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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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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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본문 : 마태복음 6장 9-13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 첫 구절을 자세히 유의하셔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 첫 절은 우리가 기도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제시해 줍니다. 

내가 기도해야 할 대상은 뚜렷한 인격을 가지신 하늘에 계신 절대자인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명백하게 가르쳐 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도를 드립니다. 


저는 기도가 기독교에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절이란 곳에 처음 갔다가 그곳에 ‘백일기도’라는 쓴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야 불교에도 기도가 있구나. 그러면 그들은 누구에게 기도를 드리지? 돌부처인가?’ 

이것이 저의 궁금증이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의 모든 종교들이 기도를 드립니다. 

심지어는 미신이나 무속신앙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무당들까지도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드리는 기도의 대상이 불분명합니다. 

그들의 기도를 받는 대상이 확실치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한수를 떠놓고 때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산신령님 물귀신님 땅신님 목신님 불신님 처녀귀신님 달걀신님 아무신이든지 신이 있다면 나의 정성을 받으시고 내 소원을 들어 주세요.”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알 수 없는 어떤 미지의 신이나 우상을 향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허공을 향해 ‘신이 있다면 나의 기도 들으시여’ 라고 소리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 계시는 인격적인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계셔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우리를 보고 계시며 그리고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 말씀은 우리가 기도하는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 짤막한 말을 주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 속에 하나님에 대한 중요한 말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하늘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둘째, 아버지입니다. 

셋째, 우리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기도드리는 그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아무리 도달하려고 해도 도달할 수 없는 저높은 곳에 계시는 초월하신 하나님. 

사람이 아무리 애써도 그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사람같지 않은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감히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너무나 거룩하셔서 추한 사람들은 감히 그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높고 거룩한 하늘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죄악으로 말미암아 더럽고 추한 우리 인간 대신 죽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 한마디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한번 붙들면 그분의 손아귀에서 빼앗아갈 자가 아무도 없는 능력있으신 하나님인데 이 하나님은 그의 능력의 손으로 나를 붙들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내일 어떤 일이 닥칠지 몰라서 불안하고 초조해 합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나의 과거를 아시고 미래를 아십니다. 

우리 조국의 과거와 미래를 아시고 역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시는 분입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약속하시며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십니다. 

이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하나님의 약속도 영원하십니다. 

여러분, 정권도 지나갈 것입니다. 

자유당 정권 공화당 정권도 다 지나갔습니다. 민정당 정권도 지나갈 것입니다. 

역사도 지나갑니다. 

어떤 인물이나 사상도 모두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만은 영원하십니다. 

그 분은 조금의 변함도 없으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변함없이 똑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하나님은 편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어느 곳이나 계십니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 낯선 문화, 새로운 장소 앞에 부딪칠 때마다 고민합니다. 내가 낯선 곳에서 이 환경을 어떻게 적응해 낼까? 하며 걱정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거기에도 계신다는 사실을 내가 하늘 끝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내가 땅의 음부의 깊은 곳에 내려갈지라도 거기에 게시며 내가 바다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에도 계신 그 하나님. 

내가 가기 전에 앞서 가시며 나의 삶의 모든 계획을 이미 준비하신 그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히 13:5).


오래전에 가이드 포스트에 이런 일화가 났습니다. 

미국에서의 일입니다. 

한 병사가 월남전에서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남편이 고통을 당한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런데 어느날 그 부인이 자기 아들과 같이 있는데 자기 아들이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울타리를 쳐놓고 그안에 집을 하나 그려 놓은 것이었다. 

“얘 이게 뭐니?” “응 아빠가 있는 포로수용소야” 

이 이야기를 들은 부인은 그만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부인이 흐느끼니까 그 아이가 “엄마 왜 울어요?” 라고 물었습니다. 

“응 아빠가 그곳에서 혼자 계셔서 그래” 

그러자 이 아이가 “엄마 울지마 이곳은 말이야 하나님이 계시잖아. 엄마 울지마. 이곳에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이 아이의 한마디는 자기 남편이 포로 수용소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 엄마의 눈물을 씻어 주었습니다. 

“이곳에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낯선 곳에 가면 불안해합니다. 먼곳에 떠나면 걱정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군대 보내고 그의 부모는 편안한 잠을 못잡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도 계셔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지켜 줍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우리가 실재 삶을 살면서도 그가 어디나 계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안해하고 걱정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어디나 계신 하나님은 그 무시무시한 공산당의 핍박 속에서도 계십니다. 

