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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긍휼히 여기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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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긍휼히 여기는 자

본문 : 마태복음 5장 7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최근에 기독교의 위험한 혼합주의 모습이 보입니다.

전에 로마 바티칸에서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이 모여 세계 평화를 위한 모임과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이 지구는 핵무기의 공포에 의해 위협받고 있으며 자원 고갈, 공해로 말미암아 언제 멸망 받을 지 모르니 세계의 종교 지도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인류를 멸망에서부터 구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20세기의 최대의 역사 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도 “오늘날의 문명이 위기는 사상의 분열, 특히 종교간의 대립에서 오기 때문에 파멸로부터 문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각 종교간의 대화와 화해를 통해 가능하다”고 예언했습니다.

종교간의 대화는 최근에 와서 에큐메니칼 운동과 함께 더욱 모색되어지고 있고 통일교에서도 그들 나름대로 다른 목적으로 이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여러 해 전에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각 종교계 지도자들이 모여 대화의 첫 시도를 통해 상호이해를 증진시키려 힘쓴 일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도 인천 간석동 성당에서 강신부님은 불교의 스님을 초청하여 설교대신 불법을 들었습니다.

멀지않아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신에 부처를 찬양하는 날이 올까 봐 두렵습니다.

왜 이런 모습들이 나타납니까?

세상 사람들은 ‘모든 종교는 다 비슷하고 다 같은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 종교에는 일치점과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흔히들 이에 대한 대답으로 모든 종교의 핵심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말하고 불교에서는 자비를, 유교에서는 인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결국에 한가지가 아니겠느냐고 합니다.

이 사상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들어 왔습니다.

“종교는 다 같은 것이 아니냐?”


제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학생들과 성경 공부를 하면서 깜짝깜짝 놀랍니다.

많은 학생들이 기독교 믿어도 천국 가고, 불교 믿어도 극락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꼭 기독교를 믿어야지 구원 받나요?” 하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 외에는 어떤 종교나 선한 것에도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와 유교의 자비와 인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나 다른 종교는 인간에게서 시작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의 사랑이나 다른 종교에서는 자기 완성을 위한 표현으로서의 자비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부터 사랑을 받아 죄악에서 구원 받은 그 사랑에 감격해서 이웃을 사랑하지만 다른 종교는 자기가 복을 받고 극락에 갑니다.  

기독교에서는 행동 이전의 동기를 중요시하나 다른 종교에서는 자비스러운 행동 자체를 강조합니다.


오늘 성경은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섯번째로 말씀하신 긍휼이 여기는 자의 복은 그 자체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은 첫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로 부터 4번째 복 의의 주리고 목마른 것을 경험하는 자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기 까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먼저 그 마음이 가난하여 지고 죄를 통애하고 자복하여 온유한 심정으로 되어 자신의 영혼 속에 그리스도의 의를 가득히 체험 받은 경험이 있는 거듭난 자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영혼이 가득히 배부름을 받는 그 축복의 경험을 누릴 수 있어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긍휼은 의를 전제로 해서 의가 있을 때 비로소 생깁니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축복에 대해서 교훈하시고 그 다음에 긍휼을 말씀하십니다.

의가 없는 긍휼은 값싼 동정이나 자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반대로 긍휼이 없는 의는 기계적이고 냉혹한 법에 불과합니다.

의와 긍휼은 결코 분리 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만일 의만 있고 긍휼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오래 전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미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모습은 폭군과 같습니다.

반대로 우리 하나님께 긍휼이 있는데 의가 없었다면 인류는 불법과 죄악으로 가득찬 혼돈 속에서 스스로 멸망당해 버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만 있고 긍휼이 없다면 그 하나님의 모습은 폭군과 같고 긍휼만 있고 의가 없다면 하나님은 무책임한 역사의 방관자가 됩니다.


