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석] 요한복음의 [태초에]와 창세기의 [태초에]이윤석 목사의 요한복음 살펴보기 ② 요한복음의 [태초에]와 창세기의 [태초에] 요1:1-5
글 : 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제일교회)
1. 요한복음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가 잘 요약되고 정리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의 기록의 목적대로(20:31)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고 생명을 얻되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통하여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12:8)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분명한 믿음을 주고 있습니다.
2.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 목적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절대적 진리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을 때, 우리는 어떤 구절에서도 믿음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란 공통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합니 다. 그래서 이 복음서는 먼저 육신으로 오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선포부터 시작합니다. 왜 이렇게 선포해야 할까요? 그것은 당시의 영지주의가 신앙과 신학의 기반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영적인 탁월한 인간과 일시적으로 결합해서 있다가 십자가 사건 전에 떠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가르칠 때에도 직접 반기를 들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심을 의도적으로 강조하여 쓴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면서 요한복음에 특별한 강조를 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나는 ~이다”(I AM)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포도나무이다”라고 강조함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요 하나님이심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길, 진리, 양의 문, 선 한목자, 부활, 영원 생명 되심을 믿고 의지합시다.
3. 이 목적을 드러내기 위해서 요한복음은 일곱 가지 표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가나 혼인잔치, 둘째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 셋째는 38 년 된 병자를 고치심, 넷째는 오병이어의 이적, 다섯째는 물위로 걸으 심, 여섯째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 고치심, 마지막으로는 죽은 나사로 살리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표적을 행하신 다음에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무슨 때일까요? 물론 십자가의 죽으심의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살아나는 사건의 때를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적 끝에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요한복음에서 7가지 표적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부터 시작하여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으로 흘러가 끝나고 있습니다. 곧 일곱 가지 표적이 가나의 잔치 기쁨으 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전제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나의 잔치는 우리에게 천국잔치의 모습을 공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설명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7가지 표적의 ‘7’이란 숫자가 바로 태초 곧 천지창조와 비슷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첫 부분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시작하면서, 그 의미를 표적에 담아 하나님의 재창조사건을 전개하고 있는 듯 합니다. 곧 시작인 천지창조의 완성과 마침인 새 창조의 완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되어진다는 신학적인 암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부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의지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영광 돌리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그러면 요한복음의 시작인 [태초에]와 창세기 1장의 창조와의 연관성을 유추해 봅시다.
이 글은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연결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성경의 창세기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태초에’로 시작합니다. 어쩌면 요한은 창세기를 떠올리면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새로운 창세기를 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사건을 창세기의 태초와 연관을 시키고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의 처음 창조의 구조와 동일한 면을 요한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의 “태초에” 라는 어귀를 연구하기 위해 창세기에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곧 창세기는 요한복음의 진리를 그림자(상징)로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 뿐인 죄인의 마음에 오셔서 흑암을 밝히시고 공허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는 구속사(redemptive history)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혼돈과 공허의 세상에 성령으로 운행하시면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고 할 때 흑암을 신학적으로 풀어낸다면 무엇을 상징할 수 있겠습니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의 땅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신 장면은 성령을 보증으로 세우시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셔서 새 창조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가르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과 창세기를 이렇게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 태초의 첫째 날
하나님께서 태초 곧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고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창1:3-5).
(1) 그 빛과 또 다른 빛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빛은 발광체가 있어야 존재합니다. 여기서 발광체는 태양입니다. 그래야 빛이 세워지겠지요. 그런데 태양은 몇째 날에 만들었습니까? 넷째 날에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첫째 날 만들어진 빛의 발광체가 무엇입니 까? 이 빛(히, 오르)은 구체적인 발광체 현상보다는 에너지원으로서 능력이란 말로도 쓰입니다. “빛이 있으라(히, 하야)”는 말에서 “있으라”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이름에 쓰인 단어입니다. 곧 “빛이 있으라(히, 오르 하야)”는 명령 자체에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 째 날의 빛은 참 광채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오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만물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말합니다(Augustine).
시편 36편 9절에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라고 할 때, ‘광명(빛)’이 두 번 나오는데(히, 오르 오르) 먼저 나오는 빛은 빛의 원천이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거기서 흘러 나와 우리의 생명이 되는 또 하나의 빛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적 능력과 만물을 창조하고 존재하게 하는 생명력입니다.
