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5장 2절 말씀 묵상 [민경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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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님!_탄생예언2
본문 :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이 땅에 구원주로 오신 예수님은 작고 초라한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구약에서부터 있어온 유대 마을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43번, 신약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8번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탄생지로 베들레헴이 아닌, 성전이 있던 큰 도시 수도 예루살렘을 택하셨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왜 구세주 예수님을 유대 땅에서 작은 마을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하셨을까요?
1. 첫째 이유는 베들레헴이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의 고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베들레헴은 예로부터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으며, 메시아의 탄생지가 될 만큼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 이새와 함께 온 식구가 베들레헴에서 살았습니다 (삼상 16:18; 17:58; 눅 2:4; 요 7:42). 다윗왕의 후손으로 영원한 왕 된 메시아가 오셔야 하기에 예수님은 다윗왕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던 것입니다.
2. 둘째 이유는 예수님 탄생지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미가는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예언이 베들레헴에서 성취되었음을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마 2:1).
당시에 성령님으로 인해 잉태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요셉은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세금 징수를 위한 목적으로 호적령을 내렸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해산할 기한이 임박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원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처럼 로마 황제의 호적령과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의 여행, 그리고 해산 기일이 임박한 마리아의 상태 등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메시아의 탄생이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지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움직임이었던 것입니다.
통일교 문선명이 구세주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척 많습니다. 그 중 출생지가 대표적입니다. 이미 태어나고 보니 이스라엘 나라의 베들레헴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이었습니다.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에서 그는 출생했습니다.
3.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심에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히브리어로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Beth'는 집, 'lehem'은 떡을 의미합니다. 즉 이러한 '떡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루어 졌습니다. 나아가 예수님 자신은 바로 '생명의 떡'이었습니다 (요 6:35, 51).
이 “생명의 떡”은 애굽에서 자유를 찾아 탈출하던 유월절에서부터 상징화되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누룩을 넣지 아니한 떡을 준비했었습니다 (참조, 출 12:1-11). 이 떡과 피는 광야 40년 동안에는 만나와 생수로 현시되었습니다 (참조, 고전 10:3-4).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광야에서 내린 '만나'와 비교하셨던 것입니다 (요 6:49). 예수님 때에 이르러 떡과 양의 피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 표현되었습니다 (참조, 요 6:54-58).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로 상징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상징들은 모든 사람을 죄에서 해방하여 영원한 자유를 보장하는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처럼 “생명의 떡”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와 떡집 베들레헴에 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양식'(요 6:55)으로서 그의 일생을 또한 사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베들레헴은 우리를 위해 구원이 시작된 장소입니다.
구약성경 룻기에 등장하는 베들레헴 사람 보아스는 대가 끊긴 나오미의 가정을 구원하는 “기업 무를 자”였습니다 (룻 3:13). 이 보아스는 이방인 룻과 결혼하여 오벳을 낳아 영광스런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게 하였습니다.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 4:21-22).
이 베들레헴 사람 보아스는 온 인류, 모든 죄인들의 기업 무를 자, 즉 구원주인 예수님의 예표였습니다.
이 같은 이유들로 예수님은 반드시 다른 곳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의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한 장면으로 보여주는 장소는 어디였을까요?
바로 베들레헴 안의 마굿간, 그 안에 놓여진 더럽고 초라한 구유(말먹이통)였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눅 2:11-12).
아기 예수님이 말구유에 누이신 것은 표적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자기 비하'의 시작이었습니다. '겸손과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인류를 죄악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장 비천한 삶으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 (빌 2:6-8 전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신비 중의 신비이며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지존과 영광의 하나님이 천하고 천한 말구유에 누이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섬기며 구원하는 구주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표적(세메이온)”은 여러 표적 중의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인 표적”이라는 뜻입니다. 원문은 구유에 누이신 것을 “토 세메이온 (;그 표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 베들레헴에 갓 태어나 강보에 싸인 아기는 여럿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보에 싸여 말먹이통 구유에 누인 아기는 오직 아기 예수님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구주를 드러내는 그 표적이었습니다.
오늘날 누가 예수 그리스도 구주의 영혼육 전인 구원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나아가 계속해서 주님의 긍휼을 입고 실생활 가운데 구원의 은총을 덧입고 살 수 있을까요? 오늘날 혹시 갓난 아기 예수님이 누이셨던 더럽고 초라한 말먹이통이 보이십니까? 혹시 말먹이통처럼 천하고 낮아진 자신의 모습이 느껴지십니까? 거룩하고 전지전능하신 주님 앞에 부끄럽고 더럽고 교만하고 초췌한 자신의 모습이 연상되십니까?
그렇다면 바로 그것이 여러분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시는 은혜의 징조입니다. 또한 이미 은혜를 입어 축복 가운데 살고 있지만, 다시금 그리스도의 긍휼의 은총을 덧입는 신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처럼, 가난과 비천함이 “거룩함과 풍요함, 축복과 영광”으로 승화되는 시발점입니다.
베들레헴 예수 탄생교회(Church of Nativity)는 머리와 허리를 숙이고 “겸손의 문”을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 지하에 위치한 탄생 동굴 바닥에 큰 별이 그려져 있는데 그 곳이 바로 아기 예수님이 누여진 말구유가 있던 곳입니다. 서서 보이지 않아 허리를 숙이고 엎드려야만 보이는 곳입니다. 때문에 순례객들은 눕거나 자세를 낮춰 바라보며 기도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구주, 예수님을 진정 만나기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 18:12).
세간에도 “머리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성탄절기에 예수님이 다윗왕의 동네에 왕손으로, 오셨음을, 또한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셨음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떡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려 떡집 베들레헴에 나셨음을 기뻐하시길 축원합니다.
나아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가장 천한 말 구유에 아기로 누이신 “그 겸손의 표적”에 감흡하시길,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또한 사람들 앞에 겸손한 심령이 되어, 예수님의 놀라운 영혼육 총체적 구원을 체험하는 성탄절기 되시길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