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신문

 

[이종식]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말씀을 선포하는 자를 사람들 앞에서 세워주신다!

복음뉴스 0 2022.11.17 18:29

제목 :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말씀을 선포하는 자를 사람들 앞에서 세워주신다! 

글 : 이종식 목사(베이사이드장로교회)

 

나는 목회하면서 참 신기한 것은 내가 믿음으로 선포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것을보며 내가 특별나서 그런가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역시 그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이 나의 믿음의 선포를 그대로 이루신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종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원리를 깨달은 후부터 언제나 하나님께 ‘연약한 나의 믿음의 선포를 성도들 앞에서 이루시사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드러내옵소서’라고 기도드린다.    

 

창세기 21장에는 아브라함이 살기 위하여 자기의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다가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빼앗기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중재하심으로 사라를 구해 내는 일을 하셨다. 이런 장면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불순종의 삶을 살았던 것을 알게 된다. 그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면 비겁하게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창세기 21장 17,18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으며 아브라함이 분명히 잘못하여 어려움을 당하였으나 그의 기도를 통하여 아비멜렉의 집안의 닫힌 태를 열게 하신 것이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아브라함을 집중해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그런 일을 하신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아브라함 같은 그런 나약한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아비멜렉을 축복할 때 그 집에 닫혔던 태의 문이 열리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사실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통하여 자신을 높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자기 같이 연약하고 범죄한 인생을 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려야 했을 뿐이다.  

 

특별히 창세기 21장 7절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선지자의 직분을 주셨다는 것을 밝히시고 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여 전하는 자로서 그 말에 힘이 있는 자이다. 그 이유는 선지자는 자기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일을 통해 목사가 성도들 앞에서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보내신 선지자라는 것을 자각하고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목사의 연약함 중에서도 그분의 영광을 위해 목사가 믿음으로 선포한 대로 이루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한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로서 나의 기도는 한결같다. 내가 믿음으로 교회 앞에서 선포한 것을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셔서 성도들로 하여금 이 목사가 저들에게 한 교회의 사자로 보내심을 받게 되었음을 인정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내가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는 목사로서 강단에서 말만 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로 보여 줄 수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전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적같이 내가 믿음으로 선포한 대로 모든 것을 이루게 하셨다. 그래서 내가 목사로서 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 주셨다.  

 

우리 교회가 제 1교육관을 건축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 당시 우리 교회는 교회 앞에 있는 두 집을 한인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교육관 부지로 구입하게 되었다. 그때 한인 은행의 행장 되시는 분은 교회가 50만 불을 다운하고 대출을 얻어 두 집을 사면 교육관을 건축하는 200만 불 되는 비용은 은행이 다 준다고 하여서 그대로 믿고 나는 온 교회 성도 앞에서 우리 교회는 앞으로 교육관 건축을 위해 작정 헌금 같은 것은 안 하고 오직 기도만 하면 될 줄로 믿는다고 공포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해인 2008년도에 경제가 어려워져서 약속한 은행이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 놓은 두 집터 위에 세울 교육관 건축을 위한 대출을 받기가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나는 성도들 앞에서 다시 말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더 좋은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습니다. 저는 이 강단에서 제가 선포한 대로 될 줄로 믿으니 계속 함께  기도합시다. 그리고 나는 매일 예배실에 들어가서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제가 강단에서 말한 것을 이루게 해주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교회를 위해 세우신 나와 함께 하시고 살아계심을 나타내주세요. 주님, 작정 건축헌금을 하지 않고 교육관을 지을 수 있게 하옵소서! 더 좋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옵소서!’ 그리고 1년이 지난 후에 교육관을 짓기 위해 우리 교회 본당을 건축할 때 처음으로 대출을 받았던 토레스라는 은행가를 찾아가게 되었다. 

