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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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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본문 : 마태복음 6장 9-13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 중 처음의 세가지 간구는 하나님께 관한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간구입니다. 

두번째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간구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한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기도의 우선적 관심이 하나님께 있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즉 하나님의 명예,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은 성도가 드려야 하는 기도의 모든 관심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관심있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도의 내용의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이것은 기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앞서서 선행되며 강조되어야 할 내용입니다만 인간의 필요와 소원이 이 기도의 내용에서 제외된 것은 아닙니다. 

죄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우리가 약한 존재이고 부족한 존재이고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하여 간구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 중에 우리를 위한 간구를 가르칩니다. 


이제 이 주기도문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심에서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 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여기서 우리 인간이 삶의 참된 의미를 누리기 위해서 그리고 생의 진정한 풍요함과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3가지 절대적 요소를 말합니다.


첫째가 먹고 살아야 할 양식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둘째가 죄에 대한 용서입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날마다의 삶가운데서 내가 끊임없이 범하는 죄속에서 놓임 받고 용서 받는 것입니다. 

셋째는 모든 시험과 어려움에서의 보호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의 삶은 본능적으로 보호되지 않고는 불안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외부적인 환경과 어려운 시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 영혼이 악한 자인 사탄에게서 보호 받아 나의 영혼이 순결함이 보호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인간의 삶에 대한 간구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인간적인 즐거움이나 희망을 포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나의 삶을 다 버리고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하나님이 되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종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만이 가지는 연약성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고 하나님처럼 될려고 할때 무서운 교만죄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인간이 필요한 것을 외면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내가 필요한 것, 나의 소원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의 욕심이나 이기적인 나쁜 생각도 아닙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바입니다. 

오히려 내가 필요한 것이 있고 나의 소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다면 나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없이 나의 힘, 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해내겠다는 하나님을 경멸하는 태도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자기 힘으로 자기 능력으로 스스로 모든 일들을 해결하며 해내겠다는 사람을 칭찬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나 사이의 신앙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없이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해내겠다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대적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우리는 그가 만드신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나를 만드신 그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단 1분 1초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늘 그 하나님께 매달려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내가 넉넉하든지 부족하든지 내게 능력이 있든지 능력이 없든지 나는 늘 그분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나의 가장 기본적인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매일의 삶가운데 일용한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는 이 주기도문의 짤막한 기도속에 몇가지 의미를 발견합니다. 

이 기도는 내일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오늘을 위한 기도입니다. 

‘앞으로 미래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 ‘일용할 양식’은 ‘오늘’입니다. 

바로 이시간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일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미래의 축복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미래를 위한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 이시간을 위한 기도입니다. 

나의 미래는 오늘에 의해 결정됩니다. 

내가 오늘 어떤 삶을 살고 어떻게 애쓰며 노력하느냐에 따라 나의 미래의 삶이 결정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는 아무렇게나 살고 못살아도 괜찮다. 

천국에 가서 잘살면 된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되는데로 산 사람이 천국에 가서 잘 살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산 사람이 천국에서 우리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늘나라에서의 나의 상급은 내가 천국에 갔을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이땅에서 내가 어떠한 삶을 사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내가 정말 주님 원하시는 삶을 살았는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았는가?” 

“내가 정말 매일의 삶속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았는가?” 


여기에 따라 천국의 상급이 결정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미래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가신 쓰리고 아픈 그 십자가의 길을 걸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께 권합니다. 

내일 혹은 미래에 주님의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십자가는 내일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이 시간에 지고 가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날마다 나의 계획을 하나님 뜻에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내일을 위한 기도가 되기에 앞서 오늘을 위한 기도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늘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오늘 내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일용할 양식을 위해 구하라고 했는데 이 일용한 양식이 무엇입니까? 

과거에 사람들은 이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먹는 것, 사람들이 매일 매일 먹는 음식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어거스틴이나 터틀리안 같은 교부들은 ‘일용할 양식’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의 빵’이라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이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를 이 개념을 좀 더 넓혔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것이 어찌 덕분이겠는가? 

우리에게 일용할 것은 세가지가 있다’

육체, 정신, 영적인 양식입니다.

음식, 건강한 몸, 좋은 집, 가정, 아내, 자녀, 좋은 국가 그리고 평화와 같은 우리들의 생을 보존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떡이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적인 필요가 또 있습니다. 

좋은 친구가 필요합니다. 

쉴만한 안락한 집도 필요합니다. 

좋은 반려자가 필요합니다. 

좋은 인간관계도 필요합니다. 

좋은 책도 필요하고 좋은 스승도 필요하고 좋은 환경이 필요한데 이 모든 것이 일용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영적인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것은 다 갖추었는데도 내 마음속에 만족이 없습니다. 

다른 것이 풍성한데도 내 마음속에 깊은 비참함이 있습니다. 

영적인 갈급함은 어쩔 수 없습니다. 

심령이 컬컬하고 내 마음이 텅빈 것 같은 공허를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블란서의 철학자 파스칼은 “사람의 마음 속에는 누구나 공허가 있다. 주께서 내 마음속에 오셔서 나를 채울 때까지는 나는 참 만족을 모르는 인생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그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없는 삶은 어두움이었고 지옥이었다. 


