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16-17절 말씀 묵상 [김동권 목사]제목 : 주님, 지금 저 잘 살고 있나요
본문 : 롬 1:16-17
우리 생각 속에는 늘 주변 사람들로부터 듣고 싶은 말들이 있습니다. 은근히 내가 잘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뜻밖의 말을 듣거나,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무관한 답변을 들으면 서운해 합니다. 무시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나빠 합니다. 관계가 어색해 집니다. 그저 단지 자기 의견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무 잘못도 없는 답한 사람을 미워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자신에게 솔직하게 답한 사람에 대해서 나쁜 말들을 퍼트립니다.
우리가 확인받고 싶어하는 말들을 보면..“저 지금 잘 하고 있죠”, “저 부족한 것 없지요”, “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것 맞죠”. 자기가 질문해 놓고 옆사람으로부터 “ 네 잘하고 있어요, 부족한 것 없어요.. 완벽합니다.. 이런 대답을 듣고 싶은 겁니다. 저런 사람들을 보면 이런 생각도 듭니다. 웬지 인정에 굶주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칭찬에 굶주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는 것도 중요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인정 받는 다는 것은 매사에 책임감이 강하거나, 충실했기 때문 입니다. 뭘 맡겨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매듭짓기를 잘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정 받는 다는 것은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뿌림과 거둠의 조화가 있어야 합니다. 말만 앞서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인정 받기란 쉽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성도로서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것도 중요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평가 입니다. 내 삶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인생을 살고 있는가 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는 눈은 어떠하실까?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 받는 삶에 집중하기 보다는 주변 사람들에게 더 인정 받으려고 목숨을 거는 경우가 허다 합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사람들보다 뒷전 입니다. 이것이 요즘현실 입니다.왜 그럴까요?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직장인은 상사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잘 보여서 승진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 하는 이기적인 생각 때문이 아닐까요? 가식적이고 남의 눈치에 인생을 거는 사람은 앞에서는 좋은 소리 들을 수 있는지 몰라도 뒤에 가서는 다 욕합니다. 예수 잘 믿는 줄 알았는데 전혀 뜻 밖이네.. 앞에서 좋은 소리 듣는다고 결코 칭찬이 아닐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을 어떻게 보시고 계실까?
하나님, 제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하나님. 마음이 지금 너무나 아프고 속상하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의 모습을 압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뻔뻔했는지 많은 구절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뒤로는 불법을 저지르고 자신들이 만든 우상에 빠져 삽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라고 예언자들이나 선지자들에게 말대꾸를 합니다. 하나님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보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합니다.
우리가 흔히 고의적 무시 혹은 선택적 무시 라는 말을 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속으로는 뭐가 옳고 그른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론 모른척 시치미를 떼고 삽니다.
렘 6;13-14에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라고 말씀 합니다.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뻔히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락을 위한 욕망과 욕정에 사로잡혀 삽니다. 말은 경건 한데 내면의 삶은 전혀 반대적인 삶에 어울려 삽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꼬임에 넘어갑니다. 그리고 즉각 자신들의 수치를 봅니다. 임시 방편으로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어색합니까? 수치를 뭔가 가리려고 애쓰지만 어설플 수 밖에 없습니다. 가정에 파탄을 가져왔던 뱀은 어디론가 슬쩍 사라져 버렸습니다. 꼬임에 넘어간 아담 가정은 풍지 박산이 납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삿대질과 책임전가가 도를 넘습니다. 서로 지지 않으려고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들이 오고 갑니다. 하나님을 향해 거친 반항적인 말투가 드러납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해 본다면 왜 원하지도 않았는데 여자를 만들어서 이런 지경까지 오게 하시는 겁니까…
하와가 뱀이 은밀한 곳에서 모종의 거래가 이뤄졌지만 다 들통이 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감출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먼저 자신들의 삶에 대한 부족함, 실수, 범죄를 먼저 아뢰지 못할까?
아담의 가정을 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삶이 반복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범죄의 원인이 나 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손가락질 합니다. 피해와 아픔의 원인 제공자가 분명 자신 임에도 불구하고 시치미떼고 타인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큰 소리 외치며 거짓말을 합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아담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아담이 네가 어디 있느냐”
부끄러워 숨은 아담.. 그러나 다시금 불러내시는 하나님.. 다시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파멸이 아닌..다시금 자신들을 되돌아 보게 하시는 관대하신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달라진 인생관을 보게 합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복음을 무시 했습니다. 복음을 믿고 따라 다니던 자들을 색출해서 생명까지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에 대한 해석이 달라졌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고백 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방향이 되었습니다. 삶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자신을 드러내는 색깔이 되었습니다. 복음의 해석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 짓게 합니다.