 

나는 그분에게 교회 교육관 건축을 위해 돈이 필요한데 다운페이할 돈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웃으면서 다운페이할 돈도 없으면서 무슨 건축을 하려고 하냐고 하였다. 그런데 그분은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 교회를 도와주려고 교육관 건축을 위해 사 놓은 집을 조사하고 난 후에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가 사놓은 땅값이 많이 올라 다운페이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경제가 어려워지자 나라가 모게지 이자율을 많이 낮추어서 이전에 본당을 지을 때 받은 대출보다 2포인트나 적게 이자율을 정하여서 주었다. 그리고 먼저번 본당을 지을 때 빌려준 대출의 이자도 똑같이 떨어뜨려 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계산해 보니 교육관을 지어도 지금까지 내던 모게지 페이먼트와 별로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건물을 하나 더 짓고도 모게지 페이먼트는 이전과 같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건물 하나를 공짜로 얻게 된 것이었다. 그때 나는 왜 하나님이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우리 교회가 건축을 할 수 없게 허락하신 이유를 알았다. 이러한 놀라운 일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소식을 당회에 알리고 제직회에 알렸는데 “그것은 거짓말 같이 들린다”고 말하는 분이 있었다. 내가 무엇인가에 속고 있는 것 같다는 말도 했다. 건물을 짓는 비용을 다운페이 없이 빌려주고 교육관을 지어도 이전의 모게지와 비슷하게 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정말 일어났고 그대로 되었다.  강단에서 공포한 대로 건축 작정 헌금 없이 모게지도 오르지 않고 교육관을 거져 짓게 하신 것이다. 나는 이런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목사인 나와 함께하심을 우리 성도들 앞에서 그대로 보여주셨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앞날도 목사인 내가 교회를 인도할 때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형통함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성도님들 앞에 드러내실 줄로 믿는다.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목사로서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신명기 28장 1절에서 6절을 보면 어떤 자에게 형통함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여주신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많은 성경학자들이 이 말씀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의 말씀을 따랐던 자들을 형통함으로 인도하신 경우가 95퍼센트 이상 되기 때문이다. 그  나머니 5퍼센트의 사람들은 특별한 사명이 있기에 순종 가운데서도 고난을 겪다가 이 세상을 떠난 경우도 있다. 예레미야가 그랬고, 에스겔이 그랬고, 거지 나사로가 그랬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신앙의 위대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 그들이 하는 일이 형통함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요셉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다. 물론 그들의 삶에 고난이 전혀 없고 그들의 형편과 신분이 늘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처지에서도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의 형통하심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심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나그네로서 이방의 왕에게도(이방의 왕인 아비멜렉에게도 형통함을 보여 주었고, 요셉은 종으로서 주인인 보디발 장군에게 형통함을 보여주었고, 다윗은 목동으로서 사울 왕과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형통함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그들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함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창세기 21장 22, 23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22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3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서 행하여 보이라”  

 

이 말씀을 보면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동맹을 맺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 말씀은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 장관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하시는 것을 보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비멜렉이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일까? 그 첫째는 이 전에 아비멜렉이 사라를 자기 아내로 취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보았고, 둘째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게 되었다는 기적을 들었을 것이고, 그 셋째는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살면서 물을 구하기 어려운 그랄 땅에서 우물을 팔 때마다 물이 나온 사건이다. 그래서 아비멜렉과 그의 종들은 처음엔 그 우물을 빼앗는 일을 하다가 두려움 가운데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과 손자에 이르기까지 서로 대적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장면은 우리 믿는 성도들과 목사에게 참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말로만 계신 분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 뜻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들의 삶에 직접 관여하셔서 그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 믿음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우리가 하는 일이 형통하게 되는 일을 통해 주변의 모든 불신자들이 우리를 하나님을 믿는 자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가면서 형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면서부터 형통이라는 말을 축복의 말로 자주 사용한다. 나는 형통을 생각할 때 그것은 마치 운전할 때 신호등이 가는 곳마다 파란 불로 바뀌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신호등은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아닌데 그것이 신기하게 내가 가는 곳마다 파란불로 바뀌는 일이 생긴다면 참 기분이 이상해진다. 내가 특별한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일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형통함을 주실 때는 그런 우연한 것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막힌 것 같은데 해 보면 길이 열리고 또 막힌 것 같은데 해 보면 또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이루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 건축이 그랬다. 뭐가 잘 안 돼서 막히게 될 때 시도하면 길이 열리고 그러다가 또 막히는 것 같은데 시도해 보면 더 좋은 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2번이나 예배당에서 쫓겨났던 연약한 교회가 31년 동안 지금과 같이 여러 부지를 사서 어느덧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동네에 사는 미국 분들이 우리 교회와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심을 인정하게까지 되었다.)   

