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9장 1-7절 말씀 묵상 - 김경열 목사문말씀 : 사 9:1-7
제 목 : 곧 오소서 임마누엘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For unto us a child is born, un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shall be upon his shoulder:
and his name sha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lor, The mighty God, The everlasting Father,
The Prince of Peace.(Isaiah 9:6)]
여러분은 금년 성탄절에
무엇을 선물받기 원하십니까?
원하시는 선물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모두 다 원하시는 선물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런 선물을 받는다고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꼭 받고 싶은 그런 것들이
정말로 내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것들을 구하려고 카탈로그를 뒤적이거나
사람들이 북적이는 쇼핑몰을 헤매거나
인터넷에서 아마존을 통하여
장시간 부지런히 찾고 계시지 않습니까?
성탄절이 누구를 위한 절기인지는 생각지 않고
엉뚱한 곳에만 신경을 쓴다면 별로 의미없는
성탄절을 맞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물 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처음 오신 것을 기념하고
다시 오실 것을 대망하는 이 귀한 계절에
그 분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줄 수 없는
가장 귀한 선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즉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의 구원 계획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에 걸맞은 인물을
구약 성경에서는 찾기 어렵습니다.
그가 예언한 대로 이스라엘을 삼켰던 나라들은
다 멸망을 당했지만 이스라엘이 빼앗겼던
영토를 다 찾지는 못했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했지만 다윗이나 솔로몬 때와 같은
번영을 다시는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구원과 회복은
구약시대에는 지극히 일부만 이루어졌으나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고 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서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 4:15-16)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할 때 이사야 9:2을 인용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또한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가 아들을 출생함으로
이사야 9:7의 예언이 성취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그러기에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제공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심판을 받아 흑암의 고통 아래 있는 이스라엘이
본문에서는 흑암과 고통의 시대가 가고
구원의 새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합니다.
이는 주전 약 700여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메시야를 예언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세 단계로 설명됩니다.
1. 빛의 강림을 예언합니다.(1-2절)
먼저 1절에 나오는 지명 스불론과 납달리는
이스라엘의 북쪽이요, 갈릴리 서편 지역으로
물이 풍부하여 농사짓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해변 길은 갈릴리 바다 북쪽에서 서쪽을 따라 내려옵니다.
요단 저편은 갈릴리 바다 동북쪽을 가리킵니다.
결국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을 가리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를 포함한 갈릴리 지방은
지정학적인 여건으로 인해서 앗수르와 같은
북방 세력이 쳐들어올 때 제일 먼저
공격을 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지역은 원래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곳이었으나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한 대가로
징계를 받고 버려져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유대인은 갈릴리를 ‘이방의 갈릴리’ 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갈릴리가 이방 나라와 근접하여 있고
또 그곳에 많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버려진 땅, 어둡고 소외된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들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빛을 비추신다고 하십니다.
이 빛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혹은 강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완료형으로 선포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것이 확실해서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는 화법입니다.
이스라엘은 베가왕 때에 앗수르에 침략을 당했다가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하시면서 성취되었습니다.
마태는 이 구절을 인용하여
“스불론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 4:15-16)
예수님으로 인하여 갈릴리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고향으로 삼으셨으며
그곳 사람들 중에서 사도들을 택하셨고
그곳을 복음의 전진 기지로 삼으셨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교만과 편견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도리어 배척하였습니다.
‘큰 빛을 비추었다’ 함은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해 언약도 없고
소망도 없는 자들을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빛 가운데 가장 귀한 빛이
'예수님의 생명의 빛'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이 생명의 빛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한 자에게만 비춥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가지셔서
그 생명의 빛을 비추십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따라서 우리는 삶 속에 나타난 놀라운 변화,
풍성한 열매를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빛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2) 회복된 즐거움을 예언합니다.(3-5절)
1-2절은 외적인 변화 곧 흑암의 지배 아래 있던
세상에 빛을 비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묘사했습니다.
3절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백성들 삶의 변화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그들을 압제자에게 넘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약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징계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빛이 비치는 새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번성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백성의 즐거움을 더하십니다.
‘즐거움’은 ‘춤추다’ 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즐거움을 주체할 수 없어
몸으로 표현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사야는 새 시대의 즐거움을
추수 때의 즐거움으로 비유했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두 즐거움은
약속의 땅에서 누리는 대표적인 복으로서
하나님과 회복된 언약 관계에서
백성이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개역 성경에서 4절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이는' 이라는 표현은
‘왜 즐거워하냐면’ 이라는 뜻입니다.
멍에는 백성들이 자유를 잃고
노예로 살아가는 속박을 상징합니다.
또 채찍과 막대기는 멍에 아래 놓인
가축을 조종하는 수단으로서
압제자의 탄압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압제자의 속박과 탄압을
다 제거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미디안의 날’ 이란 하나님께서
미디안을 치신 날을 가리킵니다.(사 10:26)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압제 아래 놓인 것은
사사 시대 기드온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300명의 군인을 뽑아 전쟁에 나가게 하셨고
그나마도 그들이 한 일은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적군들 스스로 혼란에 빠져
서로 죽이다 패망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자이심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없어지는 것
전쟁이 그치고 평화로운 상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5절)
‘피 묻은 겉옷’ 은 두말 할 것 없이
살육의 흔적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정결을 위해 불에 견딜 수 있는 것은 불로
그렇지 못한 것은 물로 씻도록 했는데
옷은 물로 빨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불로 태워 없애는 것은
전쟁의 종식을 강력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서 전쟁을 그치게 하심으로
압제자의 속박과 탄압을 꺾으십니다.
