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설교

[백의흠]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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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본문 : 창세기 28장 10-22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중국의 진나라의 나관중 이라는 사람이 쓴 '삼국지'를 보면 재미있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들도 읽으셔서 잘 아시겠지만 중국에 후한이 멸망하자 중국에는 세나라로 나누워져 서로 싸웁니다.

위나라의 조조와 초나라의 유비, 오나라의 손권이 서로 물리고 무는 전쟁을 벌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어떤 때는 크게 승리를 거두어 성을 빼앗고 영토를 확장하고 어떤 때는 대패하여 모든 군사들을 잃고 목숨만 겨우 살아 홀연단신으로 도망합니다.

그런데 그 때의 장면이 참 재미있습니다.

위나라의 조조가 촉나라의 제갈공명의 전술에 말려 대패하여 도망칩니다.

포위망을 뚫고 겨우 목숨만 살아 도망가서는 이제는 살았구나 하면서 안도를 하는데 갑자기 적군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조조는 또 필사적으로 도망갑니다. 그래서 한참 도망가서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데 또 한떼의 군사들이 몰려 옵니다. 그러자 조조는 절망에 빠져 '하늘이 조조를 버리는 구나'탄식하면서 죽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조조의 부하 장수인 처저가 군사를 이끄러 나타나자 조조는 힘을 얻더 적진을 뚫고 도망가 살아납니다.

결국에는 조조의 위나라의 사마염이라는 신하가 왕위에 올라 사마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됩니다.


내가 위급한 사애로 도망가거나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누군가가 나와 함께 있으면 나를 도와 준다는 것은 놀라운 정도로 큰 힘이 됩니다.

그런데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도와 주시는 분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라면 그 때 나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오늘 창세기 28장의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야곱이란 사람은 간사한 사람입니다.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가며 형의 장자권과 모든 축복을 다 빼았습니다.

그러자 형 에사는 너무 분해서 야곱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권유로 하란에 있는 외삼촌 집으로 도망갑니다.

형의 추적을 피하여 고향인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 약 천오백리 길을 가던 야곱능 중간에 벧엘이라는 들판에서 하룻밤을 쉬어가게 됩니다.

이 때 야곱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겠습니까?

에서가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공포에 쌓여 있습니다.

또한 전혀 낯선 환경속에서 혼자 들판에서 잠을 자려니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광야에서 돌을 베고 잠을 자고 그는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하늘에서부터 땅까지 닿았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고 그 위에는 하나님이 서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축복의 약속을 해 줍니다.

그래서 야곱이 잠에서 깨고 나거 "여기가 하나님이 계신 곳인 줄을 몰랐구나"하고는 그 곳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벧엘 사건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는 야곱의 하나님의 집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의 있는 곳을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사라리는 누가 놓은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12,13절, "꿈에 본 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우리가 보통 사다리하면 높은 곳에 올라 갈 생각만 합니다만 사다리는 올라갈 때만 쓰는 것이 아니라 애려 올 때도 씁니다.

이 사다리는 야곱이 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놓으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내려 오시려고 놓은 것입니다.

야곱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찾아 오신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 있는 곳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이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가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 우리가 찾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인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갈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죄인들인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구원은 언제나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내가 죄악속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하나님게서 나를 찾아 오셔서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내가 약해서 쓰러질 때 나는 하나님을 붙잡을 힘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찾아 오셔서 나를 붙잡아 일으켜 주셨습니다.

내가 어려움과 고통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괴로와 하는 그 모습을 보시고 나를 찾아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내가 갈 길을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와 나의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 밤 낯선 들판에서 겁에 질려 피곤함과 두려움속에서 떨고 있던 야곱을 만나기 위해서 천사를 대동하고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야곱에게 축복하셨습니다.

13,14절,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보세요.

야곱이 왜 이 들판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까?

야곱이 죄를 짓고 도망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빈다.

야곱은 비난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야곱을 만나자마다 꾸중하시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약속을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도 범죄한 야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야곱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네가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너를 사랑한단다. 네가 나를 배신하고 네가 형편없이 타락했더라도 나는 너를 사랑해!  너를 향한 나의 기대는 변함이 없어!"

내가 죄를 범하고 잘못했을 때 나를 채찍을 들어 때리기 보다는 나를 달해시는 하나님!

그러면서도 나의 그 잘못된 깅르 바꾸도록 촉구하시는 자상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죄인인 나에게 마땅히 내려야 할 채찍 대신에 오히려 축복을 주시면서 내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뻐하시는 이 하나님의 마음!

