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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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본문 : 마태복음 7장 13-14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우리는 지금까지 마 5장, 6장, 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설교 중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사실상 7장 12절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12절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황금률’이라고 불리워지는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12절 말씀의 황금률이 산상보훈이 중요 부분의 끝이고 결론입니다.
그 다음 13절부터 7장 마지막까지는 적용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중요한 결론 부분을 따로 떼어서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산상보훈을 강해하는 중에 계속해서 이 말씀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말씀하시고 한 말씀을 추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삶의 적용입니다.
우리의 실제생활에서 우리엑 필요한 삶의 권고와 삶의 적용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이나 어떤 진리에 대한 선언으로 설교를 끝맺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설교한 멧세지의 내용이 이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삶속에서 적용되기를 촉구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따라 살아갈 것을 결단하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예수님 설교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어떤 사건에 대한 설명은 단순한 지식전달입니다.
그러나 이 전달된 멧세지가 우리의 삶속에 적용되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삶의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하는 멧세지는 그 말씀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단순히 허공을 진동시키는 소리일 뿐입니다.
설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본문에 대한 해석이나 은혜 많이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의 적용입니다.
삶의 변화가 없는 은혜나 감격은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합니다.
설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적용입니다.
따라서 설교의 가장 중요한 순간은 이 설교가 끝마쳤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이 말씀이 내 생활속에서 어떻게 적용될 것이고 내가 이 말씀을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물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산상설교의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의 생활이 어떠해야만 하겠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따라는 제자들이 즉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그들의 삶의 모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살아야 하는 삶의 모습에 대한 결론을 내리시고 또다시 구체적인 적용 방법가지 제시합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설교의 이 마지막 부분에서 적용을 위한 지혜로운 선택으로 세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그 첫째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개의 길, 즉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이고 둘째는, 15절부터 23절까지 나오는 두개의 나무 그리고 셋째는 24절부터 27절까지의 두개의 기초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두가지의 길을 제시히시고 우리의 결단을 요청하십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넓은 문과 좁고 험한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 말씀 속에서 무엇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첫째로 두 종류의 문이 있음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시민은 좁은 문으로 들어감으로 그 삶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 감으로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좁은문으로 들어가니까 어렵습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이 어떻습니까?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어떤 분은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기는 쉬운데 믿고 나면 굉장히 어렵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은 어려운데 믿고 나면 굉장히 쉽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잘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렵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이의를 제기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복음은 단순한 것 아닙니까? 단지 예수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어렵습니까?”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예수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 나오는 것입니까? 성경읽고 기도생활하는 것입니까? 세례받는 것입니까?”
예 모두 맞습니다.
모두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만 나온다고 다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는 나오지만 예수를 안믿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교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주님께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실때 뭐라고 말했습니까?
막 1: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마 4:17)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은 참으로 쉽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 ‘회개’가 기독교의 구원,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참으로 복음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회개를 해야 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어렵습니다.
‘회개’ ‘회개’ ‘회개하라’고 말하니까 이 말이 기분좋은 소리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현대인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입니다.
“나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인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회개하라는 거냐?”
“나는 죄없는 깨끗한 사람이야”
저도 여러분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받으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회개하라’고 책망하기 보다는 ‘예수 믿고 구원 얻으라“고 선물을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회개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복음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협될 수 없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복음의 진수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여전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는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나의 삶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없이 주님없이 살고 있는 이 삶의 자리, 이 방향에서 내가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죄를 씻기는 유일한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넓은 길에서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전에 내가 주님과 상관없이 생활하며 내가 좋아하며 쫓던 것에서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값비싼 댓가, 뼈아픈 댓가를 나에게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회개는 이 뼈아픈 댓가와 함께 옛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 나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하며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그의 생각, 그의 주장, 그의 철학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절대로 나의 이 올바른 사상을 버릴 수 없다. 나는 내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대로 행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주장 나의 이 생각 고집을 버리지 않는 한 그것에서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그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 들이는 사건이 없이는 아무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회개가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날은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250년동안 무지막지한 핍박을 받아온 기독교인들에게는 정말 좋은 날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공인하고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만드는 그날이 기독교 역사의 비극의 날입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된 그날은 기독교인들의 좋은 계절이 찾아온 날이 아니라 기독교의 가장 어두웠던 날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기독교를 대한민국의 국교’로 선포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좋을 것 같지만 그날이 한국 기독교 역사의 가장 어두운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자 많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의 국교는 기독교다. 따라서 나도 기독교인이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없이 교회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기독교를 부패시킨 역사의 출발입니다.
