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나길 잘했어, 개척하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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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관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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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아침, 보일러실에서 ‘쓰’ 하는 스팀이 새는 소리가 급하고 강하게 들렸습니다. 곧 멈추려니 기다렸지만, 소리는 더 거칠게 밀어붙이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보일러실을 열어보니 온수 보일러가 터져 물이 문턱까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급히 집주인에게 알린 후, 가득 찬 물을 퍼내기 시작했습니다. 한겨울에 물난리라니! 아침 일찍 씻고 나가려던 아내는 온수가 터졌다는 말에 아연실색하며 어떻게 씻냐고 난리 법석을 떨었습니다. 어느 정도 물을 퍼내고 나니 집주인이 보낸 수리공이 도착했습니다. 그는 온수 보일러 상태를 보자마자 대번에 새 보일러가 필요하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수리공이 새 온수 보일러를 설치하기 전에 했던 첫 번째 일은 고장 난 보일러를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고장 난 보일러 안에 가득 찼던 물을 빼기 시작했는데, 온수통에서 나오는 물 색깔이 옅은 흙탕물처럼 뿌옇게 보였습니다.
수리공은 “어떻게 이런 물로 지금까지 사용했냐?”며 저에게 되물었습니다. 맑은 찬물과 섞여 물 색깔이 희석되었기에 우리는 전혀 모르고 사용해 왔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물로 샤워하고, 세수하고, 양치했던 것이죠.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천만다행이에요. 보일러가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이 물을 계속 사용했을 거 아니에요.” 수리공의 이 말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보일러가 고장 나고 물이 터져 한강물이 된 보일러실을 치우느라 고생은 했지만, “고장 나서 다행이다”가 어깨춤을 추며 절로 나왔습니다. ‘고장 나서 다행이다.’ ‘만약 고장 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니.’ ‘잘 고장났네.’
저는 한겨울에 온수 보일러가 터진 것도 화가 났고, 물로 가득 찬 먼지 쌓인 보일러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물을 퍼 나르는 것도 짜증이 났습니다. 원래 계획은 책상에 앉아 주일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도 못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수리공 아저씨의 한마디에 제가 했던 모든 화, 짜증, 못마땅함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마음속에서는 ‘고장 나서 다행이다’, ‘안 고장 났으면 어쩔 뻔했나’, ‘정말 잘 고장났네’를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지금 내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 화나고 짜증 나고 못마땅한 현실이 어쩌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길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더 큰 수렁으로 빠져들 뻔한 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텍사스 달라스에서 GMC 한미연회 목사회(Order of Elders) 모임이 있었습니다. 첫날 저녁식사는 어느 한식당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앉은 테이블에는 개척위원장 한명훈 목사님과 저, 그리고 두 분의 부목사님이 동석했습니다. 부목사님 한 분은 조지아에서, 다른 한 분은 알라바마에서 부목사로 사역하고 계셨습니다. 주문한 식사를 기다릴 때 개척위원장 목사님이 30대 부목사님 두 분께 단도직입적으로 여쭈었습니다. “목사님, 교회 개척에 관심이 없으신가요?” 두 분 목사님은 한국에서 오신 지 불과 1~2년밖에 안 되었고, 아직 미국 생활에 적응 중이었기에 대뜸 교회 개척 얘기를 꺼내니 당황스러운 눈치였습니다. 여기에 제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묵직한 의무감이 들어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목사님들, 교회 개척하세요. 가슴 졸이는 짜릿함이 있기는 하지만, 행복합니다. 기쁩니다. 교인 한 분 한 분의 소중함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저 같은 오십 넘은 사람도 교회 개척하는데요. 아직 30대 잖아요. 교회 개척하세요.”
사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제 자신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목회 중 제일 피하고 싶었던 일이 바로 교회 개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교회 개척을 응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불과 2년 전 여름, 알라바마 몽고메리에서 만난 선배 목사님이 제게 말했습니다. “박 목사님, 여기 와서 개척하세요. 한인들이 모이는 지역인데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한인 교회가 두 개밖에 없어요. 예배 자리는 내가 미국교회에 알아봐 줄게.” 그 말을 처음 들을 때 저는 ‘이 선배가 왜 이러나’라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 선배 목사님의 마음을 조금, 아주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 목사님은 교회 개척을 두 번이나 했고, 두 교회 모두에서 많은 열매를 맺은 경험이 있었던 분이셨습니다. 저는 겨우 교회 개척 15개월 된 목사입니다. 이 길은 지금까지 제가 계획하고 희망했던 길과는 완전히 다른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임을 확신합니다. 한 영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개척하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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