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 아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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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건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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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계몽주의 이래로 사람은 세상과 삶을 이성(reason)의 틀 안에서 해석하기를 좋아한다. 그 전에는 하나님과 교회의 권위 아래 사는데 익숙했지만, 구교, 신교 간 오래된 전쟁으로 인해 지친 나머지 이제는 이성으로 해결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후 세상은 엄청난 변화를 이루게 되었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고, 인간의 이성과 능력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려는 시도로 서구 세계는 세계를 주도하고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반면 신앙과 종교는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점점 그 중요성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 오늘날의 삶은 그 시대 계몽주의의 연장에서 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20세기 초 유행했던 실존주의 철학은, 사람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본질적이라 설명한다. 불확실한 인간의 삶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불안과 공포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오늘날 사람들은 이런 불안을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하고 살고 있을까?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사람들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야곱 가정에 닥친 기근의 문제로 인해 애굽에 내려가서 양식을 얻어 와야 했다. 그런데 요셉의 조치로 인해 시므온을 구금하고, 형제들을 보내면서 베냐민을 데려 오라고 지시한다. 베냐민은 야곱이 아끼는 아들인지라, 요셉의 요구를 쉽게 응하지 못하고 가족들이 전전 긍긍 답답함 속에 빠지게 되었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치 앞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지만, 감사하고 다행스럽게도, 우리 생명의 주님의 섭리 속에 살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요셉의 조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선한 뜻으로 행하는 것이었다. 야곱의 편애와 집착에서 자유를, 형제들이 과거의 죄책을 돌이키고 회개와 양심을 따른 삶을 위한 조처였다. 사람은 자신의 억울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게 된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을 억울하게 대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 복잡한 세상에서의 삶을 다 설명할 수 없다. 때론 사고와 질병과 재난의 경험을 겪기도 한다. 생각하면 불안하고 두려운 삶을 살고 있다. 마치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서운 광야를 지나가는 삶을 현대에 살고 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점점 더 악해지고 불안해 진다. 여기 저기 사고와 경제적 어려움이 예상되는 날들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과 자기 백성들을 자기 뜻을 따라 다스리고 섭리하신다는 사실이다.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선하신 뜻 안에서 회개와 믿음과 착한 양심으로 살도록 우리를 가르치고 독려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다. 이 하나님을 생각하면, 가슴을 펴고 머리를 들게 된다.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섭리 아래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쁘신 뜻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 지기를 소원하고 기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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