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마음이 청결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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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마음이 청결한 자
본문 : 마태복음 5장 8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우리가 흔히 전도하다 보면 믿지 않는 사람으로 부터 흔히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보여 달라"
“하나님을 보게 되면 나는 하나님을 믿겠다"
이런 사람을 향해 저는 말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신은 백년가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의 모습은 마치 사과를 먹기 위해 그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과 나무 밑에 누워서 사과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당신의 눈에는 절대로 하나님을 볼 수 없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 이곳 저곳을 찾아 해맵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보려고 애씁니다.
어떤 사람은 선행으로 하나님을 보려고 애씁니다.
어떤 사람은 신비적인 방법이나 체험으로 하나님을 보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교회에 찾아 나오므로 하나님을 보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열심히 자기의 지혜와 지식과 선행과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았지만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열심히 교회에 다녔지만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은 없어!”라고 말하면서 결국에는 교회를 떠납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까?
엉뚱하게 찾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는 나오지만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그저 교인이라는 명목으로 왔다갔다만 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는 않습니까?
교회에는 나오지만, 나도 기독교인이라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내가 그 하나님을 봤는지, 안 봤는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뭔가가 잘못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을 삼년동안 따라 다니던 빌립도 예수님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요 14:7)라고 간청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한 빌립은 예수님이 군병들에게 잡히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누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일평상 한번 쯤은 보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는 볼 수 없을까요?
오늘 본문의 성경 말씀이 그 해답을 제공해 줍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청결한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청결한 마음입니다.
청결한 머리나, 청결한 행위가 아니라 청결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안다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답고 선한 행위를 많이 한다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종교적인 의식이나 행위에 참여한다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 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은 손으로만 행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봉사'라고 하는 이름하에서 바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는 봉사, 청결하지 못한 봉사는 봉사 그 자체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시느니라"
오직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청결한 마음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첫째로, 거듭난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용서함 받고 중생하여 새로 태어난 새 생명을 얻은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고 더럽혀져 깨끗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 본연의 마음이 어두움속에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렘 17:9)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합니다.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겨 미련한 마음으로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 15:19-20)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덕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이런 더러움에서부터 놓임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 씻음 받고 중생해야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스가랴 13장 1절에서 놀라운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이 샘은 로마의 군병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던 순간에 터졌습니다.
보혈의 샘이 열렸습니다.
이 보혈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보혈이 어떻게 우리의 죄를 씻어 주고 어떻게 해서 우리를 구원시키는 지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확신하는 것은 누구든지 이 보혈의 강에 뛰어 들기만 하면 그 피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죄로 더러워진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일 1:7)
베드로도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벧전 1:18-19)
히브리서 9장 14절에도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죄 씻음 받아서 구원 함을 얻은 사람만이 정결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주일 학교 성경 공부 시간에 교사가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애들아!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보신단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단다"
성경 공부를 잘 받은 꼬마가 손을 번쩍 들더니 “선생님, 아니예요 하나님이 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어요"
주일 학교 선생님이 깜짝 놀라며 “그게 뭔데?”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꼬마는 “예수님의 피 아래 있는 내 죄는 볼 수가 없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피 아래 있는 내 죄는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죄를 가려 줍니다.
그 피가 우리 속에 청결한 새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정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결한 마음을 구원 얻었다고 해서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결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힘써야 합니다.
두번째로 청결한 마음이란 죄를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사람만이 청결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결한 마음은 구원 얻었다고 해서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청결하다고 우리 생활 속에 전혀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아 마음이 청결해 져도 우리 속에 아직 죄의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죄 때문에 고민하고 싸웁니다.
나의 생활 속에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죄를 떨쳐 버리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안타까워 합니다.
그 죄를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이것이 바로 청결한 마음입니다.
