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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 박사 강의, 부끄럽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윤리 - 정직, 정의, 황금률, 절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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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복음방송(사장 이영선 목사)은 세계적 기독교 윤리학자 손봉호 박사를 초청하여, '이웃에게 부끄럽지 않은 교회'라는 주제로 특별 세미나를 개최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주제로 이민교회에 묻다'는 부제가 붙은 금번 세미나는 5월 18일에 개최되었다. 다음은 손봉호 박사의 강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부끄럽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윤리
정직, 정의, 황금률, 절제의 삶


1. 신학을 공부하게 된 배경: 군대에서 경험한 부정직의 현실


제가 신학을 공부하게 된 배경은 조금 특이합니다.


저는 1961년에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후방 부대였지만, 군수 물자를 지키는 경비 중대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저는 매우 충격적인 현실을 보았습니다. 1등병부터 중대장까지, 부대 안에서 도둑질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학교와 교회만 오가며 살았기 때문에, 그런 세상을 처음 경험했습니다. 그 현실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더 힘들었던 것은, 도둑질을 하지 않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함께 도둑질하지 않으면 고자질할까 봐 두려워했고, 그래서 어떻게든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일에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그 때문에 많이 얻어맞기도 했습니다.


원래 저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영어학을 전공하고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영어학 교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학자가 되는 것이 제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군대에서 그런 부정직한 사회 현실을 경험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영어학을 공부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이 사회에는 국민 계몽과 교육이 더 필요하지 않은가?’


그때 마침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한국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곳에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앞으로 목회할 사람이 아닙니다. 국민 계몽이나 교육 쪽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도 학생으로 받아들여 주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답장은 시험을 한번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신 교단에 와 있던 선교사 앞에서 시험을 보았고,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장학금도 받게 되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가니 교수님들이 자주 물으셨습니다. ‘왜 목회를 하지 않으려고 하느냐?’ 저는 제 자신이 목회할 인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화가 나면 참지 못하고 달려드는 성격이 있었고, 4·19 때도 열심히 데모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은 목회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교수님들은 ‘의로운 분노는 괜찮다. 부정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라고 하셨지만, 저는 끝내 목회에 대한 자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기독교 철학을 공부했고, 부전공으로 윤리학을 공부했습니다. 윤리학도 절반은 신학 윤리, 절반은 철학 윤리였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윤리학, 사회철학, 사회윤리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군대에서 처음 붙들었던 ‘윤리 문제’가 제 일생의 관심이 된 셈입니다.


2. 교민사회와 목회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한 가지: 정직한 공동체가 되자


오늘 제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교민교회 목사님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 사는 한국 교민들이 ‘가장 존경받는 소수민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한국인을 떠올릴 때, ‘한국인은 정직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사실이다.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일은 목사님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민사회에서 목사님들이 차지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이 교인들과 후손을 사랑하고, 한국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교민사회 안에 정직의 문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정직한 소수민족이라는 평판이 생기면, 그것은 미국에도 복이 되고, 한국에도 복이 되고, 후손들에게도 큰 명예가 됩니다. 하나님께도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한 가지만 강조하고 싶습니다.


‘죽어도 거짓말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짓말을 해야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정직은 결국 자기에게도 유익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거짓과 부정직을 싫어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정직해야 복음도 진실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3. 윤리와 도덕: 말은 달라도 본질은 같다


우리가 사용하는 ‘윤리’라는 단어는 원래 동양의 고유한 말이 아닙니다. 서양어를 일본 사람들이 번역한 말이고, 그것을 중국과 한국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도덕’이라는 단어는 중국에 이미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와는 달랐습니다.


서양어로 보면 ‘윤리’는 ethics를 번역한 말이고, ‘도덕’은 morality를 번역한 말입니다. ethics는 헬라어 ethos에서 나왔고, morality는 라틴어 mos에서 나왔습니다. 두 단어 모두 습관, 관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윤리와 도덕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이론적 문제를 다룰 때는 ‘윤리’라고 하고, 실천적인 삶을 강조할 때는 ‘도덕’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단어를 섞어 써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문화와 문명도 비슷합니다. 학자들에 따라 엄격히 구별하기도 하지만, 문화인류학에서는 culture와 civilization을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civilization은 도시와 관련된 라틴어에서 나왔고, culture는 땅을 간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에서 나왔습니다. 어원은 다르지만 실제 사용에서는 상당히 겹칩니다.


목회자들이 설교할 때 이런 용어 차이 때문에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의 구분보다 삶의 실천입니다.


4. 한국 교회의 신뢰 위기와 부정직의 문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몇 년마다 한국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를 조사합니다. 최근 조사에서 한국 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19% 정도였습니다. 천주교와 불교보다 낮은 수치였습니다.