나는 주님없이는 이제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일국의 왕이었던 다윗도 고백합니다. 

“땅위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하늘에는 주밖에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그는 가질 것은 다 가진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땅 위에서도 하늘에서도 내 영혼을 만족시킬 사람은 주님 외에는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없이 참 만족이 없습니다. 

주님 없이 참 기쁨이 없습니다. 

주님없이 참 평화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주님께 일용할 것을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눈을 뜨고 하루의 삶을 시작하면서도 “주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것을 주옵소서. 일용할 떡을 주시고 내 정신의 삶에 필요한 떡을 주시고 좋은 환경을 주시고 특별히 성령님의 무한한 권능으로 오늘을 충만한 은혜가 내게 넘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영적인 욕구, 이것을 갖고 있는 자가 복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만 채워 주실 때 우리 속에 가득 채워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도 속에서 한가지 중요한 의미를 더 발견합니다. 

‘일용할 양식’앞에 붙어있는 간단한 한 단어에 주의를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했습니다. 

‘나에게’라고 하지 않고 ‘우리에게’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내 주변에 굶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만 이 축복이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 드리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좌절로 울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영적으로 깊은 공허에 빠진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를 나에게만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가난한 이웃’과 함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점입니다. 

영적으로 나태한데 있는 사람, 믿음이 약한 사람과 함께 우리의 영혼을 흡족하게 채워 줄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엡 4:28에 우리가 돈을 벌어야 할 목적, 재물을 모아야 할 목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일하라” 성경은 너희의 먹고 자고 입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해서 일하라”고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일의 목적이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돈을 벌어 자기 식구 자기가 행복되게 잘 살기 위해 일을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식구, 자기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도 일해야 합니다. 

외국에 있는 성도들은 이 말씀을 잘 지킵니다. 

그들은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 우리 한국의 고아들을 도우면서 그들의 생활이 여유가 너무 빠듯하여 고아들을 도울 힘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도우기 위해서 일주일에 몇시간씩 잔업을 하여 이를 더해서 그 돈을 한국의 고아들에게 보냅니다.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 노력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보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는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입니다.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 모두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말합니다. “너희 지갑끈을 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주기도문을 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 기도는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깊은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의미없이 되풀이 되는 염불이 아닙니다. 

녹음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달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창고가 한없이 부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늘의 창고를 열고 우리의 창고를 풍부하게 채워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주십니다. 

하나님은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주시기를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성입니다. 

이것은 창조때부터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아름다운 태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지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크심이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밤하늘의 별들만 보면 신기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저 하늘 공간에 이 지구같은 땅 덩어리를 수천만개씩 깔아 놓았을까? 

아름답고 신기한 우주 만물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우리를 위해서 창조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롬 8:32에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뇨?”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아들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가난합니다. 

그러나 부자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 창고에 넘치게 쌓여 있는 한없는 부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자입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부를 볼 줄 아는 믿음을 가지고 주시기를 좋아하는 그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 앞에 다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볼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떡의 배후에는 방앗간이 있고 방앗간의 배후에는 농부의 수고가 있고 그 배후에는 비와 해가 있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일용할 양식만 생각하고 그것을 주실 분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주신 분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기도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날마다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먹을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소원, 나의 필요를 위해 간구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할머니는 눈내리는 새벽에 예배당에 가더니 “주여 눈이 소복소복 내리듯이 주의 복을 우리에게 소복소복 내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솔직하게 자기 마음의 소원을 아뢴 기도입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것은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가르칩니다. 

이미 내가 받은 모든 것들, 그것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와 같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이 주실 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성자 죠지 뮬러는 일생동안 5만번 이상의 크고 작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는 2,000명이 넘는 고아를 양육하면서 단 한번도 사람에게 꾼다거나 구걸하지 않고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날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중국 선교에 일생을 바친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선교에 따르는 모진 위험과 위기에 당면할때 그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의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반드시 주실 것이다” 라는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생애에 하나님께서 단 한번도 그를 실망시키지 아니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약속하신 위대한 기도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기도하지 마십시오. 

잠 30:8-9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는 아름다운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라는 기도 앞에 우리는 “아멘”하실 것입니다만 그 다음 절에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는 기도에는 “아멘” 할 수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왜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하며 물질만능주의에 취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물질만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과욕으로 욕심에서 구하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구하는 일용할 양식, 나의 삶과 영혼에 필요한 날마다의 양식을 하나님은 주십니다. 

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결론을 맺겠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 기도는 오늘 여기 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달라는 것입니다. 미래가 아닙니다. 

그 다음에 또 강조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양식, 정신적인 양식, 영적인 양식이 우리에게 모두 필요하다고 강조되어 있습니다. 

어느것 하나만 갖고 있으면서 내가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적인 양식만 구합니다. 그것만 가지고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육체적인 양식 뿐만 아니라 정신적 양식 더 나아가 영적 양식 모두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 양식은 나에게만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주옵시고’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단지 ‘주옵시고’라고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될때 이 기도가 살아계시는 하나님 앞에 내 참신앙으로 드려지는 놀라운 기도가 되어 우리 하나님 보좌 앞에 들려지고 그 보좌를 움직여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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