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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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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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건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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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book에서 아프리카 초원 동물들의 세계를 볼 수 있다. 먹이를 두고 사자, 하이에나, 표범, 악어 들개들의 먹고 먹히는 동영상이 자주 올라온다. 주로 영양, 들소들은 먹이감으로 등장한다. 멀리 있는 동물들의 세계를 보면 착잡한 생각이 든다. 이 세계는 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의 구조인가? 항상 도망다니는 영양들이 불쌍하고, 사자들에게 쫒기는 소들이 불쌍하다.
그렇게 먹고 먹히는 구조는 하나님이 원래 창조한 질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동물들이 그 이름을 얻기 위해 아담에게 나오는 장면을 생각하면, 그 당시 동물들은 서로 화평한 관계 속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동물들의 먹고 먹히는 구조는 노아의 홍수 후에 사람들이 소나 양을 먹이로 삼는 시기 이후의 변화가 아닌가, 싶다.
통쾌한 장면은 사자가 소에게 받혀 도망가는 장면이다. 기린을 공격하던 사자가 기린의 발에 치여 뒹굴고 포기하고 돌아서는 장면을 볼 때이다. 약자에 대한 동정심에서 인가 보다. 그러면서 LA 갈비를 맛있게 먹는 자신이 이상하다. 먹으면서 소의 커다란 눈이 생각나서 입맛을 잃을 때도 있다. 먹고 먹히는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육식을 금해야 하는 것 아닌가도 생각하게 된다.
태어난 생명은 언젠가 죽는다. 나도 얼마 후에 죽을 것이고,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내 영혼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것이다. 사고로 죽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에 살해 당한 사람도 있고, 늙어서 병들어 쇠약해서 죽는 사람도 있다. 때와 방법의 문제이지만 누구나 죽는 것은 똑같다. 고통없이 자다가 죽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죽는다는 것을 다 알면서 자기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자기 죽음을 미리 생각해야 사는 날의 의미를 찾게 된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대로, 삶을 삶답게 해 주는 것은 죽음이라 한다. 하나님이 범죄한 인간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집행하시는 이유는 죽음이라는 실재 앞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고 살라는 뜻이라 믿는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는 동안 대답해야 하는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질문에 대해 대답없이 사는 사람은 꺼져가는 빙판 위에서 춤을 추는 사람이라고 한다. 불타는 집안에서 노래하고 떠드는 사람이라고도 할까? 어려서 반 친구의 익사를 목도한 나는 죽음을 의식하고 살았고, 항상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생각으로 허무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교회를 다니고 삶의 목적을 찾으면서 죽음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거의 60년이 지난 지금 내가 사는 이유 또는 목적은 하나님과 성경을 증거하는 데서 찾는다.
세월을 살다 보면서 알게 된 것은 이 세상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위험이 깔린 세상인가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사고와 재난과 질병이 깔린 거리를 다니고 있다는 생각이 절실해서 기도 없이는 출입할 수 없다. 하루 하루의 삶은 나의 동행자가 되시고, 방패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를 지날 때, 하루 하루가 기적이었던 것처럼, 하루를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도 기적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보는 사람이 세상을 바로 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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