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준희] 너무도 우리 인간과 연관된 세계(창세기1:2-25) (2)신준희 목사가 읽어주는 창세기 이야기 ③ ‘너무도 우리 인간과 연관된 세계’ 창세기1:2-25 (2)
글 : 신준희 목사(뉴저지 트리니티 가정교회)
창조에서 드러난 하나님에 관한 사실
<복음뉴스> 지상 7월호의 ‘창조기사 (창 1:2-25)’를 다루면서, 하나님이 ‘창조의 주인공’ 이란 사실을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창조기사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네 가지 캐릭터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호 주제로 시선을 돌리기에 앞서 잠깐 복기하자. 창조기사에서 엿볼 수 있는 하나님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라는 점이다. 그는 말씀하시는 분으로서 스스로를 우리에게 알리시는 분이시다. 침묵하지 않고 자신을 알리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은 절대 주권적 통치자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신 뜻대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100% 자신이 바라는 그대로의 결과물이 나왔다.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 그대로 창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세계를 주권적으로 통치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유일무이하신 분이시다. 창세기 창조기사에서는 창조 이전과 이후에도 하나님 외 그 어떠한 신적 존재에 대해 언급하질 않는다. 하나님과 필적할만한 다른 신적 존재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는 상천하지(上天下地) 절대적 지존자이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빛을 비추시는 분이시라는 점이다. 이 대목은 매우 의미심하다. 창1:2에 따르면 하나님은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가져다주시며, 어두운 흑암에 빛을 비추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조화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타락과 무질서로부터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고 질서를 가져다주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창조기사에서 드러난 하나님에 관한 사실 외에, 세상, 우주, 그리고 우리 인간과 관련하여 창조기사가 밝히고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들은 무엇인가?
우주에 관한 네 가지 중요한 사실들
[창조세계는 하나님께 의존한다] 창세기 1:2-25 창조기사에서 우선적으로 주목되는 점은, 창조세계가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사 실이다. 창조기사는 모든 만물 - 하늘, 땅, 밤 과 낮, 바다, 하늘, 태양, 별들, 식물들과 동물 들 - 이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우주는 결코 스스로 생성된 독립적 시스템이 아니다. 철저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며 존재한다.
1970년대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불신가정에서 신앙생활 했던 나는 제사 때마다 아버님께로부터 심한 꾸중과 함께 들어야 했던 뼈아픈(?) 지적이 새삼스럽다. 의례 나는 제사 때가 되면 이리저리 내빼든가, 아니면 문지방에 서서 아버지의 예의 요구에 뻣뻣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그런 나에게 제사 후 아버지께서는 늘, “네 놈은 네가 어떻게 이 세상에 나왔는지 근본도 모르는 놈이구나!” 일갈하셨다. 그 후 나는 당신이 이 땅에 태어나면서 목숨을 맞바꾸셨던 생면부지의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사모곡이 제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서야 아버지께서 하셨던 그 말씀을 의미를 새기게 되었다. “아버지, 저를 낳아 주셔서 감사 합니다 ... 당신이 아니고서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 태어났는가? 어떻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존재하게 되었는가? 내가 기독교인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모든 창조세계 피조물들은 자신의 조물주에게 이와 똑같이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창조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나는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진정으로 마주했을 때, 비로소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내 부모님 뱃속에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창조세계의 하나님 의존성’은 소위 성경적 섭리론(攝理論)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의 섭리 (providence)란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보존, 인도, 통치하심을 뜻한다. 때문에 모든 만물은 하나님과 연관되지 않을 수 없고 지속적으로 의존하기 마련이다. 사도 바울은 1세기 아테네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행17:25하). 바로 당신이 내쉬는 숨/호흡도, 당신 몸의 세포도, 당신을 땅으로 끌어당기는 중력도, 그리고 당신이 섭생하는 모든 음식도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 때문에 창세기 1장 창조기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갖추어야 할 겸허함은 물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마땅한 감사함을 갖게 만든다.
[창조세계는 하나님과 구별된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피조세계는 하나님과 철저히 구별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 (1:1)’라는 표현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이 먼저 등장하고, 창조는 그 다음 이어지는 사건이다. 창조세계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철저히 하나님께 빚지고 있다. 그 역은 당연히 아니다.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지만, 마치 하나님께서 창조세계의 일부인양 (아니면, 그 전체 인양) 피조물과 하나가 되는 분이 아니시다. 창세기 세계관은 우리가 아는 ‘범신론’적과 세계관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범신론에서는 당신, 나, 나무들, 언덕, 혹은 세계 그 어디에서도 신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주보다 크시며, 우주 그 어떤 피조물과도 철저히 독립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창조 세계를 가치있게 바라봐야 한다. 하지만 그 가치는 피조물이 창조주의 만드신 작품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어야지,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를 넘나드는 데까지 나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창조세계는 우리가 즐기는 대상이지, 예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우를 범하기도 한다. 장엄한 우주가 너무도 신비한 나머지 쉽사리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수가 있다. 숨이 멎을 정도로 영감을 자아내는 멋진 일몰, 높이 솟구친 산세, 폭우 속에 천둥치는 소리, 혹은 오래된 고대 신기한 나무 같은 것들을 목도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감성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것들이 하나님을 대신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 설득된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한 교환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터무니없이 밑지는 장사이다. 성경은 이것을 ‘우상숭배’라 말한다 (롬1:18-32 참조). 광활한 우주를 포함한 창조세계가 놀라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피조물이 하나님은 아니다. 창조세계는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하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를 아는 지식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역할만 할 따름이다.
