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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희] 너의 창조주를 만나라!

복음뉴스 0 2022.04.07 14:58

신준희 목사가 읽어주는 창세기 이야기 ② 너의 창조주를 만나라! 창세기1:2-25 (1)

글 : 신준희 목사(뉴저지 트리니티 가정교회)


나는 우연히 접한 ‘드라마 바이블’로 성경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성경 인물의 직접 표현이나 시적/예언적 말씀이 선명하게 읽히지 않는 개역성경보다, 드라마 형태의 말씀을 듣는 것은 성경을 읽는 것 이상의 효과가 있다. 특히, KBS 권창욱 성우나 한인수 장로 같은 분의 또렷한 목소리로 창세기 시작 부분을 읽어내려가는 대목에 효과음과 배경음악이 더해지면, 수 십 차례 읽어야만 보여지는 성경 본문의 세계가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창세기 창조 기사의 언어는 성경이 묘사하고자 하는 창조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매 후렴구 속에서는 질서정연한 고요함 속에서 펼쳐 가시는 창 조주 하나님의 장엄한 행위가 연상된다. 문체는 간결하지만 창조의 순간들을 접하는 자들의 시야 속에는 다양한 세계가 펼쳐진다: 빛, 어두움, 바다, 뭍, 별들, 식물과 나무들, 거대한 동물들, 새들, 가축과 야생동물들. ‘한 처음 이야기’의 장르가 시는 아니지만, 창세기 저자는 시인의 마음으로 언어를 세심하게 선택하여 기록한 것 같다. 

 

실제로 창세기 시작부터 2:3에 이르는 첫 주 제 단락을 대하면 대할수록 얼마나 이 본문이 주도면밀하게, 그리고 세심한 의도를 가지고 쓰여졌는지 알 수 있다. 예컨대, 일부 성경 주석가들은 창조 기사 본문이 완전을 뜻하는 7 과 그의 배수로 도배되다시피 한 사실에 주목한다. 하나님은 7일 동안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 이 창조 기사의 첫 문장은 정확히 히브리어 단어 7개로 구성되었다 (1:1). 2절은 도합 14개의 히브리어 단어로 작성되었다 (2x7).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35번이나 정확히 언급되고 있다 (5x7). 그 밖에도 7과 관련된 패턴은 여럿 더 있다 (Gordon Wenham, Genesis 1-15, p. 6;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Genesis, pp. 481-2 참조). 이러한 점들은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분명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작성되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또한, 6일 동안의 창조 기사에서도, 처음 창조 3일과 나중 창조 3일은 각각 절묘하게 대조(1-4일, 2-5 일, 3-6일)를 이루고 있어서 창조 행위가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긴밀하게 구성되었음을 보 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창조 기사가 아주 고대에 작성되었음에도 원시 누더기들로 허접하게 짜집기 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본문 가운데 각 단어들은 하나하나에 무게가 실려 있고, 문장 하나하나는 세심하게 다듬어져 작성되었다. 그리고 독자들이 주목하기를 바라는 대목마다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배치해 놓았다. 창세기 저자의 최대 관심사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독자들은  창조  기사에서  ‘날들 (days)’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질문을 받게 되면 몹시 당혹스러울 것이다. 창조의 6일을 가리키는 ‘날들’은 지구의 24시간을 의미하는 날들인가, 아니면 아예 다른 뜻을 지니고 있는가? 그 ‘날들’은 우주의 나이와 관련하여 과학이 말하는 것과 상충되지는 않는가? 그 ‘날들’ 은 어째서 그토록 창조 기사에서 중요하게 대두되는가? 이런 질문들이 갖는 의미는 (7이라 는 숫자가 지니는 의미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창조 후 안식하신 7번째 날에 이르게 되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그 대목을 다루게 될 때까지 조금 기다려 주시길 바란다. 각설하고, 창조 기사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일까? 오늘 본문 창세기 저자의 최우선 관심사는 창조 기사의 주인공을 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 창조 기사의 주인공


