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신문

 

[정관호] 전도, 어떻게 할 것인가?

복음뉴스 0 2022.11.17 18:21

제목 : 전도, 어떻게 할 것인가(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 정관호목사(뉴욕만나교회)

 

“15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누가복음 14:15~24)

 

안식일에 생긴 일

어느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 가운데 지도자 되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식사에 초청한 그 바리새인에게 잔치를 베풀려면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갚음(보상)을 받겠음이라하셨습니다.(14:13~14) 이 말씀을 듣던 한 사람-아마 이 사람 역시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everyone/유대인들 모두)는 복됩니다.” 이 말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유명한 오늘의 본문 큰 잔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큰 잔치 비유

어떤 마을에 사는 큰 부자 하나가 큰 잔치(Big Feast/Big Dinner/Banquet/대연회/Party)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서 잔치가 베풀어지기 이전에 1차로 미리 종을 보내어 잔치에 참여해 줄 것을 통보하고 그 수락을 받았습니다. 그 초청에 응한 사람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또 갈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잔칫날이 다 되었습니다. 주인은 만반의 잔치 준비를 다 해놓고는 2차로 다시 종을 보내어 이미 초청에 응하기로 한 자들에게 약속대로 잔치에 참여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이렇게 1, 2차를 통해 잔치에 초청하는 것이 당시 통상적인 습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차에 수락했던 자들이 하나같이 그 초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잔치를 베풀려던 그 주인이 그들로부터 거절당한 셈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 초청받은 손님은 나는 밭을 샀으니 아무래도 밭에 나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청컨대 나를 용서(양해)하여 주십시오.”하면서 거절하였습니다. 두 번째 손님은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시험하러 갑니다. 청컨대 나를 용서(양해)하여 주십시오.”하면서 거절하였습니다. 세 번째 손님은 저는 장가들었으니 가지 못하겠습니다.”하면서 거절하였습니다.

얼핏 듣기에는 이 초청을 거절한 자들의 사연들은 다 이해할 만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집주인은 그 사실을 보고 받고는 기분이 언짢은 불쾌수준을 넘어 진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주인의 대처 방안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자리에서 잔치를 취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는 이미 준비된 모든 음식물을 그냥 내버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상치 못했던 다른 손님들을 초대하는, 그래서 그들로 잔치 자리를 채우는 계획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종에게 분부하여 시내의 거리와 골목에 나가서 가난한 자들(거지들),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 저는 자들을 데리고 오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잔치 자리가 비어 있음을 보고 받자 주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 종을 동네 외곽 지대인 길과 산울타리 가로 보내 아무라도 강권하여(억지로라도 또는 아주 잘 설득해서라도) (잔치)집을 채우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초청을 받았다가 거절한 사람들에 대하여는 그들을 그 잔치에 다시는 들이지 말고 돌려보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

우리는 이 비유에 나타난 몇 가지 내용들을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왜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자신을 식사에 초청한 바리새인과 또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 되도다한 또 다른 유대인(바리새인)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입니다. 사실 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천국) 잔치가 자기들 곧 정통적인 유대인들에게만 속해 있다고 자부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고 그것은 이방인이나 또는 비록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소외된 자들(가난한 자들, 몸이 불편한 자들, 맹인들, 저는 자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형식적인 종교 생활이었고 실속은 없고 겉만 번드르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self-righteousness)로 자기만족을 삼고 있었고 자신들처럼 살지 않는 자들을 조롱하며 경멸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들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보여주고 교정하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바리새인들이 오늘의 이 큰 잔치 비유에 나타난 잔치 초청을 거절한 세 부류의 사람들과 동일한 자들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초청을 거절한 그들은 말로는 자신이 천국」「천국 잔치에 들어가서 참여하고 그 복을 누리기를 원한다고 주장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말로는 그것이 좋다, 좋은 것이 복된 것이라고 주장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말과 행동이 다른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주인이 1차로 종을 그들에게 보내고, 2차로 확인하기 위해 보낸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모세 등 선지자들을 통해서 또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사도)들을 통해 천국 복음을 제시하고 확증한 것과 다름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문제와 사업상의 문제를 이유를 들어 하나님의 초청-하나님 나라의 초대-을 미루어 버리고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활, 삶에 비추어 볼 때 그 잔치 초청을 거절한 자들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대의명분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조금도 잘못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그 상황을 살펴보면 그들이 얼마나 교묘하게(?)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거절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밭을 산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밭을 조사하는 일은 밭을 구입하기 전에 하는 것이지 밭을 구입한 후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약속한 중대한 약속을 파기하고 그 일을 하겠다는 것이 오히려 어불성설입니다. 핑계에 불과할 뿐입니다.

두 번째, 소 다섯 겨리를 산 사람도 동일합니다. 소 검사는 소를 사기 전에 미리 다 해두어야 하는 것이고, 혹 사후 소 검사를 한다고 해도 이미 약속한 잔치에 참여하고 난 다음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한 행동은 잔치 참여를 거부하는 일종의 핑계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 번째, 신혼부부 가운데 신랑 역시 그렇습니다. 그 신랑 역시 하루 낮 또는 저녁에 거행되는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은 실소케 하는 행위입니다. 신부를 대동하고 함께 그 즐거운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답고 좋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가기로 한 첫 번째 초청을 수락해 놓고 이미 다 준비해 놓은 잔치에 대한 두 번째 초청을 거절한 것은 그 이유가 전혀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초청한 집주인에게 공공연한 모욕감을 주는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이 크게 대노한 것입니다.