1949년 중국 본토가 공산화가 되면서 공산당들은 소리쳤습니다. 

“이제 중국에서는 기독교가 끝장이다” 

한 선교사도 “하나님 이 땅에 200년동안 수많은 고생과 죽음속에서 복음을 뿌린 결실이 이렇게 허망하게 끝납니까?”하면서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중공에서 지난 30년 동안 그리스도인이 30배로 증가했습니다. 지금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중공에는 기독교인이 이미 5천만이 넘어 중국 본토가 공산당 될때보다 기독교인이 100배로 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중공에도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소련에도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시베리아의 불꽃’이라는 책자를 통해 소련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아름답습니다. 

그 환난과 박해 중에서도 기도하며 교제하며 복음전하고 예배 드리는 모습, 소련의 최대 당기관지 신문인 프라우다지가 최근 사설에서 지적하는 것을 보면 소련의 최대의 국내 문제 중의 하나가 소련내에 기독교인들이 날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시베리아의 무시무시한 감옥속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은 시베리아 속에서 주님을 믿는 이유를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저는 이북의 김정일이 아무리 기독교를 핍박한다 할지라도 기독교인들에게 아무리 깊은 고통을 준다할지라도 이북에도 우리 하나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북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종국에는 승리할 것입니다. 


십수년 전에 제가 어떤 책자에 보니까 북한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집 마루 밑에 땅을 파고 그곳에 숨어서 하나님을 믿다가 들켜서 사형당한 기사가 났습니다. 

얼마전에도 북한을 방문한 외국기자가 농촌가면서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찬송을 부르니까 논에서 일하던 한 노인이 일하던 것을 멈추고 그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찬송을 따라 불렀다는 것이 기사에 났다. 

북한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복음은 그렇게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신앙이 그렇게 쉽게 죽어버린 적은 역사상 한번도 없습니다. 

여러분, 초대교회때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형제가 313년 기독교를 공인할때까지 약 250년간 기독교에 대한 수많은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불에 태워 연회석을 밝히는 횃불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열번에 걸친 대 박해가 있었습니다. 마치 틈이 없이 빽백한 그물 저인방으로 송사리까지 깡그리 잡아 버리듯이 기독교인을 잡아 죽이는 무시무시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 박해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의 씨가 마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천만에요. 그들은 카타콤이라는 동굴에 밤마다 모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300년만에 뚜껑을 열어 놓고 보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부인도 왕자도 공주도 어머니도 귀족들도 모두 그리스도를 영접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의 예수, 어떤 세력에 대해서도 승리하는 주님, 죽음의 권세까지 이기는 주님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이 예수님 성도들을 지켜 그리고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성도들을 보호했기 때문입니다. 

불가운데를 지날 때는 불이 너를 사르지 못하고 물위를 건널 때는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하게 그 하나님이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지극히 보배롭게 여겼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이 하나님이 어디나 계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이국만리 먼 외국에 나가 있어도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함께 하십니다. 

“네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있으면서 나를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어디나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잊기 쉬운 한가지 또다른 속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즉 심판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여러 속성 가운데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생각하기 싫은 하나님이 있다면 심판주 하나님이십니다. 

심판주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한없이 사랑하지만 우리가 죄를 범하면 우리를 무섭게 진노를 쏟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죄로 정하시고 죄의 댓가를 반드시 치룹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선약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으면 죽으리라 내 말을 거역하면 죽으리라’ 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어긴 노아시대에 홍수의 거대한 물결속에 이 지구의 모든 인생을 멸망시켰습니다.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말씀대로 멸망시키신 하나님이십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때문에 더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유황불을 비처럼 내려서 그 동성을 멸망시켰습니다.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죄를 향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폼베이라는 도시가 죄악이 너무 심해 더이상 눈을 뜨고 볼 수 없게 되자 그 도성에 화산을 열어서 삼켜 버렸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심판주 하나님은 죄를 향해서 끝까지 심판하십니다. 

이 지구의 끝날에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우리를 위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온 인류를 향해서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너무 쉽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거져 먹으려고 들때가 참으로 많은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합시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그냥 놔두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죄를 없이 하기 위해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마저 십자가에서 죽이시는 하나님입니다. 

자기 아들을 죽이는 무서운 아픔을 스스로 겪으면서도 죄를 반드시 없애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무서운 공의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때마다 죄악의 무서움을 볼 줄 알아야겠습니다. 