 

앤더슨이란 백인 할아버지는 우리 교회가 Bell Blvd.하고 45 Drive에 있을 때 옆집에 사시는 믿는 분이었는데 우리 교회가 이곳으로 이사를 들어오자 나를 교회 앞에서 만나서는 “당신 교회는 숟가락 두 개로 시작한 교회인데 이렇게 된 것을 보면 정말 놀랍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느낀다고 하였다. 그분의 의미는 아주 작게 자기 옆집에서 예배드리던 교회가 이렇게 넓은 공간을 차지하게 된 것을 보고 감동해서 한 말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 옆집에 살던 ‘Mrs. 워드로우’라는 분은 우리 교회가 이곳에 들어와서 이 동네 전체가 복을 받는 것을 보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나의 손을 한번 만져보자고 하기도 했다. 하나님이 목사인 나와 함께하심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멘딩고라는 주민회 회장이었던 분은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함께하심을 느낀다고 하면서 교회 주변에 집만 나오면 우리 교회에 소개하였다. 그리고 개 끌고 다니는 아저씨란 별명을 가진 톰이란 분은 어느 날부터 나를 레버렌드 트럼프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얼마 전엔 교회 옆에 집이 나왔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것을 보면 이 동네의 주민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우리 교회가 형통한 것을 느끼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이런 일을 통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특별히 교회에 사자로 세워진 목사는 세상에서 형통한 삶을 살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나는 부자가 되고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형통한 삶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섭리 가운데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성도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에 등장하는 족장이나 인물들은 95퍼센트 이상 형통함 속에 수많은 사람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느끼게 하였다. 그들의 위치가 종이었든지, 나그네였든지, 포로 중에 있었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형통함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였다는 것이다. 그 말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형통함을 보여 줌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특별히 목사로 세워진 자들은 어떠한 곳에서든지 믿음으로 담대히 살아서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함의 은혜를 입어 날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 2022년 10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7호에 실린 글입니다.

 

ⓒ 복음뉴스(BogEumNews.Com) 

Comment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422 [사설] 어른이 되십시요! 복음뉴스 2022.12.21
421 [김동욱] 마무리 복음뉴스 2022.12.21
420 [조원태] 모르드개 형에게 복음뉴스 2022.12.21
419 [이종식] 나의 목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방법 복음뉴스 2022.12.21
418 [이윤석]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 복음뉴스 2022.12.21
417 [김정호] 아직도 나를 부끄럽게 하는 목회 스승 복음뉴스 2022.12.21
416 [강유남] 새 계명 복음뉴스 2022.12.21
415 [한삼현] 이사야 - 서론 복음뉴스 2022.12.21
414 [조진모] 인간의 부패에 대한 반면교사 복음뉴스 2022.12.21
413 [정관호] 말, 어떻게 할 것인가? 복음뉴스 2022.12.21
412 [이선경] Total Praise 복음뉴스 2022.12.21
411 [이민철] 창조주 하나님 (2) 복음뉴스 2022.12.21
410 [유재도] 무엇이 예수님을 권위있는 교사로 만들었는가? 복음뉴스 2022.12.21
409 [김현기] 카메라 렌즈 조리개에 대하여 복음뉴스 2022.12.21
408 [김경수] 외로움을 치유하라 복음뉴스 2022.12.21
407 [한준희] 신학이란 무엇인가? (1) 복음뉴스 2022.12.21
406 [조희창] 로닝 커닝햄을 만나다 복음뉴스 2022.12.21
405 [오종민] 무엇을 남기고 떠나시겠습니까? 복음뉴스 2022.12.21
404 [양춘길] 필그림과 메이플라워 복음뉴스 2022.12.21
403 [박시훈] 감사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복음뉴스 2022.12.21
402 [김혜영] B와 D 사이 복음뉴스 2022.12.21
401 [김용복] “목사님이시죠?” “아닌데요.” 복음뉴스 2022.12.21
400 [곽상희] 물고기 사랑 복음뉴스 2022.12.21
399 [임현주] 그릇 이야기 복음뉴스 2022.12.21
398 [배성현] 머리 둘 곳 없는 예수 복음뉴스 2022.12.21
397 [박인혜] 가을 단풍 복음뉴스 2022.12.21
396 [양희선] One Way Ticket 복음뉴스 2022.12.21
395 [사설] 한심했던 뉴저지교협 제36회 정기총회 복음뉴스 2022.11.17
394 [김동욱] 바른 호칭을 사용하여 기도하자! 복음뉴스 2022.11.17
393 [강유남] 죄의 시작과 본질 복음뉴스 2022.11.17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