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가운데 피어나는 소망
본문: 눅 24:1-10
할렐루야! 우리 주님 사망권세 깨치시고 죽음에서 다시 사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금요일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극적입니까? 무덤입구를 막는 큰 돌이 옮기워졌습니다. 시체가 있어야 할 무덤에 시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나 예언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 줍니다.
죽음 후엔 시체가 있어야 하는데 ... 절망 끝엔 처절한 통곡과 비참한 소식만이 전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신비롭고 놀라운 생명의 시작을, 절망에서 싹뜨는 소망을 노래하고 있급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은 신약성경에서 무려 204회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또, 사복음서가 모두 부활을 결론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도 생명의 부활로 마감되시길 축원합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날 우리 인생들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1.절망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 5절 후반 - 6절 전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인생에 있어 절망적일 때가 많긴 하지만, 그중 가장 절망적인 때는 죽음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최대의 절망인 죽음마저도 사실은 크리스천들에겐 종말이 아닙니다. 신실한 기독교 작가인 필립 얀시는 “예수님의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바꿈표였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바꿈표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절망 중에 체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절망적인 상황도 사실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고, 때때로 즐겨 부르는 찬양을 작사한 송명희 시인이 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전신을 마비시키며 뒤틀게 하는 뇌성마비는 절망적이었지만 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 어떠한 절망의 순간이라도 결코 인생의 끝이 아님을 아시길 축원합니다.
2.둘째로, JX의 부활이 시사하는 것은 절망 속에서 소망이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본문 7절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죄의 삯인 ‘죽음의 강’을 우리 대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건너시며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의 강’에서 허덕이는 우리 인간에게 오직 유일한 소망이 되십니다.
저명한 신학자 몰트만은 전쟁포로 4년동안 옥중생활중 신약 성경을 읽으면서 스스로 인간의 죄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면서 영혼과 육신의 진정한 ‘샬롬,’ 평안을 체험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절망속에 빛으로 온 소망이었습니다. 그는 종전후에 신학을 공부하고 1964년에 한권의 책을 펴냅니다. ‘소망의 신학’(Theology of Hope)입니다. 몰트만은 외칩니다. “기독교는 자체가 희망이고 생명력이다. 전적인 소망으로 가득찬 것이 기독교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송명희 시인은 16살 되던 해 그가 극심한 절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교회 강단 밑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제발 저를 만나주세요. 제 모든 걸 다 드릴께요.” 그런 기도를 한 후 작은 빛이 소녀 송명희 머리 위에서 밤낮으로 반짝거렸습니다. 그해 1979년 10월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송명희씨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통곡을 하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하나님은 깨어진 질그릇에 그의 생명을 담아 주셨고 아버지로 나타나주셨고 그의 음성을 들려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소망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만 보입니다.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가신 예수님은 그 십자가 고통속에서 죽어 끝을 맞이한 것처럼 보였지만, 몰트만과 송명희 시인을 비롯한 숱한 사람을 살리는 소망과 생명의 메세지를 부활을 통하여 남겼습니다.
무엇이 여러분의 삶에서 문제입니까? 가난, 질병, 인간관계입니까?
예수 생명이 없는 것이 진정한 문제입니다. 구세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안에 놀라운 이름 “예수”가 있습니까? 진정 자기 안에 이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가난해서 힘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병들어서 힘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감사하다고 말하게 됩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고백합니다. (시 39: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위기”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위험한 고비”란 뜻으로, 위험과 기회란 두 단어가 합친 낱말입니다 (危 (위태할 위)험과 機 (베틀 기)회). 위험이 있을 때 또한 기회 (機會)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위기를 뜻하는 히브리어가 있습니다. 이는 “mash-ber” 란 단어인데, 출산용 의자, 즉 고대에 산모가 출산시 앉았던 의자를 가리킵니다. 산모와 아이의 생명이 위험한 고비에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창조의 순간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외칩시다. 나에게 절망은 끝이 아니다! 오히려 절망과 위기는 새생명의 기회이다!
(고전 15:55, 57)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부활절 새벽 사망권세 이기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현실의 처절한 절망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절망속에 뚜렷히 보이는 소망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생명이 삶 가운데 충만히 거하시길 간구합니다. 그리하여, 생활 문제나 각종 질병의 절망적인 상황, 작금의 코로나바이러스 재앙, 심지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서도 끝내는 일어서는 모든 신앙인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