의가 있는 하나님은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긍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긍휼이란 말의 근본 뜻은 ‘죄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거나 징계를 받아 죽게 된 사람을 다시 회복시키고 살리게 하는 도움’을 뜻합니다.


긍휼이라는 말의 헬라어 어원적 뜻은 ‘비참한 상태속에 있는 사람을 오히려 불쌍히 여겨서 그를 돕는 미덕'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동정은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을 말합니다.

단순히 어떤 사람을 보고 ‘불쌍하다. 도와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나의 마음 속 깊이까지 들어가 이웃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랑을 강조합니다.

고통당하는 자의 마음 속에 내 자신을 대치시켜 그와 함께 동일시하며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단순히 불쌍히 여기거나 용서한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보인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얄미운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쓰러졌을 때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으나 오히려 사마리아인이 그를 끝까지 보살펴 참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긍휼은 단순한 구제 운동이 아닙니다.

고통 당하는 자 속에 들어가 그의 고통에 같이 참여하는 마음으로 도와 주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 있던 위장취업 문제를 보세요.

그 방법은 찬성하지 못하지만 그들의 순수한 마음과 열정, 자기를 포기하고 불쌍한 여공들과 같이 고통을 겪어야 하겠다는 그들이 정신은 높이 칭송해야 합니다.

자기의 출세와 부귀를 버리고 자신을 희생하며 불쌍한 사람들과 같이 아픔을 겪는 그들의 모습은 대단합니다.

사회가 이것을 감당해 주지 못할 때 큰 불행이 옵니다.

더구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정신을 받아 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는 제정 러시아의 멸망을 기억하고 있고 있습니다.

러시아 제국 말기에 많은 지식인들이 러시아의 폭정과 부패에 항거하여 자기 자신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이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인구의 95%가 되는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감당못할 때 재정 러시아는 무너지고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어떤 문호가 추운 겨울날 길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어떤 거지가 구걸을 하였으나 마침 돈이 없어 거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빈 포켓을 확인한 후에 거지에게 “미안하오, 친구. 오늘은 내게 돈이 없으나 후일을 약속하오"하며 거지의 손을 잡고 위로할 때 그 거지는 오늘에야 그 어떤 거액의 돈을 받은 것보다 사람다운 대접을 받은 날이라고 기뻐하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을 베풀 때 어떻게 베푸는가의 문제는 무엇을 얼마나 많이 주느냐? 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긍휼을 베룰어야 할까요?


우리는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여기셨나를 생각해 보세요.

내가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대우하시고 성도되게 하셨는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격도 없고 하나님을 원망하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무조건 용서하시고 죄없다 하시며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의 시점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빚을 많이 진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서 용서의 교훈을 가르칩니다.

빚을 많이 진 사람이 하루는 주인에게 와서 그에게 갚을 능력이 없다고 사정합니다.

주인은 그 사람이 하도 불쌍해서 일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갚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겨우 백데나리온 빚진 동관에게 욕을 보이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일만 달란트와 백데라니온은 비교가 안 됩니다.

우리 나라 돈으로 계산하면 백데라니온은 천만원 정도이지만 일만 달란트는 수천억원입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

이 사실이 주인의 귀에 들어 갔습니다.

그 주인이 그 사람을 불러서 말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빛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기지 못하느나?”하면서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졸에게 붙였습니다.


예수님은 도저히 갚을 수도 없고 용서 받을 수 없는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죄악으로 말미암아 파멸과 지옥에 둘어 갈 우리를 끌어 올려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형제의 작은 허물과 티를 용서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영국의 종교 개혁 시대에 영국 국민에게 가장 존경 받는 Thomas More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 국왕 헨리 8세의 종교 개혁 정책에 반대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있는 재판관을 향하여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재판관이시여 내가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도록 허락해 주십시요.

친구여 나는 당신과 나의 관계가 바울과 스데반의 관계가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스데반을 죽였지만 지금쯤 하늘나라에게 이 두 사람은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있을 것이요.

