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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심령이 가난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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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심령이 가난한 자

본문 : 마태복음 5장 2절

설교 : 백의흠 목사 (엘림교회)


팔복은 마치 음악의 도레미파솔라시도의 팔음계가 신비한 조화를 이루어  행복의 멜로디를 연주하는 듯합니다.

어느 누군가가 말하기를 ‘팔복은 등산하듯이 축복의 산 정상으로 등정하기 위하여 산을 오르며 여기 저기에 치는 여덟 개의 캠프와 같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들과 함께 주님을 바라보며 축복의 산에 등정하는 가슴 설레이는 모험을 시작합시다.


이 팔복 가운데 첫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입니다. 

팔복에는 매우 뚜렷한 순서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 팔복의 순서를 아무렇게나 정해 놓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영적 논리적 순서가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팔복에 가장 처음에 오는데 이것이 처음에 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천국 시민의 기본 자격이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과 천국 시민의 기본 특징은 심령이 가난한 것이기 때문에 이 복이 팔복 중에 가장 먼저 옵니다. 

이 복은 뒤이어 오는 모든 복의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우리 성경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원문에는 “복이 있도다'라고 시작됩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복이 있도다 마음이 가난한 자여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여기서 가난은 물질의 가난을 뜻하지 않습니다.

“부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세상에서 흔히 듣는 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표현에서 참 복의 영역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계, 곧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가난은 물질의 가난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이 물질의 가난을 예찬 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가난한 것은 좋은 일이 못됩니다.

주님은 마음의 가난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히려 게을러서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은 자신과 가족과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가난 자체를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달란트 받은 자가 게을러서 일하지 않고 그대로 땅에 묻어둔 일에 대하여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마음에 가난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질이 가난하면서도 마음은 가난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물질은 부유하면서도 마음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니고데모를 보세요.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높은 계급과 신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명 나사렛 사람 예수 앞에 나와서 그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물음을 던질 만큼 마음이 가난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을 보세요.

그도 또한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때 아무도 예수님께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홀로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를 위해 만들어낸 새 무덤에 장사지낼 만큼 마음이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부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먹을 않은 곡식을 쌓아두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한 것에만 집착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네 영혼을 오늘 밤에 도로 찾으리라는 절망을 들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계 2:8-9)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보세요 (3:14-18)

“라오디게아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우리 주님께서는 가난하여 벌거벗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것은 물질이 가난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첫째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을 받아들임 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자신의 추한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우리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을 만나러 성전에 들어 갑니다.

그 날 하나님은 자신의 생생한 모습을 영광스럽게 그 성전에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천사들의 찬송소리와 함께 주의 영광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그 때 이사야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는 순간 땅에 거꾸려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외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5)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때 상대적으로 죄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놓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던 날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고기를 전혀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서 “베드로야 그물을 내려 깊은 곳에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바다에서 한평생을 살아 온 사람입니다.

경험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노력으로 완전히 실패한 베드로는 그 낯선 사람의 말을 그대로 믿고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엎드려지며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과의 만남을 단순한 인간과의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접하는 순간 그는 상대적으로 죄많은 자기의 모습을 발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 자기가 죄인임을 발견합니다.

이런 철저한 죄인의 인식은 가난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여기서 가난이란 말은 “철저하게 가난하다"는 의미입니다.

철저하게 가난한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살 수 없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자비의 손길이 있어야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도 우리의 힘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없이는 우리는 단 1분도 살아 살 수 없습니다.


구원 문제를 생각해 보세요.

누가 구원 받기 제일 힘듭니까?

마음이 부유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철학과 주장과 선입관으로 채워진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의로 채워진 사람입니다.

주께서는 이렇게 자신의 의로 꽉찬 부유한 마음에 들어가서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전도하다 보면 어떤 사람이 제일 전도하기 어렵습니까?

지식이 많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부유하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복음을 잘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좋고 깨끗하고 바른 사람일수록 예수를 잘 안 믿습니다.


사람들이 자랑하는 ‘인간적인 부요'라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러운 걸레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참으로 발견한 사람은 구원의 길을 자기 스스로 자기 안에서 찾지 않고 밖에서 찾습니다.

그 때부터 주님은 이 사람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때부터 십자가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기 시작합니다.

진정한 가난은 죄인인 자기 모습을 발견하는데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너여! 천국이 너희 것이로다"


두번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발견했지만 주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이것도 죄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연약하고 병든 것을 알며 또 죄인인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하는 것은 가장 무서운 오만입니다.

가난한 마음이란 밖으로 부터 오는 도움을 겸손히 받아 들일 줄 아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응답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하나님이 붙드셨을 때 그는 우리에게 기대를 거십니다.

그 기대속에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며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줄 아는 사람들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우리지만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쓰임을 받을 때 크게 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려 할 때 살인죄를 범하고 멀리 미디안으로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아갈 때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고 참 지도자가 됐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마음과 가난하지 못한 마음을 가진 두 사람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교만한 마음의 대표자인 바리새인과 가난한 마음을 가진 세리였습니다.

이 두사람이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를 옳게 보이며

“주님, 저는 일주일에 한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도 냅니다. 저는 저 세리와는 다른 종류의 인간입니다.

저는 하나님도 잘 섬기고 정의파입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주님 주는 주 앞에 아무 것도 내어 놓은 것이 없습니다. 이 불쌍한 죄인을 보십시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만일 세리가 여기서 그쳤다면 이것은 가난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는 나아가서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요"라고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 들일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이 정한 가난한 마음인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까?

주님의 도움을 받아 들입니까?

그런 사람에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너여, 복이 있도다. 천국이 너희 것임이로다"


셋째로, 심령이 가난한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4)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 자신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너희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의 최고의 미덕입니다.


저는 겸손하려고 무척 애를 쓰는데 도무지 겸손해 지지 않아 고민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조잘 거리기를 좋아하고 나물 거려서 집에서 누나들이 “좁쌀 영감" “첩지"라고 합니다.

그래도 계속 입을 나불거기면서 자랑만 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러다가 내가 ‘교만'해져서 않되겠다고 생각해서 내 손에 “겸손'이라고 크게 쓰고 하루 종일 “겸손, 겸손"만 중얼거리고 다입니다.

그러다가 또 겸손하지 못했던 일을 발견하면 “요 주둥이" “요 머리"하면서 때렸습니다.

그래도 도무지 겸손해 지지 않아 이것이 저의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겸손해야만 합니다.

겸손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죄가 하나도 없는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예수님도 필요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은 저의 것이라"


주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있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자기들의 죄에 대해 깊이 깨닫는 자들입니다.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한 자들입니다.

자기 스스로 지혜롭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므로 하나님만 바라 봅니다.

그들은 부유하지도 않고 재물이 풍부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비참하다고 느끼고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헐거벗은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든 자들이 복있는 자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가진 재물이 넉넉치 않더라도 우리는 복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모습이 구차하고 가련하게 보여도 복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김으로 주님의 도움만 구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심령이 가난한 마음으로 변할 때 천국을 소유하는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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