그런데 넷째 날 태양이 창조되기 전에, 채소가 이미 자라고 있습니다. 식물이 넷째 날이 아니라 셋째 날에 자라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태양빛을 받아 광합성을 해야 하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이것은 감추어진 그 빛, 곧 그 근본적인 빛인 그 생명에 의해 자란 것입니다. 태양의 창조이전에 생물의 등장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 장의 빛의 창조는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드러 내고 있습니다.
밤에 속한 자는 영원한 어두움, 빛에 속한 자에게는 영원한 나라에 들이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신학적으로 풀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둠을 밤이라고 하고, 빛을 낮이라고 했습니다. 낮은 성경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밤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해같이 빛나는 천국이 있고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는 밤을 상징적으로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과 다른 성경에서도 이것을 극명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2) 요한복음은 빛과 생명을 동의어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신 그곳에 어둠이 공존하게 하셨지만 그 어두움을 몰아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서 “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라고 말씀 하며, 5절에서는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이기지) 못하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 시에 창조한 빛은 창조의 목적에서 볼 때, 완전한 빛이지만, 요한복음의 빛과 견주어 볼 때, 참 빛은 아닙니다. 참 빛을 위해 먼저 존재하게 한 것입니다. 참 빛의 힌트를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빛이 실체이신 빛인데, 천지창조의 때에는 감취어진 빛이며, 그 실체의 빛이 왔다는 것을 요한복음 1장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9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알았을까요?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10절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새 창조의 완성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3) 창세기는 요한복음과 계시록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이 창세기의 창조가 암시하는 새 창조의 완성은 요한 계시록 22장 5절에 등장합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그가 누구일까요?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태양 빛의 근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만 진정한 생명이 있고 그 빛에 거하는 자, 곧 진리 안에 사는 자가 영생을 누리며 사는 자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빛이 있었으나 어둠이 공존했다는 것을 말씀으로 시작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어떻게 완전한 참 빛이 등장하는가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1장 9절) 라고 말씀하듯이 그 참 빛이 오셔서 어떻게 세상에 비추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4) 그래서 첫째 날 세례 요한이 와서 그렇게 말하고 증거합니다.
1장 7절과 8절에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 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이 빛이 첫째 날 빛이 있으라 하셔서 빛이 있었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2) 태초의 둘째 날
(1) 그때에 물이 궁창 위와 아래로 갈라졌습니다. 물이 갈라지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구원받은 사건이 모세의 둘째 책 인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택한 받은 사람만 살아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10:1)에서는 물과 바다에 대해, 그것을 ‘세례’라고 해석합니다. 선민들은 구름과 바다에서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둘째 날에 궁창 위의 물(구름)과 궁 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습니다. 그것을 통과하는 것이 세례라는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는 모두 심판을 받아 죽고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만 올라오는 것이 세례입니다. 과거의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동시에 죄의 진노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말해줍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심판사건이 있었습니다(창6-7장). 그 심판 이후 이제는 땅을 물로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언약하셨습니 다. 이 언약이 어떤 언약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부어 다 심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안에 들어있는 자를 살리시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실례가 바로 노아 방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고전10:2).
홍해사건과 노아 방주사건을 종합한 것을 요한복음 1장 39 절 이하의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요 의인이시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지만, 죄인만 받는 세례를 직접 받으신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죄인과 연합하시는 사건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이지만,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죄인들을 대표하고, 마치 노아시대에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모든 물에 사람들이 죽어야 하듯이, 그렇게 심판받아 죽어야 마땅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2) 그래서 사도요한은 일부러 시간을 표현하면서 말합니다. 1장 29-30절에 “이틀 날”이라고 표현합니다. 곧 창조의 둘째 날이란 뉘앙스를 갖고 말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바로 둘째 날 회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3) 세례는 죽으심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너희의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10:38)라고 질문합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의 비참한 죽으심을 미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의 궁창에 의해 죽으심으로 궁창을 찢으셔서 그 모든 죽음을 담당하셨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막는 두꺼운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이상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성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특권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래서 예수께서 창세기의 둘째 날 궁창 위와 아래를 창조하셨는데, 요한복음의 둘 째 날에는 그 궁창 위와 아래 물의 죽음의 세례를 받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둘째 날에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것을 암시하는 것이 바로 창세기 둘째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뉘앙스를 담고서 “태초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태초의 셋째 날
(1) 창세기의 셋째 날과 다른 성경의 표현을 찾아봅시다. 셋째 날에 물과 뭍이 나뉘어 육지와 바다가 창조되고,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창조 되었습니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요한이 쓴 계시록에서 바다는 악을 상징하며 나중에 바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뭍(육지)은 나중에 새 하늘과 새 땅이란 표현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지음 받은 하늘과 바다가 동일하게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시록 21장 1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1장 21절에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큰 물고기(히, 타닌)는 나중에 뱀, 혹은 바다 괴물과 비슷한 단어로 쓰입니다.
