하고 또 빌기도 합니다.

그래서 돈 벌기 위한 특별 안수 기도를 받기도 합니다.

범사에 잘되어 돈만 많이 벌면 그것이 가장 큰 축복인 줄 알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 그것은 잘못은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것입니다.

그것도 좋은 축복입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야곱도 부자였고 욥도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부자 아리마대 요셉이 만든 돌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를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은 금물입니다.

부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구할 수 있고 그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때에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하며 그 때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약속이 이루어 집니다.

예수를 믿으면 형통하여 돈을 벌게 되고 부자가 되지 못하면 신앙 생활을 잘못한 것이라는 공식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고 가난하여지고 어려워진 성도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는 사도 바울은 대표적인 예로 들 수가 있습니다.

그는 적신같은 가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노래 했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교회 안에서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고'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 자랑하던 부가 교회에서는 세상에서 처럼 인정받지 못함을 깨닫고 오히려 겸손해 진 그것은 더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부해진 사람'들에게 겸손을 가르쳐 스스로 낮아지게 하기보다 축복 받았다고 높여 주기만 하고 있습니다.

‘부한 사람'의 소리가 교회 안에서 너무 크게 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번영 신학으로 발전해 나가면 교회는 이미 교회로서의 기능을 잃어 갑니다.

번영을 약속하여 모여든 신도는 박해로 인하여 번영이 없어질 때 다 제 길로 가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구속의 복음을 믿는 성도는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신앙은 지키고 빛날 것입니다.

요한 3서 1장 2절의 본래의 의미는 1절에서 말한대로 사랑하는 가이오를 위하여 드린 간구입니다.

여기서 ‘그의 영혼이 잘 됨과 같이'라는 말은 그의 영적 축복이 이미 알려진 사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이오가 어떤 사람입니까?

3절에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5절에는 ‘나그네들에게 신실되게 행하므로 그들이 교회 앞에서 그의 사랑을 증거하기까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이 나그네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하며 전도하는 선교사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이오는 자기의 물질을 아끼지 않고 바쳐 선교 사업을 도왔습니다.

이런 신실한 가이오에게 장로 요한은 영혼의 축복을 주신 것처럼 물질의 축복의 건강의 축복까지 주실 것을 간구한 것입니다.

요한 삼서의 이 귀절은 ‘삼박자 구원’이나 ‘삼박자 축복'의 번영 신학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적인 축복을 구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보다 잘 살기 원하며 더 좋은 직장과 똑똑한 자녀를 갖고 싶고 우리 주위의 환경 요소가 좋아지기를 원하는 인간의 소박한 복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는 물질적 축복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물질적 축복에 너무 얽매여 영적인 축복을 등한시하면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을 구할 때 주님께서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축복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앞으로 축복의 산을 오르며 팔복을 강해하는 가운데 진정한 행복의 본질들을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축복에는 두가지 주목할 만한 특성이 있다는 것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여기서의 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인격적인 복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의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여기에는 소위 우리가 말하는 행복의 조건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의 모든 행복의 내용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인격이 변화되고 그의 삶이 그리스도를 닮아 간다면 그들에게 주님께서 선포하십니다.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두번째로 이 팔복이 영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이나 애통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육적인 성향은 온유함보다 고집을 원하고 있습니다.

의보다 자기의 욕망을 원하고 있습니다.

긍휼이 여기기 보다는 복수를 원하고 있습니다.

청결하기 보다는 부패를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평화보다는 전쟁을 핍박받기 보다는 타협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 복을 육에 속한 사람은 따를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추구할 수 있는 행복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복이 있으라!”

그러나 이 모든 복의 추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죄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교회는 출석하지만 아직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거듭 나시길 바랍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복이 있으라"외치는 이 음성이 우리의 심령과 생활 속에 충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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