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신문

[이윤석] 율법의 요구와 넘치는 은혜

복음뉴스 1 04.15 19:38

 

요한복음 살펴보기 11 - 율법의 요구와 넘치는 은혜
글 : 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제일교회)



[들어가며] 

 

우리가 가진 진리는 그것을 비교하고 대조할 때 그 가치와 진가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언어를 구사할 때 사람들이 자주 비유를 사용하곤 한다. 지난 호에는 율법과 은혜의 대조를 통해 모세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이번 호에는 율법과 진리의 대조에 대해 살펴본다. 이런 대조는 율법이나 모세를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에 대해서 생각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왔으니 율법은 더 이상 우리와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충분히 살펴보았다. 여기서 율법이라고 할 때, 그 용어는 구약의 대부분을 말한다. 예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께서는 구약이 자신을 증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더욱 분명하게 예수께서는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5:46)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모세의 율법을 무시할 수 없다. 요한복음 117절의 의도는 율법이 하나님께서 아주 영광스럽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데 있다. 그 율법이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었지만 그것은 예비단계에 불과했다. 그 율법은 은혜와 비교할 때도 그렇지만, 진리의 면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는 복된 구주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충만하게 나타난 진리와의 대조를 통해서 충만한 진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론]

 

1. 율법은 진리를 전달하되, 모형과 그림자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바울 사도가 말하듯이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2:16)이다.

율법과 진리의 차이는 모형 곧 그림자와 몸, 실체()간의 차이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8:4)”라고 말씀한다. 또한 구약의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라(9:9)”라고 구약의 장막을 규정해준다. 율법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며 모형과 실례와 그림자이다. 히브리서는 더욱 명확하게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10:1)라고 밝힌다.

그림과 암시와 실례는 진리 그 자체와 다른 것이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앨 수는 없다(10:4). 그것은 우리 주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일을 가리키는 그림자와 표상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원형이자 진리이자 실체이시다. 그래서 신약이 주님을 진리라고 부른 것이며, 주님 자신도 그렇게 부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14:6)”라고 하셨고, 자신을 세상의 빛”(9:5) 곧 육신이 되신 진리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의 진리의 내용을 잘 알고 있던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라고 표현함으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바쳤던 어린 양, 유월절 양과는 분명하게 다름을 밝힌다. 양들은 다 그림자이거나 실례에 불과하다. 모든 다른 양들의 피는 개혁의 때가 올 때까지, 잠시 죄를 덮는 역할만 했다. 그런데 마침내 때가 이르러 세상 죄를 지고 가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오셨다! 이렇게 율법을 통해 전달된 진리, 곧 암시하고 시사하며 얼핏 보여주는 것과 진리이신 성자 본체를 통해 충만하고 영광스럽게 찾아온 진리와 대조된다!

 

2. 율법의 불완전한 진리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진리의 대조됨을 보자.

히브리서는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 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1:1)라고 시작한다. 예수께서 태어나실 장소, 시기, 있을 일들에 대해 계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 모세의 글과 선지서를 포함한 구약성경 전체의 특징이다.

 

첫째로 중요한 차이는 진리 자체이신 주님과 비교할 때, 율법은 그 불완전함을 보여준다. 진리이신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우리 주와 구주되신 복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진리가 들어 있다. 그 진리는 율법처럼 단순한 암시가 아니며, 진리의 조각들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온전한 진리이시다!

 

두 번째 차이점은 구약은 약속들이며,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임에 있다(벧후1:4).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하여(3:15), 계속 약속을 주셨다. 그래서 구약의 위대한 성도들에 대해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한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약속과 소망, 가능성밖에 없는데도 이를 굳게 붙잡았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바로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11:1)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그렇다면 진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로 인해 왔을까? 먼저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라고 말씀함으로, 그리스도가 모든 약속의 성취이심을 강조한다. 구약을 읽으면서 모든 약속이 나와 있는 것을 적어보라! 그러면 그리스도가 모든 약속의 해답이요 성취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차이점이다. 모세를 통해 영광스럽게 주신 율법은 위대했지만 약속과 가능성, 소망까지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성취해 주셨다.

 

3. 우리 주와 구주되신 복되신 그리스도와 모세를 대조해 보자.