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자애스러운 마음을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죄, 나의 실패 때문에 너는 이제 필요없다고 버리지 않으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

내가 한번의 죄를 범하고 두번의 죄를 범한다 할지라도 또 나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내가 주님께 돌아 오기를 바라며 달래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

우리는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고 형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는 야곱을 찾아 오셔서 축복을 약속해 주시고 이 축복을 이루기 위해서 거듭해서 또 다른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 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첫번째 약속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와 함게 있어"

내가 너화 함께 한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만 하신다면 무엇이 걱정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네가 이 세상을 살아 가면서 내 앞에서 당당하고 거룩하게 살어,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살어, 내가 주는 축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 내가 너와 함께 하마"

이것이 하나님의 첫번째 약속입니다.


두번째 약속은 ?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내가 너를 보호한다.  하나님이 보호를 약속합니다.

야곱은 지금 형을 피해 도망갑니다.

그는 낯선 땅, 낯선 환경속에서 두려워합니다.

앞날이 어떻게 될 지 몰라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만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지켜 주시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항상 지켜 주시고 보호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못나고 죄짓고 뺀질거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지 못한다 할찌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자기 눈동자같이 지켜 주십니다.

우리의 과거의 모든 삶을 지켜 주시고 지금까지 보호하신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미래의 살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어제를 지켜 주신 하나님은 오늘도 지켜 주시고 내일도 지켜 주십니다.

앞날에 대해 걱정하시 마세요,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세번째 약속은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 오게 할지라.

내가 너를 인도한다.  내가 네 걸음을 한걸음 한걸은 인도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인도가 있습니다.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아십니다.  그리고 내 걸음을 한걸음 한걸음 인도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면 우리가 가려돈 목교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네번째 약소은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무슨 말입니까?

"내가 너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일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한다.

네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마칠 때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비록 네가 못났지만 너를 향한 나의 거룩한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너를 포기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고집입니다.

야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고집스런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통하여 기여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이비다.

비록 내가 못나고 죄를 범했다 할찌라고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영광스러운 존재로 하나님 앞에 쓰임받고 쓸모있느 존재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 일을 완성하기까지 하나님은 나를 떠나지 아니하며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

못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이 기대,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윽고 야곱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합니다.

16절,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비록 그것이 꿈이었지만 야곱은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가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여기에 나와 함께 계셨는데 내가 몰랐구나."  "주님이 여기 계셨는데"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많이 생각합니다.

내가 영성으로 강해지고 신앙이 좋고 주님 말씀대로 살 때에는 하나님이 나와 함게 계시지만 내가 죄를 범하고 내 마음대로 살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떠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잘 것 없는 자기 자신을 돌이며 보면서 "어떻게 나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나?"라는 생각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비록 내가 죄를 짓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으 나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야곱을 보세요.

야곱의 지금의 신앙은 아주 연약한 상태입니다.

거의 신자라고도 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미숙한 상대의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그에게 아직 성숙한 것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 그의 모습은 너무 형편없습니다.

믿는다고는 하지만 믿으나 마나한 사람, 그가 바로 야곱입니다.

믿음의 증거도 하나도 없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먹칠하고 돌아다닌 사람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사기를 치고 도둑질하고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 놀라운 사실을 보세요.

주께서 그런 지독히 형편없는 그와 더불어 함께 하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가정의 자녀들 가운데 어떤 자녀에게 더 신경이 갑니까?

다 장성한 자녀보다는 아직 미숙하고 약점이 많은 어린 자녀에게 마음이 더 쓰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들에게 얼마나 더욱 부모의 손길과 돌봄을 필요로 합니까?


제가 잘 아는 집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에게는 몸이 불구인 아들이 한 명 있습니다.

이 아이가 어렸을 때 이 집사님이 친구네 집에 놀러 갔따가 그만 아파트 3층에서 떨어져서 대수술을 몇 번 받았지만 결국에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자녀들을 대할 때 이 아드를 대하는 태도는 다릅니다.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도 언제나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립니다.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하는 불구 아들을 부르시는 어머니의 슬픔에 찬 음성을 저는 언제나 다르게 느낄 수 있습니다.

바라보시는 눈동자도 어는 성한 자식을 바라보시는 눈동자와 같지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형편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심이 더욱 필요합니다.