[창조세계는 선하다] 또한 창세기에서는 창조세계가 선하다[좋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창세기1:1-2:3에서 7차례나 듣게 되는 말이다. ‘좋았다’/‘선하다 (goo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름답다 (beautiful)’라는 표현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p. 120). 창조기사 말미에서 성경저자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짚어준다: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참으로 좋고 좋았다’ (1:31상,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譯).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창조세계가 선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일부 종교에서는 물질 세계는 본래 악한 것으로 간주하고, 정말 거룩함을 추구하는 종교인이라면 그 물질 세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들이 음식이나 의복을 삼가는 것은 금욕주의가 깨달음으로 가는 진정한 통로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홀로 사는 것이 보다 경건한 것이라 보고, 가난/청빈을 바른 신앙의 덕목이라 주장한다.
창세기는 이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 하나님께서 물질 세계를 창조하실 때 이것들을 일컬어 좋았다[선하다]고 하셨다. 만일 롱아일랜드 선킨메도우 팍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해송 아래서 신선한 야채와 바베큐를 즐기며 석양을 바라보게 되면, 이 모든 것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시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당연히 음식을 즐길 수 있도록 우리에게 미각도 주셨다. 그런데, 어느 날 독실한 신앙인임을 자처하는 자가 나타나 느닷없이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면 이 모든 것들을 거부해야 한다고 했다면, 이는 무척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종교도 그렇지만, 우리 기독교 안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꽤 오래 전서부터 있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이런 부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바울에 따르면, 그들은 결혼하지 말라고 하며, 또한 감사함으로 마음껏 먹으라고 주신 더 없이 좋은 음식조차 먹지 말라고 한다. 바울은 이들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창세기 1장 말씀을 떠올린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니 (good),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멸시하며 내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딤후 4:1-4, 메시지).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즐기는 것에 반대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러한 억측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창세기1장 말씀에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창조세계는 질서정연하다] 창조기사의 가장 중심 주제는 ‘창조세계의 질서’이다. 이 주제는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물론, 완성된 창조 세계 모두에게서 나타난다. 어떤 면에서, 하나 님의 모든 창조사역은 일종의 질서를 창출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한 상태에서 (2),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4), 궁창 가운데 하늘과 바다를 나누시고 (7), 대륙과 대양을 나누셨다 (9). 땅이 한번 식물을 내게 되면, 질서정연함 가운데 계속 만들어 낼 것이라고 우리로 하여금 예측 가능(predictabil-ity)하게 해준다: ‘땅은 [식물을 낼 때] 씨 맺는 푸 른 식물을 그 종류대로 나게 하고, 열매 맺는 나무를 그 종류대로 자라게 했다’ (12, 메시지).
태양과 달은, 마치 거대한 시계가 작동하는 것처럼 질서정연함 가운데 규칙(regularity)있게 운행하도록 만들어졌다 (17-18). 각 날들에 대 한 패턴 (처음 세 날들이 나머지 세 날들에 그 대로 반영되는 패턴처럼) 역시 질서정연함을 강조한다. 모든 면에서, 창세기 1장은 우리들에게 창조의 질서를 거듭 확신시켜준다. 그것은 말 그대로, 질서정연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질서정연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다.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일기예보 예측이 가능하다. 비가 오게 되면 비가 아닌, 젤리나 스노우 샤베트 같은 것이 내리진 않는다. 봄철에 텃밭에 씨를 뿌리면 한 여름에 우리는 소소한 농작물을 거둬들인다. 조수 일람표는 해수의 상승과 감소를 아주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예측하도록 해준다.