십자가를 볼때마다 하나님은 죄를 향해서 가차없는 공의를 행하시는구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아야 할 십자가입니다.


둘째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를 부르듯 부를 수 있는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자식을 사랑할 줄 밖에 모르는 하나님. 매를 때릴지라도 사랑의 매 밖에 때릴 줄 모르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자식이 영화가 보고 싶어 아버지께 “아빠 나 공책 사게 천원만” 하고 거짓말하면 다 알면서 속아주는 바보같이 착하고 맘좋은 우리 아버지 같은 하나님입니다. 

정말 우리가 요구하는대로 “그래 그래” 하면서 들어주는 하나님입니다. 

우리 나라 조선시대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왕이 신하들을 불러 모아 놓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더 슬펐습니까? 자식이 죽었을 때가 더 슬펐습니다?”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앞에 있는 나이 많은 든 노재상이 대답하기를 “아뢰옵기는 황송하오나 소인은 어느족이 더 슬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감마마께서 계속 신더러 어느쪽이 더 슬폈느냐고 차이를 물으신다면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의 가리는 가운데서도 가끔 뽀얗게 남산 끝머리가 약간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죽었을 때는 아무것도 안보였습니다.” 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그래도 앞이 조금 보였지만 자식이 죽었을 때는 아무것도 안보였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죽었을 때가 더 슬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모습을 좀 보세요.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외아들을 죽이시면서 우리를 살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살려 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친아들을 죽이고 우리를 대신 아들로 양자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의 목전에서 그의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본다면 심장이 터져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좀 보세요. 

하나님의 목전에서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면서 울부짖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슬피 울며 탄식하는 자기 아들을 외면하고 그대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살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나를 그의 자녀로 만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독생자 외아들 주님이 죽으심으로 이제 나에게는 아버지 하나님이 생겼고 그 하나님을 내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어려운 문제도 고민도 아버지께 말해 버리면 그 문제는 더이상 내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께 이제는 아무때나 막 가도 됩니다. 

언제나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싶으면 찾아가고 부탁하고 싶으면 부탁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죽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는 감히 이 자리에 못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감히 부를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그중에서도 지성소라는 곳, 제단을 말합니다. 

여기는 아무나 못들어 왔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가면 다 죽었습니다. 

제사장 중에 대제사장만 그것도 1년에 한번만 들어갔습니다. 

더구나 많은 준비, 성결의 준비를 하고 대제사장도 들어가서 그곳에서 조금만 실수하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 우리는 이제 마음대로 들어왔습니다. 

더구나 그 하나님을 만나서 경배한다고 와서 옆사람을 쳐다보고 이야기도 하고 졸리면 흔들흔들 거리다가 깜박 잠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아무일도 없습니다.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 거룩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있을까?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못 부르고 하나님을 다른 이름 즉 아도니아(주님이라는 뜻) 아도니아라고 대치하여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감히 이름을 못 부르고 (주님 우리의 주인님) 이런 이름으로 대치해 불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히 이름도 못 부르던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구약시대 같으면 당장 벼락맞아 죽을 일입니다. 

더구나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그 시간을 이용하여 막 왔다갔다 합니다. 

꼭 그 시간만 되면 들락날락합니다.


여러분 조심하세요. 

우리의 가장 나쁜 습관 중에 하나가 기도시간만 되면 움직입니다. 

예배 시간에 늦게오면 미안해서 문밖에 서서 서성거리다가 꼭 기도시간에 들어옵니다. 

예배시간에 불가피하게 자기를 움직일 일이 생기면 꼭 기도시간에 이동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배 드리러 오는 우리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사람입니까? 

물론 하나님께 찬양드리는 시간에 들어오는 것도 나쁜 것입니다만 왜 하필 기도시간만 되면 들어옵니까? 

다른 성도들이 다 눈감고 있어서 그때 들어가면 좀 덜 미안하거든요. 

분명히 기억합시다. 

사람은 보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은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에게 드리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나는 그 하나님이 안보인다고 하나님을 속이려고 합니다. 

눈가리고 아웅 식 입니다. 

하나님이 안보는 줄 알고 하나님을 속인 아나니와와 삽비라는 자기들이 비록 좋은 일 하는 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왜 하나님을 속이려고 듭니까?