창세기에서 창조 기사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위대하신 창조주 한 분이다. 하나님은 창조 기사 전체 문장 2/3 이상에서 주어로 등장하신다. 이 점은 저자가 의도한 것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이, 창세기는 수많은 신앙이 혼재하는 고대 세계 속에서 작성되었다. 당시 고대 세계 중근동 종교 마켓에서는 동물의 신, 천체의 신, 풍요의 신, 전쟁의 신 등 무수히 많은 신들이 등장한다. 세계 주요 종교들이 한데 들러붙어 부대끼는 오늘날 다원주의적 종교 상황에서는 그 혼란이 보다 훨 씬 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정확히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대개 이 물음에, ‘내 생각에 하나님은 … 이런 분이다’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 렇게 대답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말하는 것인가? 창세기 1장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창조 기사가 가장 우선적으로 그 세계를 만드신 분에 대해 제대로 소개하고 싶어한다. 창세기 창조 기사에서 언급한 하나님은 그 분에 대한 첫 번째 소개이지만, 그 첫 번째 소개가 의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창세기 저자가 창조 기사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 창세기에서는 제일 먼저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그 말씀하신 것이 사물/사 태로 존재한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자신이 만든 것이 보기 좋았다), 하나님이 행동하신다 (피조물을 지으신다), 하나님이 이름을 부르신다 (자신의 지으신 것을 바다, 하늘, 땅이라 부르셨다), 하나님이 축복하신다 (동물들과 사람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지으신 그 모든 것 들이 심히 좋았다). 그리고 창세기 2장에서 하 나님께서 안식하신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은 인간이 하는 행위들을 말한다. 하 나님은 그저 단순히 어떤 우주의 ‘힘 (force)’ 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나님을 일컬어 ‘인격적인 하나님 (Personal God)’이라 부른다.

 