여기서 창세기와 과학이 관련된 문제를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흔히 창세기는 아예 과학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창세기가 창조 질서를 그토록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가 예측 가능성 혹은 규칙성 등과 같은 법칙에 따라 운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하나님이 전혀 낄 자리가 없다는 아주 잘못된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하여 이런 법칙에 따라 세상과 사물을 우리가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고, 그 결과 우리가 흔히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고 여겼던 것조 차 실제로 과학의 법칙으로만 설명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고작, 과학으로는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과학이 진보하게 될 때 불가피하게 움츠러들기 마련인, 불규칙적이고도 아주 이상한 영역의 세계들만 남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가 흔히 듣는 ‘과학이 대체해 버린 창세기’ 이야기 상당수는, 만일 과학 법칙으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 결과는 당연히 신의 존재를 부정해야 한다는 억측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창세기 생각은 이와 다르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의 질서정연함에 초점을 두어, 창세기는 우리가 지금 말하는 바로 그 규칙성 자체가 하나님이 만드신 일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세상에 대해 설명 가능함(explain-ability) 은 저들이 말하는 신의 부재의 표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정연함의 표시,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의 증거라 말 할 수 있다. 과학은 하나님을 반증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우주에 법칙을 부여하셨다는 바로 그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 세상 그리고 우리에 관한 한 가지 놀라운 암시
지금까지 우리가 사는 세계에 관하여 창조 기사가 밝힌 네 가지 중요한 사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창세기 1장에서는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그리고 세상이 우리와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하여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냥 암시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창세기 창조기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다소 놀라운 사항을 담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창조기사가 아주 놀랄만하게도 선별적이면서도 한 켠으로 치우친 보도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창세기는 (블 랙홀에서 공룡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설명하는) 현대과학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광범위한 우주관과는 거리가 먼, 우리 인간과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된 창조의 측면과 우리와의 관계에만 유독 초점을 두고 있다. 실제로, 창세기 1장에서 창조의 다양한 측면들이 소개될 때, 그것은 마치 우리 인간을 염두에 두고 창조된 것 인양 묘사된다. 다음의 내용들을 살펴보라:
● 창조기사의 초점은 우리의 터전인 지구이다. 별의 형성은 놀랍게도 아주 간략하게 다룬다: 또 별들을 (16).
● 창세기에서 식물에 대해 언급할 때도 (11-12), 우리가 하는 것처럼 (이끼, 풀, 양치류 및 기타 기본 식물학 표본에 따라) 분류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다. 우리는 오직 식물과 나무, 그것도 씨와 열매와 관련해서만 본문을 읽을 수 있다 (11-12). 창세기 저자는 주로 우리가 먹는 것과 관련하여 관심을 보인다. 성경 저자는 식물학자의 시각이 아닌, 마치 셰프의 관점에서 창조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
● 태양과 달을 묘사할 때도 (14-18),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다: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14-15)
여기에는 천문학자들이 관심 가질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창세기는 마치 우리가 철물점에서 구입하는 물품의 대용량 버전으로서, 태양과 달을 단지 시계와 조명 역할로서 관심 갖는 것 같다. 마치 두 광명체가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 땅의 생물, 즉 지상 동물들도 세 가지로만 분류된다 (24-25): 가축 (집짐승), 기어다니는 것, 땅의 짐승 (들짐승). 이것은 심지어 가장 기본적인 ‘포유류 - 파충류 - 양서류 (등등) 분류 법’과도 현저히 다르다. 재차 언급하지만, 창조 기사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와 동물과의 연관성이다. 가축은 우리가 기르고 함께 사는 동물이며, 땅의 짐승은 우리가 포획하여 잡거나 아니면 완전 꺼리는 동물이고, 기어다니는 것은 우리가 밟고 지내는 생물이다. 이것은 크기나 모양에 따른 것이 아니라,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창조기사는 인간의 창조 장면에 도달하기도 전에 놀라울 정도로 인간 중심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거주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구분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먹거리를 제공 하시기 위해 식물들을 만드셨다. 태양과 달은 지구를 비추며 시계와 달력을 역할을 하게 하셨다. 심지어 동물들도 우리 인간과 관련해서만 취급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 가지 놀라운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우리 인간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단 말인가? 우리가 그 분의 계획에 그만큼 소중하단 말인가? 창조 과정 내내 하나님은 우리를 염두에 두고 계셨던 말인가?
우리는 창세기 창조기사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자연계를 분류하지 않고, 또 많은 것을 누락시키고 있기 때문에 비과학적이거나 아니면 정교함이 부족하다고 속단한다. 공룡들은 어디 있는가? 블랙홀은 어디 있는가? 도대체 우주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사실, 창세기는 단순히 사람들이 자연에 대해 무지하고 적절한 분류 체계를 아직 개발하지 못했던 과학 이전의 세계관을 반영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또한 우주를 이해하지 못한 시대의 가치관이 반영된 지구중심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는 말도 듣는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다. 우리가 창세기를 세심하게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명확해지는 것은, 창세기가 무엇인가 말하려는 메시지 때문에 의도적이고도 선별적으로 기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창조기사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서 인간이 지닌 특권적 지위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구중심적으로 그리고 있다. 우리가 광활한 우주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우리 인간이 매우 의미 있는 존재 임에는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것들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분명 많은 생각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당신이 혹 해변을 걷거나 맛있는 음식을 대할 때 이 점을 상기해 보라. 우리를 향한 그의 후대하심과 선하신 의도들을 깊이 숙고해 보라. 그리고, 하나님 보실 때 인간이 지닌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그러면 다음과 같은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베푸신 것이라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놀라운 목적을 갖고 계심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마땅히 하나님을 더욱 찾길 원하며, 더욱 더 그 분을 알고 싶어해야 하지 않을까?
[편집자 주 : 위의 글은 2021년 8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3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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