한국 교회가 신뢰받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독선적이다’라는 평가입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우리가 감수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독선적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부정직하다’는 평가입니다. 기독교인이 부정직하다는 말은 결코 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복음의 신뢰성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한국 교회가 다시 신뢰를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윤리와 도덕 운동을 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결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도덕적 신뢰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단순히 설교를 잘하는 목회자보다, 품성이 바르고 믿을 수 있고 존경할 수 있는 목회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과거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사회적으로 아무 이익이 없는 길을 걸었습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은 가난을 감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제게 목사님은 거의 성자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목회는 세상적으로 얻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순교와 같은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언제부터인가 사회의 신뢰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교회 성장 우상’입니다. 큰 교회를 이루는 것이 목표가 되면서, 기복신앙과 왜곡된 이신득의가 결합되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믿기만 하면 된다.’

‘행위나 윤리를 말하면 자유주의다.’


이런 식의 분위기가 생겼습니다. 물론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가르칩니다.


칼빈과 루터도 이신득의를 강조했지만, 윤리적 삶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열심히 일해야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보았고, 칼빈도 부자가 된 것은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책임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윤리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5. 사실의 영역과 당위의 영역: 윤리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다룬다


철학적으로 인간의 행동을 보면 두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실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당위의 영역입니다.


‘오늘 날씨가 좋다’는 말은 사실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거짓말하면 안 된다’, ‘정직해야 한다’, ‘공정해야 한다’는 말은 당위의 영역입니다. 당위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뜻합니다. 윤리는 바로 이 당위의 영역을 다룹니다.


성경은 사실도 가르치지만, 당위를 훨씬 더 많이 가르칩니다. 골로새서 3장에서도 거짓말하지 말고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라고 말합니다.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불의하게 사는 사람들을 향해 매우 강하게 책망합니다. 하나님은 불의와 거짓을 가볍게 보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윤리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포함합니다.


6. 윤리의 핵심은 정직이며, 더 깊은 핵심은 정의다


저는 윤리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정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직보다 더 깊은 핵심은 정의라고 봅니다.


성경에는 정의, 공의, 의라는 말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미가서 6장 8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합니다.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정의란 모든 사람을 동일한 인간으로 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것은 같게 취급하는 것이 정의’라고 말했습니다. 매우 당연한 말입니다. 두 사람이 같은 시간 일했다면 같은 임금을 받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정의론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류 역사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가르칩니다.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건강한 자와 장애인, 내국인과 외국인 모두가 근본적으로 같은 존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기본권을 가진다는 사상은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보편인권선언도 이런 전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보편인권선언을 ‘유대-기독교 전통을 세속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정의로워야 합니다. 누구보다 공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랑스럽게 지켜야 할 신앙의 유산입니다.


7. 정의는 약한 사람에게 더 큰 관심을 갖는 것이다


현대 정의론에서 큰 영향을 준 철학자 가운데 존 롤스가 있습니다. 그는 정의의 원칙 가운데 ‘평등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을 말했습니다. 특히 차등의 원칙은 최소 수혜자, 곧 가장 적은 혜택을 받은 사람에게 가장 큰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이것은 사실 성경이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정신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성경은 이론적으로만 정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을 돌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잔치를 베풀 때 부자나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을 부르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과 갚을 수 없는 사람을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갚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되돌려 받을 것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고 약한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기뻐하십니다. 반대로 정의에 어긋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매우 엄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약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않고,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정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8. 윤리적 판단의 길잡이: 황금률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황금률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예수님은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요약한 것이 바로 황금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금률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 이집트, 그리스 철학, 공자의 가르침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공자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소극적 표현입니다. 반면 성경은 ‘네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주라’고 적극적으로 표현합니다.


황금률은 윤리적 행동의 매우 좋은 기준입니다. 이 원칙대로만 살아도 우리는 많은 잘못을 피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않고, 내가 받고 싶은 대접을 남에게 베푸는 것이 윤리의 중요한 길입니다.


그러나 황금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따르는 데는 도덕적 성숙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지식이 많다고 해서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과 행동은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날 AI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져도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식이 많다고 해서 곧 어진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삶과 윤리를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교육은 필요하지만, 그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가르치는 교육이어야 합니다.


9. 정의의 실제: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않는 것


정의를 말할 때 매우 중요한 것은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억울함을 당하는 것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일입니다. 한국의 옛이야기에도 원한과 복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이 권력자와 부자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죽어서 원귀가 되어 원수를 갚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억울함을 깊이 느꼈다는 증거입니다.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위해의 원칙’을 말했습니다. 문명사회에서 한 사람의 자유를 강제로 제한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윤리의 핵심도 이와 연결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특히 약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 있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는 어렵습니다. 대개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은 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윤리는 약한 사람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이 억울함을 당하지 않도록 막는 것입니다.