이러한 이해는 이제까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과 큰 거리감이 있다. 18세기 이신론자(deist)들은 - 자연 종교론자들로 발전 - 하나님을 일컬어 어떤 ‘힘’이니 혹은 ‘제일 원인 (first cause)’으로 지칭했다. 1960년대 ‘ 하나님 죽음의 신학’을 말하는 급진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우리 존재의 근거’라는 용어로 대체하여 사용하였다. 티벳 종교에서도 신에 대해 언급하지만, ‘기도 깃발’이나 ‘기도 바퀴’ 같은 수단을 매개로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표현할 따름이다. 또한, 신과 관련하여 사람들은 전혀 비인격적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그 어떤 것으로서 ‘운명’에 대해 언급하기도 한다. 요는 이러한 존재들 중 그 어떤 것도 전혀 인격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진보된 서구 사회에서 그러한 비인격적인 존재를 신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을 더 선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보다 ‘과학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아니면 ‘ 힘’이란 용어로 사용하는 것이 인격적인 존재보다 훨씬 덜 위협적으로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말하는 우주의 궁극적 통치자는 바로 이 글을 쓰는 필자를 보고 계시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바라보고 계시는 분이시다. 창세기는 그 하나님을 우리에게 너무도 소개하고 싶어한다. 그 하나님은 단순한 사물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우리가 알 수 있는 인격적 존재이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다’라는 사실보다 하나님의 인격성을 잘 설명해주는 말은 없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And God said, 이하 ESV)’라는표현이반복하여 언급된다 (1:3, 6, 9, 14, 20, 24, 26, 29). 이후에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표현을 258여 차례 이상 줄기차게 언급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인격성은 여기 창세기 1장 첫 도입부에서부터 그 분에 가장 근본적인 진리로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진리는 우리 귀에 못이 박히도록 따갑게 들려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인격적인 분이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라면, 비로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열리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지 않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자신을 우리에게 충분히 알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보라: 우주가 생성되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강력히 말씀 하시는 분을 지금 소개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적 통치자] 창세기에서 는 하나님을 절대 주권적 통치자로 소개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특징은 창조 기사에서 ‘하나 님이보시기에좋았더라(And God saw that [what he had created] was good’라는 표현에서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 세계가 선하다는 것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확히 바라시는 그대로 창조의 결과물이 나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만든 세계를 가리켜 ‘심히 좋았다 (very good)’고 피력하셨다 (1:31).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지배는 오직 그가 말씀하실 때 사물이 존재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 And it was so).’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실 때 말씀하신 그대로 창조하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분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창조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다.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세계를 주권적으로 통치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를 어떻게 지배하고 계신지 보라. 하나님께서는 천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으셨다 (9).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을 만드시는 것도, 애초 계획에는 없었으나 마치 나중에 생각나 만드신 것인 양 심드렁하게 묘사되고 있다 (16). 또한 21 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을 창조하신 것으로 그려진다. 고든 웬함은 ‘ 큰 바다 짐승’을 바다 괴물로 번역하면서, 한편으로 ‘번성하다 (swarm)’는 표현은 대체로 사소한 생물들을 수반하는 동사라고 지적한다 (Wenham, Genesis 1-15, pp. 23-24). 무슨 말인가 하면, 절대 주권적인 하나님에게는 무시무시한 거대 바다 생물들조차 그저 피라미에 불과할 따름이며, 거대한 백상어 죠스라 하더라도 아주 보잘 것 없는 송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하는 말이다.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지배하에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의 삶은 누가, 혹은 무엇이 다스리고 있는가? 16절 ‘별들’에 대한 언급은 어쩌면 점성술에 대한 분명한 비판일 수 있다. 점성술은 천체가 우리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다는 고대 중근동 당시의 한 신앙의 형태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이 별자리 점을 자신의 매일 삶을 안내해주는 길잡이로 삼고 있다. 기독교 신앙인들조차 종이신문 한 켠에 놓인 ‘오늘의 운세’ 박스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별들’을 지으셨다고 하면 점성술의 별자리 점(zodiac signs, 혹은 ‘오늘의 운세’)은 당연히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어째서 사람들은 별자리 넘어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가? 점성술로부터 기독교로 돌아선 사람들은 별점을 뒤로 하고, 그 너머에서 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계시는 분을 성경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분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믿어야 할 대상이다.

 

[하나님은 유일무이하신 분] 또한,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여러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다신론(polytheism)적 주장은 기독교에서 설 자리가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창세기는 성경의 주 무대인 고대 중근동의 창조 기사와는 놀라울 정도로 대척점에 서 있다. 가령, BC 18세기 고대 바벨론 창조 기사를 다룬 아트 라하시스 서사시 (Atrahasis Epic)에 따르면, 하늘을 지배하는 신은 안누(Anu), 땅을 다스리는 신은 엔릴(Enlil), 그리고 땅 아래 물은 엔키(Enki)가 담당하여 다스린다.

 

그리고 그 밖에 크고 작은 신들이 자기에게 맡겨진 영역을다스린다 (https://study.com/academy/lesson/atrahasis-epic-summary-lesson-quiz.html 참조).하지만,창세기에서는 하나님 이외에 어떠한 신에 대해서도 언급하질 않는다. 그러니 하늘이나 땅을 구획해서 어떤 신은 이 구역을 담당하고, 또 다른 신은 저 구역을 다스리는 일조차 당연히 벌어질 리 없다. 창세기는 아주 단순하게 만유의 주재로서 오직 전능자 한 분 하나님만을 언급할 뿐이다. 그 분만이 그 누구도 대적할 자 없는 최고의 유일한 신이시다. 따라서, 창세기에서는 역사라는 전투장에서 선과 악이라는 정반대 세력으로 늘 맞서 싸우는 그 어떤 이원론(dualism)적 주장에도 아무런 여지를 주질 않는다.