 

큰 잔치 비유가 주는 교훈

그렇다면 이 큰 잔치 비유를 통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 주님은 이제 이 천국 잔치(하늘나라 잔치, 하나님의 나라 잔치)를 이미 (Here & Now) 배설해 놓았으며 이에 초대받은 자는 그 초대에 마땅히 응해야만 그 축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초청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이런 저런 모양으로 핑계를 대가며 완강하게 거절하는 자는 결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거절될 수 있음도 보여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14:24)

둘째, 만일 유대인들 특히 그들 종교적인 지도자들이 이 천국 잔치를 거절한다고 해도 이 천국 잔치는 취소되는 것이 아니고 소외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열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내의 거리와 골목에 있는 소외된 자들은 다름 아닌 소외된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또한 길과 산울타리 가에서 만난 자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는 우리들에게 전도와 선교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사명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먼저 교회에 다니고 있는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맛보고 체험하고 향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로 이루어지는 이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이런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죄 용서, 사랑, 은혜, 축복, 성도 교제,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겨 나가는 큰 믿음 등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뿐입니까?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복음 증거 하는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우리의 이웃에게, 소외된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참으로 하나님 없이, 예수 그리스도 없이, 소망 없이, 몸과 마음과 영혼에 상처받은 채로 살아가는 자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신 하나님이시라면 그들의 상처도 싸매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이 같은 하나님 나라의 복된 천국 잔치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관심은 점차 폭넓은 선교에까지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당면한 시급한 문제 때문에 복음 전도와 해외선교에 눈멀어서야 되겠습니까? 북한 선교, 조선족 선교, 중국 선교, 중남미 선교, 아프리카 선교! 우리의 손길 닿을 때는 여전히 많습니다.

 

문제의 핵심

문제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진정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 천국 잔치에 참여하고 있느냐 하는 사실일 것입니다. 교회 회원으로 있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초청을 거절한 세 부류의 사람들처럼 자신의 편리, 성공, 욕망, , 인기, 쾌락 때문에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절한다면, 그처럼 큰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 그렇게 큰 불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잔치를 베푸신 하나님을 모독함이요,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입니다. 일상적인 일에 분주하여 또는 태만하여 영적인 각성을 갖지 못하고 영원한 세계를 잊고 산다면 얼마나 잘못된 인생을 사는 것입니까?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상적인 일들만 하다가 더 중요한 영적인 삶을 게을리할 때 홍수로 심판을 다 당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산상 설교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17에서 이렇게 로마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우리 모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 나라, 천국 잔치에 참여하면서 그 놀랍고 경이로운 복을 누리며 또 소외된 자들, 복음이 필요로 한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그들을 강권하며 하나님의 집(천국 잔치 자리)을 채우는 천국 복음의 증인이 다 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만나 그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 몇 가지 구체적인 전도 방법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전도하기 위해서 전도 대상자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 불릴 정도로 소외된 자들, 잃어버린 자들, 병자들, 외로운 자들, 문제와 고통거리가 있는 자들에게 친구가 되어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교인이나 그리스도인들이기에 그냥 무심코 지내기 쉽습니다. 또 그렇게 지내다 보면 그 일이 매우 편하게 느껴집니다. 그런 주변 환경에 익숙해지다 보면 전도 대상자를 찾지 못하고 전도를 제대로 한 번도 해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제 주변에 있는 불신자들 또는 교회생활이나 신앙생활 이탈자를 찾아 나서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자들이 들어 있는 또는 불신자들이 섞여 있는 그런 모임이나 동아리를 찾아 나서십시오.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 주고, 그들을 도우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십시오. 필요하면 영어회화 모임에도 나가시고, 컴퓨터를 배우러 나가시고, 그림 그리기, 음악 감상하는 모임에도 나가십시오. 불신자들에게 접근하여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나타내 보이면서 그들에게 질문도 하고, 질문도 받고 서로 대화하면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둘째, 일상적인 대화만 나누지 말고 복음을 말로 표현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전도한답시고 생활로만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만을 나타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직접 복음을 말로써 드러내야 합니다. 전도 대상자인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지난 과거의 죄악 된 삶을 돌이켜 회개로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당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주와 구주가 되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로만 인생의 복된 삶, 풍성한 삶,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음을 강조하십시오. 그리고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결단을 촉구하십시오. 그리고 교회로 인도하십시오.

우리는 노방전도도 힘써야 하지만, 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들과 좋은 친구관계를 맺어가면서 관계 전도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통한 복된 삶, 풍성한 삶, 위로와 기쁨이 넘치는 삶, 사랑과 거룩이 넘치는 삶이 있음을 증거하십시오. 전도는 일종의 영적 전쟁입니다. 마귀와 세상나라에 속한 자를 복음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놓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와의 싸움입니다. 그리 쉽지 않습니다. 전쟁이고 전투입니다.

 

여러분 모두 주변에 있는 여러 사람들-불신자들과 신앙생활 이탈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교회로 인도하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 2022년 10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7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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