이사야 27장 1절에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그 날에 날랜 뱀(타닌) 리워야단을 벌하시고 바다의 용(타닌)을 죽이십니다. 욥기 26장 12절에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라고 말씀합니다. 또 이사야 51장 9절에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타닌)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창세기 1장 21절은 고래나 물고기를 의미할 수 있지 만, 그러나 구속사 안에서의 바다라는 관점에서는 용이란 해석도 가능합니다. 바다에 큰 고기, ‘타닌’을 넣어두심으로 앞으로 일어날 다른 무언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바다는 주로 ‘어둠’, ‘죄악’, ‘더러움’(계시록의 바다의 더 러운 짐승)을 상징하고 뭍(땅)은 생명있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생명 얻습니까?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봄(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29절의 [이튿 날]은 2일째이고, 1장 31절에 [또 이튿날]에는 3일째를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3일째처럼, 주님의 3일째 사건이 무엇입니까? 1장 35-36절에 “또 이튿날 요 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곧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세상에 어린 양이 오십니다. 구약의 제사 드리던 양이 아니라, 진정한 어린 양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복음의 선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장 38절에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라고 말합니다. ‘너희들은 누구를 찾느냐?’고 물어보아야 정상인데 무엇을 구하느냐고 보신 것 입니다. 주님은 두 제자의 마음을 간파하시고 ‘누구를 좇느냐’ 보다,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를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어디 계시오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왜요? 제자들은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무언가를 배우는 선생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 합니다. 1장 3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에 함께 거하니 때가 열시쯤 되었더라.”라고 말씀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시간에 그들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순간을 강조할 때 시간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능력으로 복음이 깨달아지게 되는 시간은 예수께서 “와보라!” 하는 그 시간이었습 니다. 예수님과 함께 거하니 그들의 무지와 죄악이 새생명의 변화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래서 1장 40절에 안드레가 형 베드로에게 메시야를 만났다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셋째 날입니다.
(3)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천지 창조의 모든 혼돈을 질서로 채우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3일째까지 창조하셨지만, 빈 공간(공허함)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빈 공간을 채우십니다. 그래서 넷째 날은 첫째 날의 공간을 채우십니다. 첫째 날에 창조하신 빛과 어두움의 공간에, 넷째 날에 일월성신을 만드셔서 그 공간을 채워 넣으십니다. 또한 둘째 날의 하늘 궁창과 그 공허에 대해, 다섯째 날에 각각 생물, 새, 짐승을 채우십니다. 셋째 날 창조하신 육지와 바다와 식물의 공간에는 하늘과 땅의 짐승의 종류대로 온 땅의 공간을 채우신 후에, 마침내 모든 복을 주실 대상으로 사람을 만들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4) 태초의 넷째 날
(1) 창세기의 넷째 날은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들을 궁창에 채우십니다(창1:14-19절). 빛들을 궁창에 채우신 것입니다. 영적 의미를 찾는다면,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비추게 하시듯, 우리를 빛 가운데로 부르셔서 이 빈 공간을 채우고 확장하는 순종의 삶을 말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요한복음의 넷째 날의 일은 무엇입니까? 안드레가 베드로를 베드로가 빌립을 그리고 나다나엘에게 주님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역사를 보게 됩니다. 새 생명의 주님이신 메시아를 만난 자들이 빛이신 예수님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 빛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넷째 날은 창세기에서 해와 달과 별을 채우듯이 생명의 주님이 증거되는 역사를 보게 됩니다.