아직도 자기의 마음 속에 죄가 있음을 깨닫고 그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실이 우리가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9장 104절에 “주의 법도를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을 잘 섬긴 신앙의 영웅들이 죄를 지어 더러워진 다음에 어떻게 깨끗하여 졌는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을 순종하며 살던 노아가 술에 취하여 실수하였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들까지 바치는 훌륭한 신앙의 소유자였지만 이방 임금 앞에서 거짓말을 하여 망신당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린 후에도 하나님을 찬송하던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였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싸워 위대한 승리를 거둔 엘리야가 자기의 사명을 등지고 죽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성군 다윗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했고,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실패한 사람들이고 그 영혼에 결정적인 오염을 지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께 나와서 다시 죄 씻음 받고 쓰임 받은 종들이었습니다.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 같이 희게 하여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듣고 자기 죄를 미워하며 회개하는 심령을 깨끗케 하시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회개하는 심령, 죄를 미워하는 심령을 하나님은 귀히 보십니다.
다윗이 시편 119편 104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주의 법도를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자기에게 어떤 유혹이나 어려움이 있더라도 죄를 안짓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불이익과 핍박을 감수하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죄를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청결한 마음입니다.
어두움은 빛을 미워하고 빛은 어두움을 미워합니다.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세상의 죄가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이 주님을 따라가는 자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다 이용하여 청결케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의무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고백하고 십자가를 지고 의의 길을 걷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이 길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는 성찰 속에서 이루어져 삽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생을 통한 삶의 과제입니다.
이런 사람은 향해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셋째로 청결한 마음이란 거짓없는 온전한 마음입니다.
위선과 가식이 없는 마음입니다.
꾸밈이 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짓없는 참 마음입니다.
옛날 유대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 하였습니다.
그들의 외부 생활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로 정결케 하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어도 깨끗한 음식만 먹고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짐승 가운데서도 먹을 수 있을 수 있는 정한 짐승이 있었고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짐승이 있었습니다.
물고기 가운데서도 먹을 수 있는 정한 물고기가 있었고 먹을 수 없는 부정한 물고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옷도 될 수 있는대로 깨끗이 입기를 힘썼고 조금이라도 병자나 문둥병 앓는 사람 곁에 갔으면 옷을 깨끗이 빨아야 되고 사람이 죽은 초상집에 갔다 오면 반드시 그 옷을 갈아 입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죽은 시체를 만지면 7일동안 성 밖에서 몸을 정결케 한 후에 집에 들어오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밖에 나갔다 오면 손을 씻되 팔굽까지 씻어야 했고, 밖에 나갔다 오면 발도 꼭 씻어야 방에 들어가고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으며 여러가지 주발과 그릇들을 깨끗이 하도록 힘썼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비난하였습니다.
어찌해서 당신의 제자들은 유전을 지키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고 먹습니까?
이 때에 예수님은 씻지 않는 손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죄악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외부의 생활을 깨끗이 하기를 힘썼지만 자기의 속을 깨끗하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실 때에 “너희들은 회칠한 무덤 같다"고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옛날 무덤 가운데 회를 칠하는 풍속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밖에는 회를 칠했으니 아주 희고 깨끗하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는 더러운 뼈와 송장이 있습니다.
이것처럼 너희들의 얼굴은 깨끗하고 너희들의 의복은 깨끗하고 너희들의 외모는 깨끗해 보이지만 네 속에는 송장과 같은 더러운 마른 뼈들이 있다고 책망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회칠한 모습과 같습니다.
과학의 발전과 문명의 진보로 우리의 외적 생활은 전보다 더깨끗해 졌지만 사람의 마음속은 그냥 더러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진흙탕 길이 변하여 아스팔트 길이 되었습니다.
노리개가 나오던 초가집 지붕이 변하여 슬래브와 기와집이 되었습니다.
다 쓰러져 가던 집이 이제는 견고한 아파트가 되었습니다.
악취나고 구데기가 기어 오르던 변소가 변하여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 만은 그대로 입니다.
오히려 점점 더 악취나고 완악한 마음으로 변해 갑니다.
우리가 매일 뉴스와 신문을 대하면서 무슨 생각을 같습니까?
신문 속에서는 매일 사회가 썩는 악취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회가 썩는 냄새가 신문 속에서 아주 진하게 나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5인조 강도 살인 사건, 저수지 대학생 살인 사건, 부녀자 폭행 연쇄 살인 사건,
뜻있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오늘날은 선생은 많되 스승은 없고 학생은 많되 참 제자는 없다"고 합니다.