 

2절의 ‘하나님의 영’에 대한 언급이나, 26절의 ‘“우리[가] … 하자” 하고’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복수성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들 릴 수 있다. 그러나 그 표현들은 그저 암시에 불과하다. 물론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우리가 아는 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수도 없이 언급한다. 이것을 가지고 굳이 하나님의 복수성을 운운할 수 있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이 표방하는 것은 하나님 내에서의 복수성(Three Persons in God)을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 밖에서 존재하는 신의 복수성에 대한 언급은 아니다.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이 전적으로 이 우주를 다스리신다. 이 사실이 하나님을 회피하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을 안겨다 주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벗으로 삼은 우리들에게는 분명 편안한 밤을 가져다 줄 것이다.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

하나님에 관한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은 창조 기사의 가장 첫 대목에서 엿볼 수 있다. 2절 말씀은 창조 사건의 흐름상 언듯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 고든 웬함이 ‘혼돈과 공허’를 완전한 카이오스 (total chaos) 상태로 번역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Wenham, Genesis 1-15, p. 15), 이 본문에서는 칠흑 같은 어두움이 짙게 드려진, 황폐하고 끝없이 텅 빈 상태의 지구 모습이 묘사된다. 무질서 하고 심지어 무서운 느낌마저 자아낸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 창조 기사와 동일한 언어 그림을 사용하여 예루살렘의 황폐한 상황을 예언한다 (4:23).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반쯤 만들어 엉켜진 크림 스프처럼 원시 상태의 창조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인가? 아쉽게도 창세기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질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묘사가 그 다음에 펼쳐지는 사건에 전조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 이 혼돈의 상태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질서를 가져다 주고 계신다.

 

이것은 의미심장하다. 분명, 원시적 혼돈의 모습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무질서함을 당연시 여기지 않게끔 상기시켜 준다. 질서/조화가 창조의 본질이라는 점은 창조 기사가 나타내고자 하는 가장 큰 주제이다 (창조의 본질과 관련해서는 다음 호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나, 그와는 전혀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졌을 수도 있다. 실제로, 홍수 이야기(창6-9) 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 창조 세계를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물의 혼돈 상태로 되돌려 놓으셨다. 따라서, 우리가 2절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신 성품에 따라 창조 세계를 이같이 혼돈 상태에 그대로 방치하여 내버려 두시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여기에 보다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죄 으로 말마암아 초래된 무질서와 혼돈이 난무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얼마든지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그 세계를 그 상태대로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을 가정해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뒤죽박죽인 상태에 놓인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하등 아무런 소용도 없는 분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창세기 첫 번째 장 바로 첫 대목에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어둡고 황량한 세상에 빛과 질서를 가져다주시는 분으로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둡고 황량한 우리의 삶에게도 그렇게 하실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그렇다고 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한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 후4:6).’ 바울은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 언급하면서, 바로 창세기 1장, 창조의 첫 장면 상황을 떠올리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오늘날 우리의 실제 삶의 현장에서 목도하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켜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에 가져다준 변화에 대해 간증하는 것을 접하게 될 때, 창세기1:2을 떠올려 보라. 불신앙이라는 어두운 안개가 새로운 영안으로 밝아졌다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삶이 그 분과 살아있는 생생한 삶의 관계로 뒤바뀌었다든지, 죄로 가득한 무질서한 삶이 하나님의 영으로 규모 있는 삶으로 변화되었다든지 …. 그렇다면 분명 이 구절 본문은 성경에 나타난 기독교 복음의 가장 첫 번째 암시라고 할 수있다(Allen Ross, Creation and Blessing,p.102참조).

 

창세기 창조 기사를 다루면서, 부서진 인간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언급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창세기 3장 대목에 이르기 전까지는 구원이 절실한 세상을 제대로 파악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상황을 유일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창세기는 그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몹시 혼탁한 세상에 살고 있다.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해답을 갈망할 것이다. 창세기 1:2절 본문은 바로 그 갈망을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질서함을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본성이라면, 창세기 창조 기사는 그것이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속히 들어야 할 첫 번째 특성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다음호에 계속>

 

[편집자 주 : 위의 글은 2021년 7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2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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