 

첫째 모세와 주님의 차이점은 먼저 집과 설계자의 차이이다. 히브리서는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 믿는 도리의 사도,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라고 말씀한다. 그분은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3:3)과 같다. 히브리서 기자는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3:5)라고 권면한다. 모세와 집 주인의 차이는 집 자체와 집 지은 자의 차이이다. 집 지은 자가 집보다 낫다고 해서, 집을 우습게 보거나, 쓸데없다거나 무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차이이다. 율법은 지금도 존재하는 하나님의 법이다. 그러나 모세와 주님의 차이는 집 자체와 집의 설계, 제작, 건축자와 같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둘째는 종과 아들의 차이이다. 모세는 위대하지만 종에 불과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지만 주인의 아들이 어리다고 해도 비교할 수 없다. 모세는 위대한 종이었지만, 그러나 아들은 다르다. 그 아들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1:2) 라고 말씀한다. 모세를 통해 받은 진리는 종에게 받은 것이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진리는 하나님의 아들께 직접 받은 것이다. 그래서 본문 요한복음 1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셋째는 진리에 관한 증거나 가르침과 진리 자체와는 대조된다.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3:5)”하였다. 모세는 그 이상의 일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께는 충만한 진리가 있다. 참빛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 비추는 빛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요한이 염두에 두는 특별한 적용을 살펴보자.

 

1. 요한은 자신이 말하는 진리가 하나님에 관한 진리임을 밝히고 있다.

궁극적 진리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다. 우리가 말하는 진리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가리키는 말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도요한은 18절에 드디어 이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어 기뻐했다.

 

그래서 첫째로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시작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 형태나 모양을 본 사람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온전히 깨달은 사람이 이제껏 없었다는 뜻이다. 모세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갔던 사람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철학자들이 묘사하는 하나님을 자주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본 적이 없다. 전부다 추측일 뿐이며, 추론일 뿐이다. 그저 그들이 할 수 있다는 것은 다만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 것 뿐이다(17:27). 그들이 하는 말은 전부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인간 견해에 근거한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둘째로 모세는 철학자들과 완전히 다른 차원에 속해 있다.

그는 의자에 앉아 하나님에 대한 내 생각과 의견은 이렇다하고 한 적이 없다. 그는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은 자다. 그가 받은 진리가 무엇인가? 출애굽기와 같은 진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시내산에서 율법과 다른 많은 규례들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5:4) 물론 모세가 실제로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은 아니다. 여기서 [대면했다]는 말은 그만큼 친밀하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갔고 광채가 얼굴에 나타났다(고후3). 그는 40일 동안 하나님과 함께 지내며, 계시를 받았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진리를 아는 지식을 주어 백성에게 전하게 하셨다. 십계명과 그 외에 많은 진리가 바로 그것이다. 선지자들도 거룩한 영감이 임할 때 황홀경에 빠지곤했다. 그러나 모세는 시내산에서 특별히 친밀한 상태로 하나님과 맞대어 40일을 보냈다! 이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다.

 

셋째, 모세가 율법만 받은 것이 아니라, 주의 영광을 구했다. 출애굽기 33장에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셨다(33:18, 20).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위해 비슷한 일을 해주시겠다고 하신다. 그가 기록한 출애굽기는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33:21-23). 이것은 참으로 놀랍고도 특별한 사건이었다. 모세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등을 얼핏 보았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처럼 계시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비상하고 놀라운 진리를 받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는 그 내용을 반복해 들려주는 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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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뉴스 04.15 19:39
- 본문에서 계속 -

넷째, 구약성경도 마찬가지다. 주님이 아브라함에 대해 말씀하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그는 멀리서 메시야를 보았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알려준다. 그분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공평하심을 알려준다. 그래서 그것이 과거에 사람들을 두렵게 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어떤 한계가 있는가? 베드로 사도는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 하니라”(벧전1:10,11)라고 하였다. 선지자들은 진리의 통로였다. 그들을 통해 진리를 주셨다. 그러나 그들이 진리를 다 이해했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진리를 연구하고 이해하고자 애를 썼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언제 일어날지, 어떻게 일어날지를 상고했다. 자신들이 전하는 진리를 기이히 여기며 이해하고자 애를 썼다.

다섯째,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위대한 선지자들 족보의 마지막은 세례요한이다.
그는 주님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눅7:28) 하셨던 사람이다. “그는 이 빛이 아니라,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자라 1:8). 세례요한은 그 이상 할 수가 없었다. 세례요한은 주님에 대해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1:15) 했다. 주님이 세례요한에 대해 뭐라고 하시는가?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요5:35, 36)라고 하셨다. 마지막 선지자이자 선구자이자 사자였던 요한은 진리의 증인에 불과했다. 우리에게 귀중한 영적 정보를 주고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어느 정도 가르쳤지만, 그 이상은 하지 못했다.