내가 신앙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형편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형편없기에 하나님은 더욱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야곱이 더러웠고 그가 수치스러웠기에 하나님은 그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떳떳하게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주님은 더욱 나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주님은 나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야곱을 일으켜서 그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를 더욱 쫓아다니며 그와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야곱이 그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그는 고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 주님이 여기 계셨어요"

그날 밤, 그 현장을 통해 야곱은 자기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죄를 범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주님은 내 곁에 계십니다.

주님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내가 무관심하게 주님을 등지고 내 마음대로 살았을 때, 주님은 아파하시며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를 떠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 분의 눈동자는 나를 따라 옵니다.

내가 살아가는 어느 곳에서도 주님의 손길과 음성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배신하는 그 자리에도 주님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애써서 주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있던 그 자리에도 주님을 피하고 도망쳤던 그 자리에도 주님은 함께 하십니다

내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 생활로 만족하려고 하는 나의 삶 가운데도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가 그 분의 자녀라면 그 분은 나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나 나와 함께 계십니다. 


오래 전에 가이드 포스트하는 책에 이런 일화가 나왔습니다.

월남전때 월남에 포로로 잡힌 남편이 고통을 당한다는 편지를 그의 부인이 받았습니다.

그 부인이 어느 날 자기 아들이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울타리도 쳐 놓고 집을 하나 그려 놓은 것이었습니다.

"애, 이게 뭐니?"  "응, 아빠가 있는 포로 수용소야"

이 이야기를 들은 부인은 그만 울쿳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흐느끼니까 그 아이가 "엄마, 왜 울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이 곳은 말이야. 하나님이 계시잖아!" 

" 엄마! 왜 울어?  이 곳에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자기 남편이 포로 수용소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 엄마의 눈물을 씻아 주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우리가 실제 삶을 살면서 그가 어디나 계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어디나 계신 하나님은 그 무시무시한 공산당의 핍박 속에서도 계십니다.

중공에서 지난 40년동안 40배 그리스도인들이 증가했습니다.

하나님은 중공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소련에도 계십니다.

많은 소련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무수한 고통을 당해 죽어 갔지만 지금 소련에서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그 시베리아의 무시무시한 감옥 속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계십니다.

이북의 김일성이 아무리 핍박한다 할지라도 이북에도 우리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 북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종국에는 승리할 것입니다.

신앙이 그렇게 쉽게 죽어 버린 적은 역사상 한번도 없습니다.


콘스탄니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 로마에는 수많은 박해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 불에 태워 죽이고 사자 밥을 만들고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그 박해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의 씨가 마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천만예요.

카타쿰에서 숨어서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300면만에 뚜껑을 열어 보니 황제의 어머니도, 아내도, 왕자도, 공주도 모두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디나 계시는 그 하나님이 성도를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제 비로소 하나님이 이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만났던 그 장소에 돌기둥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들판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들판이지만 하나님을 만난 장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입니다.

주께서 함께 하시는 장소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리고 나서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 앞에 몇가지 결심을 합니다.

20-22절,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문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의 생애에 최초로 볼 수 있는 서원, 즉 결심입니다.

야곱은 주님을 위해 이러이러하게 살겠다고 처음으로 결심합니다

"네가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주를 위하여 성전을 짓겠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야곱이 서원을 했다는 것 그 자체가 신앙의 성숙입니다.

서원을 지켔느냐? 안지켰느냐? 그것을 따지기에 앞서 야곱이 하나님 앞에 서원했다는 그 자체가 신앙의 성국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제 네가 이만큼 자랐구나. 나를 위하여 결심도 할 줄 아는구나"


비록 그 결심을 다 이루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공수표일지라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책감을 느끼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우리 가운데 교회에 다니면서도 한번도 주를 위하여 이렇게 살겠노라고 결심하고 고백하지 못한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비록 이것이 공수표일지라도 주님께서 이 고백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자식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식들이 때로 "아빠, 엄마 내가 크면 아빠 위해 집도 사주고 외국 여행도 시켜 드릴께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응답합니까?

웃습니다.  "다 안다"

속으로는 그렇게 다 못할 줄을 압니다.  그래도 기쁜 것입니다.

"저 애가 어느새 자라 부모를 생각할 줄도 아는구나"


비록 그대로 다 지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를 원하는 고백을 드릴 수 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믿음의 성숙이고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비록 내가 죄를 범하고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주님 뜻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은 기뻐하시면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죄를 범할 때는 주님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나와 함께 계십니다.

야곱이 수치스러웠고 그가 떳떳하게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자녀였기에 주님은  더욱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용기 잃지 말고 살아 가세요.

그 주님 앞에 바로 말씀대로 살아 가세요.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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