윤리는 너무 복잡하게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약한 사람을 해치지 않고, 약한 사람이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10. 고통을 줄이는 것이 윤리의 중요한 과제다


인간이 예외 없이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입니다. 반대로 인간이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은 쾌락, 행복, 기쁨입니다. 영국 철학자 벤담은 공리주의를 말하면서 쾌락과 고통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전통적으로 철학은 행복과 쾌락에 대해 많이 논의했지만, 고통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적게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데 쾌락을 추구하는 것보다 고통을 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를 소극적 공리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악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악입니다. 질병, 천재지변처럼 자연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다른 하나는 도덕악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자연악은 어느 정도 줄어들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가난한 지역에서는 질병과 재난이 심각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자연악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악은 여전히 심각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C. S. 루이스는 인간이 겪는 고통의 상당 부분이 다른 사람 때문에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도덕악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도덕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작위의 악입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직접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작위의 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인은 선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마땅히 도와야 했는데도 돕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부작위의 악입니다.


부자 청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계명은 지켰다고 말했지만, 예수님께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하셨을 때 떠났습니다. 그는 악한 일을 적극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도와야 할 사람을 돕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를 모두 피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하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외면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11. 욕망을 절제하지 않으면 윤리적 삶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왜 작위와 부작위의 악을 범합니까? 근본에는 욕망이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윤리적으로 살려면 욕망을 억제해야 합니다. 욕망을 절제하지 않고서는 바르게 살기 어렵습니다. 물론 완전히 성화된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선을 행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자기 유익과 욕망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절제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절제를 매우 강조합니다. 특히 지도자들에게 절제는 필수입니다. 감독과 목회자는 절제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8절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집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최소한의 필요만 언급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12절도 중요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짐을 잔뜩 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잠시 머물다 떠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네덜란드에서 살 때, 어차피 돌아갈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많은 물건을 사는 것이 아까웠습니다. 친구들에게 빌려 쓰고, 아이들도 헌옷을 입히며 키웠습니다. 나그네는 그 땅에 영원히 머물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그렇게 선한 행실을 보일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12.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세상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하는 삶이다


장로교의 교리문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께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서 더 나아갑니다. 베드로전서와 마태복음 5장은 이방인들, 곧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두 방향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둘째,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윤리는 전도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 복음의 신뢰성이 손상됩니다. 반대로 정직하고 정의롭고 절제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삶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13. 종교개혁 전통과 절제의 삶


종교개혁자들은 절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막스 베버는 종교개혁자들의 삶을 ‘현세 내적 금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수도원이나 절에 들어가 절제한 것이 아니라, 시장 한가운데서, 일상의 삶 속에서 절제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했지만, 사치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었지만, 자기 욕망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그 절제의 정신이 자본주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경제학자들 사이에 논쟁은 있지만, 종교개혁 전통에 절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유럽의 경건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식탐을 죄로 여기는 전통도 있었습니다. 맛있는 것을 지나치게 탐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소박하고 맛없는 음식을 먹는 문화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들의 절제 정신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낭비하지 않는 삶도 중요합니다. 미국 사회를 볼 때마다 너무 많이 낭비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낭비는 환경오염과 자원 고갈로도 이어집니다. 절제는 개인의 경건만이 아니라 이웃 사랑과 창조세계 보전과도 연결됩니다.


저는 아끼는 삶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낀 돈은 자기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한 곳에 흘려보내야 합니다. 절제는 단순히 인색함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이웃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기 위한 삶의 방식입니다.


독일의 한 신학자는 헬레니즘도 절제를 강조했지만, 그 절제는 자기의 도덕적 우월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절제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위해 절제합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절제합니다. 이것이 성경적 절제의 아름다움입니다.


14. 정직의 실제적 기준: 모든 사실 아닌 말이 거짓말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정직의 문제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우리 교민사회와 교회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우선 한 가지를 붙들었으면 합니다.


‘절대로 거짓말하지 말자.’


그러나 거짓말을 너무 기계적으로 정의하면 어려움이 생깁니다. 모든 사실 아닌 말이 곧 죄 되는 거짓말은 아닙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썩 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더라도, 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 ‘예쁘네요’라고 말하는 것은 악한 거짓말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또 악한 사람으로부터 선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사실과 다르게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칸트는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지만, 다른 철학자들은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해치려 할 때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사실과 다르게 말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거짓말은 이것입니다.


부당하게 내가 이익을 얻기 위해 하는 거짓말, 또는 부당하게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기 위해 하는 거짓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거짓말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작은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고, 남을 해롭게 하고, 부정직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명예에 어긋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15. 결론: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회복하자


오늘 말씀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정의로워야 합니다. 약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욕망을 절제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을 위해서, 한국인의 명예를 위해서, 교회의 신뢰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작은 이익 때문에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을 해롭게 하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직하고 정의롭고 절제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다운 명예가 있어야 합니다.



김동욱 기자 ⓒ 복음뉴스(BogEu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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