2.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가 찾아왔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그분은 독생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첫째, “아버지 품 속에 있는”이란 말은 그만큼 가깝고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다. 비밀을 털어놓는 사이라는 뜻이다. 모세는 부르심을 받아 산에 올라갔다. 아버지 품 속에 있었는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그를 바위틈에 두시고 손으로 덮으셨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분,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분,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비밀을 긴밀히 공유하시는 분,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친히 오신 것이다! 세상의 위대한 철학자들은 다 땅에 매인 사람들이요, 땅에 속한 사람이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으며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함부로 추측하며 모독하는 모든 말은 규탄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오신 분이며, 하늘에 계신 분이며,  하나님 품속에 있는 분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다.

둘째, 주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8:58) 말씀하신다. “너희는 아브라함을 의지하며 그를 조상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가 나기 전부터 있었다. 나는 전에도 항상 있었고 앞으로도 항상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10)라고 하셨다. 이보다 더 확실한 선포의 말씀은 없다! 그런데 더 도움이 되는 말씀이 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곧 떠나신다는 말씀을 할  때. 그들은 마음에 크게 근심했다. 그때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셨다. 그때 여전히 기뻐할 수 없고 만족할 수 없었던 불쌍한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했다. 그때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5:35,36)이다.

셋째, 바울은 “우리가 다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잠간 지나가는 등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춰주었는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려고 비추셨다! 그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넷째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설명해    주셨고, 나타내 주셨고 알려주셨다!

3.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영광이 충만히 나타나는 것을 본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 그 능력, 영광, 사랑 인내하심, 의로우심을 보고 살아간다!

1) 주님은 어떻게 하나님을 설명하며 나타내주셨는가?
첫째, 주님은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직접 ‘거룩하신 아버지여!’라 부르시고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둘째로 감사하게도 탕자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아노라고 자부했지만, 사실은 눈이 멀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방탕한 자식이라도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심정을 가진 분이다. 그토록 고대하던 자식이 돌아올 때 뛰어나가 맞아주시는 분임을 가르쳤다. 이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셋째, 더 나아가 주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계시해 주셨다. 주님은 자기의 자비와 긍휼을 통해 고통당하고 곤경에 빠진 자들을 언제든지 돕기 위해 걸음을 멈추셨고, 아무도 멸시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마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12:20)고 말한다. 주님은 이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요, 하나님의 모습임을 나타내셨다. 넷째, 무엇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계시해주셨다.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모습, 그의 삶과 생활,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에 대한 충만한 계시, 최종적인 계시가 여기에 있다.

2) 이제 우리는 주님 안에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지혜를 보게 된다.
바울 사도는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3)라고 말씀한다. ,왜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을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구약이 말하는 유월절 어린 양은 하나의 그림이며, 신뢰할 수 있지만, 이해에는 한계가 있다. 이것이 모형과 그림자의 한계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느니라”(고전2:2).  이것은 율법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선포한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1:30).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두셨다. 곧 그 안에 지혜를 두셨고, 의롭게 됨을 두셨고, 성화를 그 안에 두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 있게 하셨다! 모세가 이런 것을 가르쳤는가? 당연히 가르치지 못했다. 가르칠 수 없었다. 왜? 이 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다. 그리스도가 머리요, 우리는 지체이다!

3) 이제 우리는 주 안에서 모든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깨닫는다.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하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고 했다. 오직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 진리를 알려주셨다. 그 전에는 암시와 시사로만 알았지만, 이제 명백하게 공개적으로 밝히신다.

[나아가며]

주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 갈 길은 오직 예수뿐이시다! 모세로는 부분적인 진리이다. 아버지로는 알 수 없다. 아버지로 알 수 있고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른가이다! 이제 아버지는 우리를 긍휼이 여기신다!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다! 아들의 영, 양자의 영을 주셨다! 우리는 더 이상 멀리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 아버지로 부르며 가까이서 예배드린다! 율법에서 두려움만으로 예배드렸던 게, 이제는 담대함과 확신으로 보좌 앞에 나아가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르며 나아갈 수 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아들만 우리에게 하나님을 밝히 나타내주신다!  하나님께 감사하자!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지식과 진리에 이르자!

[편집자 주 : 2022년 4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1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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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이선경] 찬양의 개정판은 어떻게 써야 할까? 복음뉴스 05.20
270 [이민철] 성경을 변호하지 않겠는가?(Shall We Defend The Bible?) 복음뉴스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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