그대가 나에게 죽음을 선고하지만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구원을 함께 누리는 친구가 되기를 바라오"

토마스 무어경의 감격스런 선언을 듣고서 재판관은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사형을 언도했는데 그대가 나를 선대하는 이유는 무엇이요?”

토마스 무어경이 대답하기를 “주께서 나에게 먼저 긍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영국의 대 문호 셰익스피어 도 ‘베니스의 상인'이란 책을 통해 긍휼을 아름답게 묘사하였습니다.  

 “긍휼은 결코 억지로 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고요히 내리는 빗방울처럼 하늘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긍휼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다 같이 축복한다"


그렇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다 같이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그런데 이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에베소서 2장 4절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가리켜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을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도 시편 86편 15절에서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긍휼은 주님의 성품 입니다.

이 하나님의 제일 잘 나타난 곳이 십자가입니다.

죄인을 위해 죽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야유와 조소와 비난을 퍼 붓는 사람들을 향해 드리던 주님의 기도 속에서 우리는 긍휼에 찬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긍휼은 주님 자신의 성품입니다.

이 주님의 긍휼한 성품이 죄인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을 때 우리 성도들에게 나타납니다.

한 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을 때 그에게 이식되는 성품이 긍휼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기도할 때 좋아하며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이나 은혜, 긍휼 같은 단어입니다. 

기도할 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혹은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랑과 은혜와 긍휼은 하나님의 품속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의좋은 세자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아가페 사랑의 본질은 상대방이 유익을 위하여 가장 소중한 것을 조건없이 주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호의"입니다.

예를 들면 구원의 사건을 생각해 보세요.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긍휼'은 은혜와 반대로 ‘당연히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들에게 저주는 마땅히 주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저주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긍휼'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랑이 애인을 방문하는 친구와 같은 것이라면, 긍휼은 병자를 방문하는 의사와 같은 것이다"

또 “은혜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애정이라면 

긍휼은 죄의 결과로 비참한 상태속에 놓여 있는 사람을 향한 애정이다"

긍휼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긍휼은 우리의 신앙 생활 여정에도 계속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죄를 범하는 연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이여 이제는 나를 긍휼히 여겨 주소서!”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는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만 합니다.

긍휼을 베푸는 인격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완성해 나아가야 할 인격의 덕목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탁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그러면 우리는 누구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까?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긍휼은 대상이 누구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신분이나 그가 누구냐를 보지 않고 절대 도움이 필요한 그 자체를 보는 것이 긍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불신자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는 자들에게는 친절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냉혹합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이 죽으면 “참 안 됐다"라고 말하면서 불교 신자가 죽으면 “거 봐 우상 섬기더니 그렇게 죽잖아"하면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이 목자 없이 유리하는 불쌍한 양떼로 여기셨습니다.

주님이 없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에 파멸해 가는 그 영혼들을 주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떻게 생각합니까?

상인들은 사람들을 대할 때 돈으로 생각할 지 모릅니다.

국회의원들은 사람들을 한 표로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우리 나라에 크고 좋은 학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학교들의 대부분이 학생들의 등록금을 가지고 크게 성장했습니다.  

물론 재단에서 돈을 많이 투자해서 크게 발전한 학교도 있지만 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학교는 학생들로 인하여 크게 됐습니다.

옛날에는 돈만 갖다 주면 무조건 입학시키고 돈만 주면 졸업장을 주는 학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풍자적인 말들이 있습니다.

아침에 수많은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하는 것을 지켜 보고 있던 학교 이사장이 하는 말이 

“야, 저 돈들이 수없이 굴러 들어 오는구나!”


어느 날 미국의 시카고의 번잡한 거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다가 웁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웁니까?”

“나는 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없이 그 영혼이 멸망을 향하여 걷고 있는 모습을 쳐다보니 너무 안타까워서 나도 모르게 엉엉 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아침마다 버스와 전철에서 밀리고 밀리는 이 수많은 인파를 우리를 단순히 과잉 인구로만 처리해 버리고 말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 없이 죽어가는 영혼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불쌍히 여길 것입니까?


