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신문

 

[이윤석]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

복음뉴스 0 2022.12.21 18:24

제목 :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 요 2:13-17

: 이윤석 목사(NY 부르클린제일교회)

 

[들어가며]

 

요한복음의 대 주제는 풍성한 생명이다.(10:10).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사건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자신의 충만한 축복을 주시려는 교훈의 말씀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주님을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분은 주님이시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활동하시는 바로 그분이시다. 어떻게 활동하는가를 결정하시는 분도 그분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의 충만함과 또한 은혜 위에 은혜를 받고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이 질문을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왜 그런가? 우리 주님의 모든 행동은 그런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지금 유월절 기간에 율법이 명한대로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주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성전에 도착했는데, 바깥 정원에서 장사꾼들은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았고, 환전상들이 유통되는 현실 화폐를 성전에서 사용하는 돈으로 바꿔 주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이 환전상들의 상을 엎으시고 양과 소를 밖으로 내쫓아 버리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고 명령하심으로 공포감을 가득 채웠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다.

 

I. 그러면 여기서 우리 개인이 받아야 할 교훈이 무엇일까?

1. 우리가 먼저 근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영혼은 주님이 들어와 거하시는 성전이란 것이다.

1) 이 말씀의 의의는 무엇인가?

이것은 기독교 구원문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먼저 우리 기독교의 구원은 우리가 죄 용서받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옥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우리가 새로운 성품을 받았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지금까지 말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스러운 진리요 감사의 조건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이상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것이 무엇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 바로 이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2) 우리 주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은 떠나지만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란 위로와 확신을 주셨다.

그때 하신 말씀이 중요하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 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14:20-21,23).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경험할 수 있는 충만함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이 모든 성도들의 심령 속에 거처를 삼는 것이다. 우리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리라고 말씀한다(고후 6:16). 바울 사도는 권면의 말을 하기 전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라고 우리의 존재됨을 분명히 깨닫게 한다. 이것은 신앙과 관련하여 우리 마음 속에 궁극적으로 간직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기도할 때도,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3:16,17)라고 기도한다.

 

2. 우리의 신앙생활은 늘 현재에서 만족해서는 안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들어와 거하시는 성전으로의 우리 영혼을 인정하기까지 배워야 한다.

1) 이 성전이 조건은 무엇인가?

우리는 먼저 이것을 질문해야 한다. 지금 주님의 질문은 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대상이다. 지금 주님은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 관심이 없으시다. 분명 그리스도인에게 말씀한다. 그는 지금 성전에 계신다. 이방인들을 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대상이다. 이것은 성도들과 관련해서 되어진 일이다. 그가 오셔서 믿음으로 성도들의 심령 안에 거하게 될 일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말씀이다.

 

2) 이 메시지는 성도들의 영혼 상태가 예루살렘 성전과 비슷하다는 것을 말씀한다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집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이 장소가 인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채우는데 쓰여지고 있다.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것이 합법적인 활동이지만, 그것 자체가 중요한 일로 바뀌어져 버렸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여기서 우리는 각자 영혼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주님은 여기서 우리의 무엇을 보려고 하실까? 그분이 우리의 죄를 보실까? 거기서 일어나서는 안될 것을 보시는가? 거기에 불신앙의 요소가 있는가? 그 현장에 못난 것과 더러운 것, 무가치한 것이 있는가? 지금 우리 마음의 생각과 의도와 상상력은 어떤가? 이 모든 것이 주님이 살피시는 것들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있는 고통이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님께서 예배의 수단과 방법으로 지정해 주셨던 것들을 자신들의 비열하고 무가치한 목적 때문에 놓쳐 버렸다는 사실이다.

우리 스스로 대답해보자!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 은혜의 속죄 교리를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 우리가 이 교리를 믿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는가? 우리가 용서받았고, 받을 것을 알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장사하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회개하고 용서받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마음 먹고 행동하고 있는가?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수단을 악용하여, 마음에서 장사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귀의 방법이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채찍을 드신 이유이다.

 

3) 우리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 많다

성찬식을 할 때도, 사람이 자기를 살필지니라하신다. 왜 그런가? 고린도 교인들이 성찬을 남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찬과 성찬 예배를 이기적으로 지나치게 먹고 마시려는 목적을 가졌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29,30). 그래서 우리도 성찬에서 이 거룩한 질서를 따라야 한다. 은혜의 수단과 하나님의 집, 복음의 영광과 축복을 개인적인 목적이나 이기적인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우리는 결코 은혜의 수단과 하나님의 집, 교회와 복음의 영광과 복을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사업이나 경력을 쌓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저급하고 무가치한 목적으로 사용해서도 안된다. 우리가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의 책망을 들을 자이다.

II. 이 교훈의 특별한 원리를 살펴보자.

 

*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주님의 주인의식이란 원리이다.

그분은 성전에 들어오시자 마자 짐을 짊어지셨다. 그렇게 할 권리가 있는, 그런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그 일을 행하셨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내 아버지의 집”(16)이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자신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성전의 주인이며 마땅히 그렇게 할 권리가 있으시고, 더 나아가 그 안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주와 주님을 지나치게 구분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사실은 같은 양면이다. 주님이 자신을 구원하신 분으로 믿는데, 어찌 그분이 주인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단지 용서받는 일만을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주님의 하신 일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하심이라”(2: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려는 의도이다(벧전 3:18).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오셨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하신 구주와 인도하시는 주님을 구별해서는 안된다.