첫째, 복음에 부끄러운 인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복음에 합당한 인생을 살 것인가?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빌 1:27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라고 말씀 합니다.
복음에 부끄러운 인생은 세상의 가치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거창하게 말을 하면서도 삶은 전혀 반대로 삽니다. 복음은 섬김을 말하는 데 섬김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복음은 용서를 원하는데 용서할 수 없다고 난리를 칩니다.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신의 이윤을 위해서라면 신앙도 없습니다. 믿음도 없습니다. 이들이 지향하는 생각은 이정도 쯤이냐..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 데 하는 자기 정당성을 내세워 결정하고 선택 합니다. 굉장히 인간적인 사고 속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는 의미와도 같습니다. 이 말은 우리 삶에 복음을 적용하고 그것은 믿는 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겁니다.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의 삶입니다.
내 뜻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더 존중 합니다. 나의 이윤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결단합니다.
왜 복음을 부끄러워할까요?
하나, 당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신상에 피해가 올까봐 부끄러워 합니다. 혹시 예수 믿는 다는 것 때문에 박해가 올까봐 두려워 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메시지가 세상 사람들의 귀에는 우스꽝스럽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입니다. 그리스 문화의 교양 있는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핼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라고 말씀 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바울도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명령 합니다. 여기 오직 이라는 말은 다른 길이 없다는 겁니다. 오직 복음에 합당한 삶을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 합니다 .
요즘 그리스도인들도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절대 손해를 안 보려고 합니다. 절대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라고 합니다. 복음에 걸맞는 태도를 취하라는 겁니다 .
복음과 합력하는 태도 입니다. 복음이 지향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라는 겁니다.
복음과 평행을 그리면서 살아간다면 자신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떠나게 할 것입니다 .
우리는 각자가 이런 의식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겁니다. 삶의 어떤 순간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밖으로 도망치지 않습니다.그리스도 밖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 그 분 안에서 살면서 배운 대로 실천하며 사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허망한 껍데기 인생을 만들뿐입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둘째, 구원 받은 자로서 주인 체인지 하기
롬 1:17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이라
구원 받은 자로서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시작은 내 안에 주인이 내가 아님을 아는 겁니다.
바울은 구원받고 난 후에 철저하게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주인 되심을 천명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느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살게 합니다 .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삶을 기뻐 합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시간 사용 입니다. 구원 받은 자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늘 유혹의 손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마귀는 여전히 구원 받은 자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에서 이탈하게 하는 것들이 늘 존재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시간을 빼앗아 가는 회색 분자들입니다.
시간을 빼앗는 것들이 많습니다.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시간을 온통 빼앗긴채 삽니다, 자연히 분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르다가 보여주는 분주한 인생은 말씀을 듣는 시간 보다는 덜 중요한 것에 시간을 빼앗겨 살 뿐입니다.
바울도 구원 받고 난 후에 직면하는 시간들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분노, 자존심, 교만케 하는 감정들을 죽이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절제할 수 없는 순간에는 나를 쳐서 복종시킴니다. 나를 죽게 합니다.
바울은 또한 구원받고 난 후에 직면하는 고난의 순간들입니다.
빌 1:29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주인일때는 자기 감정에 얽매여 함부로 행동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이끄심을 따라 고난도 즐거워 합니다.
바울은 내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엄청난 고백을 합니다.
바울이 구원받고 달라진 태도가 있다면 친구들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친구로 삼고 삽니다 .바울은 친구이신 그리스도의 말을 순종 합니다. 자신의 옛 삶에 대한 자랑이 생겨날 때마다 친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눈을 뜹니다. 자기 각성을 합니다
친구한테 나 오늘 좀 좋은 일을 했지.. 그랬더니 친구가 하는 말이.. 뭘 그런걸 가지고 그래.. 순간 기분이 나쁠 수 있지만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을 갖고 자랑하고 자기 도취에 빠지는 것을 막아준 친구가 고맙기만 합니다.
타성에 젖어 버린 내 삶.. 내가 한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을 해서 인정받으려는 생각.. 하지만 순간 얻는 답변은 뭘 그런 걸 갖고 그래. 라는 말에 펀치를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타성에 젖어 버린 나의 삶에 직격탄을 날린 그 친구가 마치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주신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신앙인인 나의 삶을 객관적으로 중심 잡아주는 예수 안 믿는 그 친구는 내 의식의 중심을 잡아주는 선물일 때가 많습니다. 믿지 않는 친구가 야 너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살면 안되지 라고 말하는 순간 한방 얻어 맞은 기분입니다. 물로 그 순간은 좀 찝찝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 상할 수 있습니다. 때론 누군가의 쓴소리가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쓴소리가 흔들렸던 내 삶의 중심을 잡게 하는 보화와 같은 선물일때가 얼마가 많습니까!