중생없이 회개없이 교회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단체로 세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도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 우리나라의 국교는 기독교다. 다 기독교인이 되자. 교회로 가자. 다 구원을 받자.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교회도 출석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은 하나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날은 기독교의 가장 어두운 암흑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만든 독일, 영국, 덴마크, 희랍의 교회는 흑암의 영적인 잠을 자고 있습니다.
회개없이 중생의 체험없이 교회는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없이 중생의 체험없이 좁은 문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문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다른 어느 누구도 석가도 공자도 마호멧트도 이 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내가 죄인이라면 죄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다른 분이 있나 찾아 보세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입니다.
오직 갈보리 언덕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만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장차 그분은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날,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불신자들은 기독교를 독선의 종교라고 비웃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는 단하나 뿐입니다. 예수 믿는 것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병원에서 다 죽어가는 환자를 앞에 놓고 의사들이 모여 앉아서 중구난방으로 ‘이 방법으로 수술해도 좋고 저 방법으로 수술해도 좋겠지’ 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필경 그 환자는 죽게 됩니다.
간혹 우리가운데 ‘기독교도 좋아요 불교도 좋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지식과 이성을 총동원하여 “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느냐? 모든 종교는 다 같은 것이 아니냐?” 고 탁상공론식으로 반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진리를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 좋다는 것이지 진짜 자신이 있으면 그런 말을 안합니다.
자신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대사를 놓고 어떤 것이라도 좋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살아 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구원자입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중도가 없습니다.
약자 택일입니다.
좁은 문이냐? 넓은 문이냐? 영생으로 인도하는 문이냐? 아니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냐?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문으로 들어가고 있습니까?
둘째로 본문은 두 종류이 길이 있음을 제시합니다.
특히 이 본문의 좁은 문은 좁은 길로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본문에 보면 문과 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문으로 들어가야 길이 시작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서면 좁은 길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이 좁은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를 믿기는 상당히 어렵지만 일단 믿고 나면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실 그대로를 말씀 드리면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믿고 난 후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똑같이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 주는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서면 다시 좁은 길이 계속됩니다.
우리는 넓은 길에 대한 계속적인 유혹을 뿌리치고 계속해서 좁은 길에 굳게 서서 이 좁은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길을 걷는 동안 넓은 길의 삶속에서 누렸던 쾌락과 죄악의 습관이 계속해서 나를 유혹하고 괴롭힐 것입니다.
그래도 이 좁은 길을 걸어 가시겠습니까?
신앙생활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끊임없는 자기 극복의 흔련과 노력을 통해서 형성되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이 성화의 길이며 경건의 길입니다.
바울은 고전 9:25 이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 그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말합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교회에만 나오지 신앙생활을 구체적으로 훈련하는 경건의 연습은 게을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읽지 않습니다. 참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주일날 아침에 나오는 것으로 다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깨어있는 사람, 그보다 조금 나은 사람은 뭔가 변화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현대는 즉석에서 빨리 빨리 해치우는 시대입니다.
한번에 받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도 능력도 한번에 받으려고 합니다.
산에서 한번 반짝하고 받으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산에서 기도할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역사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모습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에 의한 계속적인 훈련에 의해서 내 인격이 이 말씀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뼈를 깎아내는 훈련과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경건의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길이 신앙생활의 길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쉽게 하려고 하지 마세요. ‘나는 그저 기독교인이다’ 이 ‘기독교’이란 명칭만 달고 다니지 마세요.
신앙생활은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려는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고통스러운 그러나 복된 경건의 연습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가끔 이렇게 묻습니다.
신앙생활의 비결이 없습니까?
다시 말하면 빨리 빨리 급히 해치우는 신앙생활의 비결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은혜받는 비결은 없을까요?
그러나 신앙생활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고 합니다.
‘영어 공부하는데도 노력외에는 왕도가 없다’고 합니다.
신앙의 길에는 왕도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을 붙들고 씨름을 하셨고 환경을 붙들고 땀을 흘렸습니다.
우리도 이 말씀 붙들고 이 말씀대로 바로 살아보겠다는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어려운 좁은 길입니다.