어느 교회의 유년주일학교 예배시간에 가보면 초등학생들이 예배시간에 늦었는데 그때가 마침 기도시간이면 그들은 문밖에 서서 조용히 같이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면 소리 안나게 조용히 들어와 뒷자리에 앉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했다고 해서 그 하나님은 사랑이 많다고 해서 그 하나님께 무례히 행동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대신 죽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입니다. 

그만큼 우리로 하여금 자녀로 만들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의 친자식을 죽이면서까지도 원수를 데려다 자기의 양아들로 삼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아버지 하나님 오 나의 하나님 아버지” 하면서 벅차고 감격된 마음으로 불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 우리가 부르는 그 하나님 아버지 이 소리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다정스럽게 들립니까? 

이것이 우리의 특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축복입니다. 

아무쪼록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가 되어서 그 아버지가 주시는 축복과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세번째로 이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내가 미워하는 아무개 집사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나의 하나님일뿐만 아니라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 아무개 집사의 하나님도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싫어하는 그 집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를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특성이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에 찬성하지 않은 사람은 다 나쁜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특히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다 원수고 적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그 사람을 짓누르고 이기려고 합니다. 

그가 몰락하거나 망해야 내가 이기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때에야 비로소 기분이 통쾌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은 주님 믿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도 다정했던 아무개 집사가 내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그를 나의 반대자로 혹은 적으로 생각하고 미워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는 축복내려 주어도 그에게 축복을 내리지 말고 하는 일마다 잘 안되고 홀딱 망했으면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은연 중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가지 기억하세요. 

이단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깨달은 것만 옳고 그 외에는 다 틀렸다고 합니다. 

자기들만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들만 신통한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기성교회는 분명한 성경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다 지옥에 갈 것이고 기성교회 목사는 다 마귀의 졸개고 기성교회 성도는 다 마귀의 자식이라고 욕합니다. 

자기들만 옳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우리가 나만 옳고 내 주장만 바르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다 틀리고 나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원수로 생각하고 그를 미워한다면 나의 모습도 이단들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도 되시고 내 의견에 반대하는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은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도 사랑하는 우리들의 하나님입니다.


18C에 영국 유명한 신앙 운동가가 두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가 장로교인 윗필드입니다. 

존 웨슬레와 윗필드는 같이 거룩한 운동을 영국에서 폈습니다. 

그들은 모두 대단한 설교가였습니다. 

그들이 경건운동을 펴기 시작하자 영국교회에서 두 사람을 쫓아버렸습니다. 

두사람은 쫓겨나서도 생명의 동지로서 복음사역을 같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두사람은 신학적인 의견차이로 부딪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문제였습니다. 

휫필드는 칼빈주의자 곧 장로교도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 예정을 믿는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은 절대 멸망받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아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받는다”고 ‘믿는 자’가 먼저 강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사람은 이 문제로 마치 원수가 된 듯 격렬하게 논쟁을 했습니다. 

계속 이 문제를 가지고 싸웠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날 휫필드는 열렬히 추종하는 한 여성도가 휫필드에게 찾아와서 “목사님 휫필드 목사님 제가 한가지 물어보겠는데 웨슬레같은 사람은 천국에 가면 안 보이겠지요?”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웨슬레는 천국에 못 간다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휫필드 목사가 하는 말이 “그래요 천국가면 웨슬레는 안보일 것입니다.” 

그러자 이 여신도가 내가 웨슬레를 안따르고 휫필드를 따른 것이 참 잘한 일이구나 하고 좋아하고 있는데 휫필드 목사가 이어서 말합니다. 

“웨슬레는 예수님 곁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 광채에 가려서 잘 안보이고 우리는 간신히 구원을 받아서 저 문가에 있기 때문에 천국에서 웨슬레를 못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위대한 말입니까? 

이 얼마나 서로 존경하고 있습니까? 

자기와 의견이 달라서 서로 싸우고 있지만 그를 높여 줍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그도 구원합니다. 

나의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 하나님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그 아무개의 하나님, 내가 정말 얄밉게 생각하는 아무개 집사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그를 미워할 틈이 없습니다. 그를 싫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도 사랑하시는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아름다운 성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 기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능력이 많은 하나님입니다. 

영원토록 변함없는 하나님입니다. 

어느 곳이나 계시면서 나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항상 우리들의 마음속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가 선명하게 되새겨지며 그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의 영광의 존전에 이렇게 나오는 모든 심령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넘쳐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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