구원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도취에 빠져 살던 나에게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깨달음을 줍니다. 다시 구원받은자로서의 삶을 살아 갑니다.
마지막, 우리는 자주 생각하는 것을 닮으며 살아갑니다
생각이 곧 행동입니다. 생각이 곧 과정입니다. 생각이 곧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에 부끄러운 삶, 복음에 합당한 삶을 만드는 기준은 생각입니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우리는 자주 생각하는 것을 닮으며 살아갑니다.
복음을 생각하라.. 위엣것을 생각하라. 예수를 생각하라.. 생각은 나를 표현하게 합니다. 생각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나게 해 줍니다.
세상을 생각하면 세상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세상적인 삶은 예수의 향기를 뿜어낼 수 없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삶은 철저한 복음에 입각한 삶입니다. 복음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복음에 뿌리를 둔다는 것은 교리적인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거기엔 내 생각을 가미하지 않습니다. 거기엔 상황이나 환경에 의한 자기 정당성을 가미 시키지 않습니다. 순수한 복음에 기초한 선택과 결정을 합니다 .
시 1:3-4에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 합니다. 하나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모든 일이 형통 하다고 합니다. 다른 한 종류는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입니다. 바람 부는 대로 삽니다. 세상 풍조에 따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삶을 추구 합니다. 자연히 그리스도인답게 살기 어렵습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면 세상 사람들도 헷갈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혼동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분명해야 합니다. 확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가? 내가 평상시에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결정적인 순간에 생각이 영향을 끼칩니다.
늘 깨어 있으라..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깨어 잇지 않으면 늘 언제 어디서 사탄은 침투 합니다. 내 생각을 흐려 놓습니다. 믿는 사람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삽니다.
내 생각의 안경을 끼고 사는 삶.. 조금만 기분 나쁜 말을 들어도 확 돌아버립니다. 자기 생각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 때에 나에게서 그리스도는 없습니다. 믿음은 없습니다. 복음은 없습니다. 자연히 어떤 모습들이 노출 될까요?
조금의 인내심도 없습니다. 조금의 배려도 없습니다.
인간적인 냄세만 풍길 뿐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내 안에서 늘 숨쉴 때에 자신의 삶은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
바울의 복음의 안경을 낀 후의 삶은..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삽니다. 믿음이 감정을 조절 합니다. 믿음이 기분을 절제하게 합니다 .믿음이 삶의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도 뚫고 나가게 하는 영적 힘이 됩니다.
내 것의 소중함 보다는 주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중점을 둡니다.자연히 내 것을 쉽게 내버릴 수 있는 용기가 생겨 납니다.
복음의 안경을 끼지 않는 한..내 삶은 교회를 다닌다 할지라도 여전히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복음의 안경을 제대로 끼면 내 삶의 변화는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매사에 자기 감정과 자기 기분이 늘 결정과 선택의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에 뿌리는 둔 삶이 내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봅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멋진 창조 작품 중의 하나 입니다
우리는 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주어진 현실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
세상의 가치로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각을 갖고 그리스도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내가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 시대에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깨어나야 할 때 입니다 .
팬더믹 시대에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성도의 수가 흘러 넘쳐야 합니다 .
남이 살아주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
내가 먼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주님과 함께 힘든 팬더믹 광야의 시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
늘 주님께 물어요
나 지금 잘 살고 있나요? 사람에게 대답을 들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 직접 대답을 들으면서 살아갑시다.
우리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친구 되시는 주님께서 폭포수처럼 지혜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담대한 믿음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
그 힘으로 오늘도 무너진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 내며 삽시다.
오늘 나의 삶이 누군가에게 무너진 축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계기를 만드는 하루가 됩시다.
무너진 영혼들에게 찾아오신 주님
살면서 주님께 부끄러워 숨고 싶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아담을 부르셨던 하나님
오늘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뭔가 잘못을 저질러 쩔쩔매던 아담에게 친근하게 다가오시면 부르셨던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오늘도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지만 먼저 내게 다가와 질문하시는 주님.
그 음성에 우리 모두 힘있게 대답합시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
주님께 질문하면서
오늘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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