대적을 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가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두시고 심지어
사망의 권세에서도 우리를 해방시키십니다.
추수하는 자가 추수하며 즐거워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이 전리품을 나누며
즐거워하는 것과 같이 메시아의 오심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기쁨을 줍니다.
그들이 하나님 은혜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함으로 영생을 추수의 즐거움과
의의 면류관을 얻는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오늘도 자신에게로 부르십니다.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안식과 평안을 주십니다.
3. 한 아기의 탄생을 예언합니다.(6-7절)
즐거움의 이유가 세 번째로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다고 했습니다.(6)
대적들을 다 멸하신 다음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통치자
곧 다윗의 이상을 실현하는 왕을 세우십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이
한 아기의 탄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이 땅에서의 메시아의 사역이
‘내어줌’의 사역이 될 것임을 예고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 주셨으며 최종적으로는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 20:28)
주님을 본받아 내어 주려면
우리가 먼저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주한 사역 속에서도
새벽 미명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히 채움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전혀 기도에 힘씀으로
성령으로 충만하여 기쁨으로 섬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해질 때 기쁨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한 아이가 태어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거창하고 화려하게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이 평범하게 오셨고
우리와 같은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께로 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압제자의 멍에가 꺾이고 그 대신 아들의 어깨에는
‘정사’, 곧 통치권이 주어집니다.
이 아기는 육신을 입고 태어나지만
신적 권능을 받은 존재입니다.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이라고 하면서 기존의 왕들과 구별되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그 이름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1) 메시아의 첫 번째 이름은 ‘기묘자’ 입니다.
‘기묘’란 메시아 자신과 그의 하시는 일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경이로움,
오묘 그 자체임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서기관들이 말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권세 있는 가르침에
완전히 압도되었습니다.(마 7:28-29)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께서 직접 말씀을 전하시니
반응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전하시는 지혜의 말씀이 잠자는 영혼을 깨웠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성령과 지혜로 충만하셨기에
그저 ‘놀랍다’ 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전하신 말씀 뿐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 사역,
죽음, 부활, 승천 모든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메시아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러 오신 분이시기에
죄가 있어서는 안 되므로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동정녀 탄생 또한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제공하였습니다.
어떻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납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기묘할 수 밖에 없습니다.
2) 또한 그 분은 ‘모사’(Counselor)입니다.
‘모사’는 세상의 어떤 이보다
탁월한 지혜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신약에서 모사에 해당되는 말이 '보혜사' 입니다.
보혜사는 ‘곁에서 돕도록 부름받은 이’
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보혜사로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구원의 길로 가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신 훌륭한 카운슬러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변호하시고 대언하시며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로는 성령께서
성도들과 함께 계시며 조언자의 역할을 감당하십니다.
기묘자와 모사는
‘기묘한 모사’(Wonderful Counselor)
한 단어로 보기도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은 메시아의 본질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공자, 맹자, 석가모니, 마호멧과 같은
위대한 인물들 중의 한 분이 아닙니다.
그는 평범한 인간으로 오셔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사 53:2) 없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 9:5)
‘영존하시는 아버지’ 라는 표현은
그가 영원한 보호자로 임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 ‘중생’이란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도 있고
‘위로부터 난다’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삼하 7:14)
백성을 돌보는 아버지와 같습니다.(사 22:21)
아버지가 아들을 계속하여 사랑하고 아껴 주듯이
하나님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권위와 사랑으로 자녀들을 영원히 보존하십니다.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때문에 끈질긴 사랑으로 붙드시고
지켜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지속적으로 채워주십니다.
메시아를 ‘평강의 왕’(Prince of Peace)으로 부르는 것은
그가 이 땅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적 지혜와 권능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평화를 완성하실 것이며 정의와 공의가
그의 나라를 유지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죄의 삯은 사망‘ 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며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곳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자녀다운 생활을 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성도들도
한 몸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서 기울여야 합니다.
평강은 우리가 애를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의 통치, 그의 정사와 평강은
온 우주에 무궁할 것입니다.
또한 공평과 정의로 나라를 다스려
그로 말미암아 나라는 더욱 강력해질 것입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보좌에 앉아
영원히 평화롭게 통치할 것입니다.(삼하 7:16)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셨고 곧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연약한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날마다 즐거워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세상에서 살 수 없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지혜의 선물, 능력의 선물, 안정의 선물,
평강의 선물을 때를 따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예비하신 귀한 선물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십자가로 다리를 놓으셨기에
우리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도 주셨다고 했습니다.”(요 1:12)
영접하는 것은 ‘그 이름을 믿는’ 것인데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전 인격과
삶의 전 영역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는 약속과 직결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막 8:34)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 날마다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서
하나님 우선순위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성도는 이 기쁨을 맛보아야 하고
그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흑암의 땅은 땅 끝 선교지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미쳐야 할 곳이 많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는
예수님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가족과 이웃들 가운데도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럴 때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되어
그들도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참 빛 되신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시고
그 빛을 세상에 비춤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전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임박한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방탕, 음란, 다툼, 시기 등 어둠의 일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본받아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빛의 자녀로서 만군의 여호와의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며
주님의 몸된 교회와 세상을 섬기고
주님 오실 때 깨어있는 신부로서 기름준비 하셨다가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