 

1.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는 우리가 그분의 소유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왜 그런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몸을 사셨기 때문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게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셨다. 그분이 소유주이시다. 그분이 우리 성전의 주님이시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첫 번째 원리다. 우리는 이런 원리로 살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사단의 노예상태에 있었지만, 지옥 형벌의 위험을 깨닫고, 용서를 받는 것은 물론, 그것으로부터 해방을 받아,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는 죄의 노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은 마귀의 노예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의 노예이다. 사도 바울은 항상 자신을 종이라고 부르고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라 불렀다(1:1).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처음부터 이것을 살펴보기 원하신다. 우리는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보았다. 그분은 결코 어머니나 다른 사람의 명령을 받을 입장이 아니었다. 왜 그런가?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스스로 결심하시고 결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성전에서도 그와 똑같은 일을 행하셨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모든 면에서 주님의 소유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자!

 

2. 그분이 우리를 다 알고 계시다는 원리를 의식하고 살아야 한다

우리를 자신의 소유 삼으시며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신다. 예를 들어, 다윗은 죄를 짓고 처음에는 매우 영리하게 생각했다. 죄를 감추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꾀를 내었다. 몇 사람은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회개하며 고백한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51:6).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외적 행동 뿐 아니라, 중심까지 알고 계심을 깨달았다. 그리고 중요한 고백을 한다. 내가 무엇을 숨기거나 덮어두면 주님은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고백이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이다”(66:18). 주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정직을 요구하신다. 철저한 개방을 요구하신다. 그분은 결코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결코 어리석은 분으로 취급당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139:7,8). 하나님의 눈 앞을 피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 고통을 겪는 분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죄에 대해서만 우리를 살펴보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 우리 자녀에 대한 모든 것을 철저하게 알고 계시고 이해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살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4:12).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셨다(11: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의 성전을 둘러 보실 때, 아무 것도 그 눈에 숨길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권리와 권세를 가지고 계실 뿐 아니라, 완벽한 통찰력을 가지고 우리를 보고 계심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3. 그분은 어떤 것을 싫어하시는지 매우 신속하게 밝히신다는 원리이다

1) 그분은 자신이 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즉각적으로 나타내셨다!

주님은 어떤 것들을 미워하신다. 관용을 베풀지 않으신다. 그분의 눈은 불꽃과 같다. 사랑과 동정의 눈이며, 동시에 불꽃이다(1:14). 이는 심판의 요소를 말씀한다. 그래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17).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1:13). 이사야의 환상을 보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심 속에 자신의 죄와 부정이 드러날 수 밖에 없었고, 그는 탄식한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6:5).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 하셨다. 이것은 절대적이며.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바울 사도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4-16). 이것은 완전히 적대적이다. 의와 불의를 혼합시킬 수 없다. 그렇게 시도하는 것은 언제나 불행만을 자처하게 될 뿐이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3:11,12). 이와 똑같이 요한 사도는 말씀한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양과 송아지, 비둘기와 환전상들 틈에 거하지 아니하신다. 우리 주는 소란스럽고 더러우며 불결한 곳에 자신의 거처를 삼지 않으신다. 계시록의 환상 속에서 누가 하나님 나라에 거처하지 못하는가?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한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21:27)라고 하셨다.

 

3. 이런 점에서, 두가지 활동이 있는데, 예수님의 활동과 우리의 활동이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2:15)

1) 우리를 징계하신다는 것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의 거처가 되기를 소망한다면 징계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둠의 숨겨진 일들을 들추어 내실 것이다. 우리 영혼의 지하감옥 같은 곳을 탐색하시고, 우리 내부에 있는 것들을 보도록 하심으로 우리로 놀라게 하실 것이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징계를 제대로 아는 신앙생활이 중요하다. 주님은 우리가 값어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내 마음 속에 이기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엎어버릴 것이다! 때로 절망적이 되게 만드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분이 일하시는 방법임을 알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줄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12:6.11). 우리는 그분의 성전이다. 그분은 무엇이 옳은가를 알고 계신다. 무엇이 최선인지 알고 계신다.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한다: “주여!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먼저 우리 마음의 전 안에 필요 없는 것을 몰아내시고, 떼어내 주세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축복된 징계를 그의 집(성전)을 청결케 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2) 그 후에 우리를 부르사 어떤 일을 하도록 하신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하시니”(16)

주님이 가져가시지 않고, ‘너희가 이것을 가져가라고 하신다. 그런데 본인이 가져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그 자신에게 가시가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여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할 역할을 다 주셨다. 그런데 행했는가? 모세가 명한 말씀이 무엇인가?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33:55). 항상 하나님께서 먼저 큰 일을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할 일을 남겨 놓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주셨다. 그런데 뭐라고 말씀하는가?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주님은 교회에 이미 사랑을 주시고 교제하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그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3:20).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할 일이다. 그가 행하신다. 그가 이제 우리로 행동하도록 부르신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완벽하게 준비하신다. 완벽하게 소유하시기 위해서다. 이제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예비해야 한다.

 

[나아가며]

오늘도 우리 주님은 우리가 그분의 성전답기를 원하신다. 이에 대해 바울 사도가 핵심적으로 결론을 맺는 말씀이 이것이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16). 내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가?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이다. 죄 용서를 말함이 아니다. 큰 활동을 행하는 것을 말함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함이다. 진정 깨닫고 원하는 것을 요청하자! 불꽃 같은 눈앞에 서자! 처리할 일과 해야만 할 바를 말씀으로 듣자! 우리를 거처로 삼으신 것을 드디어 확신하고 우리 마음에 계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확신하고 그런 자답게 되자!

 

* 2022년 12월 14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8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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