5) 태초의 다섯째 날
창세기의 다섯째 날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최초의 복으로 생육과 번성과 충만에 대한 말씀입니다(창 1:22-23) 이처럼 요한복음의 복도 아들의 생명으로 인한 영혼 구원이 더욱 번성하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전도의 삶을 통하여 그들이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사람 낚 는 어부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증거하는 참된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다섯째 날의 복은 물고기와 짐승에게 생육과 번성과 충만의 복을 허락하셨다면, 요한복음에서의 복은 아들의 생명으로 인한 영혼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 다. 영원구원에서의 축복도 창세기에서처럼 번성과 충만과 생육의 축복이 넘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증거하는 생육과 정복과 충만의 복은 각자의 부르심에 대한 소망이 확실하고 주신 직분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명을 감당하는 곳에 반드시 생명의 확장과 번성과 충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6) 태초의 여섯째 날
(1) 창세기의 여섯째 날에 가장 중요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과 가축과 기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자 기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 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창1:26-31). 사람의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충만의 축복에 더하여 창조하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복을 주셨고 또한 식물도 함께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것들을 식물로 함께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1:31)
(2) 요한복음의 여섯째 날은 복음 증거로 인한 영혼구원으로 예수께서 베푸는 세례를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복음증거로 인한 영혼 구원의 실례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베푸는 세례에 동참하심으로 인하여 세례요한은 이러한 광경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했 고, 또한 이러한 사실을 신부를 취하는 신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요 3:29). 그리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세례요한) 쇠하여야 하리라( 요3:30)”라고 말합니다. 이에 앞서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거듭남은 하나님의 형상의 근본적 회복(시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7) 태초의 일곱째 날
(1) 하나님께서 태초의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사 안식하셨습니다 (창2:3).
이 안식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는 창조와 연관되어 말씀하지만, 신명기에서는 구원과 연관되어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 하셨음이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5:15)”
(2) 마태복음에서는 안식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오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 안식이지만(마11:28). 요한복음에서 안식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며, 거룩함 속에 생명으로 역사하는 안식입니다. 안식의 개념은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심으로 내 속사람이 안식을 누리는 축복입니다. 그래 서 예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라고 촉구하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 속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심령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 속한 안식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는 베데스다의 38 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심으로 안식일에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을 비난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안식의 새로운 의미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9장에서도 안식일에 맹인을 고치시면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말씀하시고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9:5). 안식일이 우리에게 이런 진정한 자유를 준다면,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21)”라고 말씀하십니다.
(3) 창세기와 요한복음에서 각각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창세기 2장 1절은 천지 창조의 역사의 이루심을 말씀하고 있으며, 요한복음 19장 30절은 십자가에서 구원의 사역이 다 이루어진 것을 말씀 하고 있습니다. 천지 만물이 “다 이루니라”(창2:1)와 예수께서 “다 이루 었다”(요19장 30절)는 말씀은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 이루시기 위하여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던(1:18) 말씀, 만물을 창조하신 그 말씀(1:3)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14).
[결어]
창세기의 창조는 구속사 안에서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여지를 남겨 놓고 있습니다. 첫째 날은 밤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여지를 남겨 놓 으며, 둘째 날은 저주의 물이 없어지고 하나님께 가는 하늘을 막는 휘장이 찢어지는 여지를 남겨 놓으며 셋째 날에 뭍이 드러나고 있습니 다. 이것은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어떻게 향하는지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고 행하심으로 이루 신 것입니다.
또한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나와 내 영적 생활에 실제적 사건을 창조적 사건에서 다루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내 안에 천지 창조의 실제 적 사건을 이루시려고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하신 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내 모든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을 암시합니다. 창조의 사건은 실제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의 첫 순서입니다. 이런 창조의 사건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실제적이며 영적인 사건임을 보여주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속사의 관점을 가지고 요한복음 첫 부분부터 가장 깊은 진리를 기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되 풍성한 생명을 얻도록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거하는 삶을 삽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한 것이 믿어지는 것이 하나님 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 이전에도 계셨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타락한 우리를 구속하사 하나님 영원한 나라에 살게 하시되,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우리 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이를 믿고 그 영생을 얻되 풍성한 생명으로 살게 하시려고 요한복음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요한복음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만남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편집자 주 : 위의 글은 2021년 7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2호에 실린 글입니다.]
ⓒ 복음뉴스(BogEum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