주님은 사람들을 보시며 유리하는 양같이 불쌍히 보셨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없는 영혼들에게 이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지옥을 향해 걷고 있는 영혼들을 보며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만 합니다.

불난 집에서 살려 달라고 아우성 치는 사람들을 보며 안타까워 하면서 곧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 들어 갈 사람들을 보면서는 왜 안타까워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스데반의 사건을 보세요.

자기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그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들이 하는 것을 모르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원수를 향해 기도하는 이 스데반의 모습은 누구에게서 배운 것입니까?

그는 긍휼이 여기는 이 성품을 주님에게서 배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마세요.

그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고 헐뜯는 사람에게까지 관심을 보이며 사랑하세요

그 사람은 반드시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오래 전에 저의 여동생이 저에게 들려 준 말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빠, 나는 오늘 아주 귀한 것을 깨달았어!’

동생이 아는 집에 갔다가 미국 사람을 만났는데 한국에 파견한 주한 미군 소령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이가 36살인데 결혼을 안 했습니다.

왜 안하냐면 “자기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나니까 자기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에 나오니까 자기가 해야 될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전부 월급이 150만원 정도 타는데 자기는 먹을 것 30만원 남기고 전부 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고 홀트 아동복지에서 보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을 돕기 위해 부업까지 합니다.

그 사람의 말이 “내가 해야 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없다고 일평생 독신으로 지내겠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고아들을 도와 주다가 그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아니라 그들을 직접 우리가 데려다 기르자 하면서 입양합니다.

아직도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따르며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의 친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 친구는 자녀를 한명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말이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은 이 하나로 충분해 이제 하나님이 나에게 주는 축복을 내가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돌려 주자. 그래서 나는 이제 고아원에서 아이를 데려다가 나의 자식으로 키우겠다"고 말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저의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래 너는 나보다 낫구나, 전도사라고 하는 나보다 더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실천하고 있구나"

저도 깊이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사랑을 약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나타야 합니다.

윗사람에게 값비싼 선물을 드리는 것보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양말 하나라도 주는 것이 더 귀합니다.

주님으로 부터 받은 이 긍휼을 긍휼이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타냅시다.

긍휼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실제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주위의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있나 살펴보고 돌아 봅시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부자가 되면, 돈의 여유가 있으면 도와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자가 되면 돈이 더 아깝습니다.

돈을 더 모르고 싶어 합니다.

가난한 상태에서 남을 도와 주지 못하는 사람은 부자가 되어도 남을 도와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수십만, 수십만원 들여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이 순간에 한 숟가락의 밥을 못 먹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 주위에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하루 저녁 식사 비용이고 찻 값으로 날려 보내는 이 만원이 어떤 사람에게는 일주일의 양식이며 피입니다.

내가 어려울 때 내가 부족한 중에서 긍휼을 나타냅시다.

돈이 풍부하여 내가 쓰고 남은 것을 주는 것은 하나의 자만이고 위선입니다.

나도 꼭 필요하고 아깝지만 나의 살을 떼어내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나보다 못한 사람을 생각하며 나눠주는 이 긍휼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사랑을 이제 나타냅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 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과 죽음과 지옥 형벌을 받도록 그대로 두시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시기고 마음먹고 모든 것을 희생하기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자격이 없고 무가치한 인간을 위하여 죄를 밥 먹듯이 범하고 변덕 많은 나를 변함없는 사랑을 조건없이 부어 주셨습니다. 

내가 긍휼을 심으면 긍휼의 열매를 얻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의 축복이 우리에게 언제나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긍휼의 위대한 축복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고 일깨워 주시고 도전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빛을 주님께서 졌습니다.

우리도 우리 주위에 우리를 향해 빚진 사랑을 관용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긍휼이 여기는 미덕을 주시옵소서.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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