가정생활, 직장생활 그리고 모든 삶에서 나의 모든 의무를 다하며 말씀이 하라는 것을 지키며 살리니까 어렵습니다.
세상속에 우리의 발을 디디고 살면서 세상에 속해 살지 않으려니까 어렵습니다.
썩어져 가는 세상의 부패를 막아 보려는 소금이 될려니까 어렵습니다.
세상은 다 어두워져가는데 나만 홀로 빛이 되어 그 어두운 세상을 비추려니까 어렵습니다.
여러분 같이 생각해 봅시다.
친구가 나에게 욕할대 같이 욕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참고 그 욕을 다 받아 먹으려니까 어렵습니다.
이웃이 나에게 싸움을 걸고 한대 때릴때 나도 같이 한대 돌려대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를 용서하고 바보처럼 참으려니까 어렵습니다.
직장 동료가 상사에게 아첨하고 뇌물을 바쳐 진급할때 나도 같이 아첨하고 뇌물을 주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부정직한 방법을 행할 수 없어 진급하지 못하고 10년, 20년을 마냥 똑같은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은 어렵습니다.
이 신앙의 길은 나의 현실이 차갑고 냉혹하고 절망과 고통과 갈등과 아픔이 있더라도 이것을 피하지 않고 그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이상하죠?
여러분은 왜 이런 어려운 좁은 길을 가려고 합니까? 왜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선택합니까?
세번째로 중요한 사실을 제시해 줍니다.
두 종류의 목적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넓은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지만 좁은문 좁은 길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실까요? 13절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조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신앙의 길은 입학도 어렵고 과정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최후는 영광스러운 길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걸어가야 하는 이 신앙의 길이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이 길을 다 간후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위대한 보상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길을 갑니다.
내가 어려움을 참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 길을 갑니다.
이 길은 인기있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멸시합니다. 조롱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멀리합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길을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반드시 진리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소수가 걷는 이 길을 기쁘게 선택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종 우리를 향해 말합니다.
“너는 어리석게 왜 하나님을 믿니?”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더라도 이 길만이 참 진리이고 이 길만이 나엑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준다는 것을 확신하며 믿기 때문에 어떤 비난이 오더라도 기쁘게 이 길을 걷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사실은 다수가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이 언제나 진리입니다.
노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방주를 만드는 노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이 노아의 행동을 보고 정신병자의 미친 짓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이 어떻게 말하는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성경이 어떻게 말했는가?
이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이것 저것을 함께 선택하는 식은 성경의 길이 아닙니다.
차라리 이것이냐 저것이냐 둘 중에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할 이것이 성경의 길입니다.
성경은 신 30:15절에서 말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여호수아는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엘리야는 하나님과 바알 둘 중에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느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확실히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까?
분명히 “내 모든 것을 버려도 나는 그리스도를 따를만한 가치가 있다”라는 확신을 갖고 계십니까?
그런 분명한 결단 속에 그리스도 앞에서 방해가 되는 일은 즉시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셨습니까?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으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 나의 영혼이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영혼의 구원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거듭났습니까?
이 사실 때문에 고민하셨습니까?
십자가 상에서 매달린 에수 그리스도와 나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나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내 삶속에서 받아 들였나요?
그 분을 받아들이는 분명하고 확실한 이 결단과 이 선택이 내 삶속에 있습니까?
찾는 이가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결단을 통해서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영광스런 생명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이 길은 어떤 댓가를 치루고서라도 갈만한 가치가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마 19:16 이하에 나오는 어떤 부자 청년의 비극을 되풀이 하지 마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애정과 주님을 따르려는 열정보다 물질에 대한 더 커다란 욕망이 이 청년의 영혼과 마음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
“회개하고 예수를 따르라”
이 좁고 험한 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어려움이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을 가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길만이 영생이 있고 이길만이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여러분이 주님 믿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모든 삶이 만사현통하게 잘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보장은 제가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고 나서도 고통이 오고 고생도 할 수가 있습니다.
많은 어려움 앞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는 분명하게 약속 드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인생의 길을 걸어 가시면 그길에 주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주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맘속에 함께 계시는 영원한 보장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의 끝에는 영광스런 하늘나라가 우리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 결단과 신념속에서 이 길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에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셨습니까?
엘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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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939-8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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