“사람은 많되 막상 쓸려고 하면 쓸만한 사람이 없다"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인은 많되 참 그리스도인은 적습니다.
하나님께서 쓸려고 해도 막상 쓸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많은 교인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거짓없고 진실한 청결한 마음을 가진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든지 먼저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그 때의 예루살렘을 향하여 “오 예루살렘아 너의 속을 깨끗이 하라 너희 속 마음에 있는 생각을 깨끗이 하라"고 했고
시편 기자도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정결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청결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요구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청결한 마음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생을 통한 삶의 과제이며 노력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는 성찰속에서 이루어져 갑니다.
그러면 이러한 청결한 마음을 얻고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무엇입니까?
디모데 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항상 깨끗이 보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 심령을 깨끗이 할 수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과 인격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고 기도의 채널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속 열려 있을 때 청결하게 되는 변화가 찾아 옵니다.
성경은 가까이 하지 않고 거룩함을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고 마음의 청결을 말 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그가 범죄하고 나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야곱은 간사하며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얍복 나루를 건널 때 평생에 가장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영혼을 쏟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할 때 우리는 거기에 생사가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도를 들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줄을래” 하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야곱은 그 날 밤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 기도를 통하여 새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은 그 날 그에게 이스라엘 이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어떤 종류의 도덕적인 결심이나 종교 의식도 우리를 성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영혼이 말씀과 기도에 사로잡힐 때 우리 속에 거룩함이 이루어져 갑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이 우리 속에 새겨 집니다.
그런 사람을 향하여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복이 있으라 마음이 청결한 자요, 너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느끼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느끼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삽니다.
과연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놓고 성경을 읽을 때 이 성경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키 못한 자는 영적인 소경의 자리에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마음의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성경을 읽지만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가 청결한 마음을 얻으면 영광스런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 하나님과 교제를 누립니다.
더 나아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날을 기대합니다.
그 날을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면 말씀대로 살아 갑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오셔도 유감없는 삶을 준비하며 살아 갑니다.
성경의 마지막 기도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하면서 종말적인 삶을 살아 갑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오셔도 유감없는 종말적인 삶이어야 합니다.
종말적인 삶이란 그리스도께서 오늘 오셔도 유감없는 삶을 준비하며 살아 가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선교 본부에는 아주 인상적인 표어가 붙어 있는데 그것은 “그 분은 오늘 오실지도 모른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오실지 모르는 주님 앞에 부끄럼없이 설 수 있기를 갈망하는 사람마다 회개하며 살아 갑니다.
청결한 마음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갑니다.
부부가 닮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매일 쳐다 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쳐다보면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을 닮아 갑니다.
저를 쳐다 보고 사는 사람은 저를 닮습니다.
해바라기가 왜 해바라기입니까? 해를 바라보니까 해바라기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바라기가 되어야 합니다.
주만 바라보고 사는 주바라기 입니다.
주님을 쳐다보면 주님을 닮습니다.
주바라기가 되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와 더불어 거하기를 즐겨하는 사람들 속에 주께서는 그의 흔적을 남기십니다.
마침내 영광스런 주님을 닮은 존재로 되어 어느 날 주님 앞에 세워질 것입니다.
“사람이 40세가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 온 삶이 우리의 얼굴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도 평생의 신앙 생활의 결과가 우리의 모습을 결정할 것입니다.
주님을 열망하며 바라보고 산 사람은 마침내 주는 닮은 주 바라기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주님을 닮은 우리가 주 앞에 서는 날 주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부모가 자기의 아들 딸을 바라보고 흐뭇해 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기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자기를 닮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이와 같이 기뻐할 것입니다.
사도들은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선포하면서 마음 속에 두려움 없이 담대하고 부끄럼없이 서기를 열망했습니다.
주 앞에 담대하게 서려면 청결해야 합니다.
더러워진 우리 모습을 가지고는 담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고 거룩한 인격으로 주님 앞에 부끄럼없이 설 그 날을 열망해야 합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조만간에 우리는 그 분을 뵙게 될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살았던 모든 인류들은 감추인 것이 하나도 없는 적나라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부끄러움이 없이 떳떳하게 서는 기쁨과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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