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유혹을 이기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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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혹을 이기려면
본문: 창세기 39장 7-18절
설교: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남아메리카 아마존 밀림 속에 부쉬마스터라는 독사가 있습니다.
이 뱀은 몸집이 크고 공격적인데다가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생명체도 한번 물리면 20분 이상은 살아 있을 수가 없고 독이 전 혈액에 퍼지기 때문에 해독제를 써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독사는 빛깔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기어가는 모습이 마치 무지개의 영롱함처럼 황홀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달려드는 뱀을 피하지 못해서 물려 생명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유혹은 무섭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문필가 오스카 와일드는 “나는 유혹만 빼놓고 어떤 것이든 저항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유혹은 물리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조차도 유혹 앞에서 쉽게 쓰러졌습니다.
삼손은 혼자서 블레셋 사람 3천명을 죽인 영웅이었지만 여인의 유혹 앞에 맥을 못추고 넘어졌습니다.
다윗은 성군이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지만 한 여인의 목욕 장면에 쉽게 유혹되고 말았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유혹의 손길 앞에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요셉에게 유혹이 찾아 왔습니다.
이것은 고난보다 더 무서운 이기기 힘든 유혹이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유혹의 손길은 사탄의 마수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유혹을 이겼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까?
그 비결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늘 요셉이 유혹을 이긴 모습들을 살펴 보면서 우리의 삶속에 다가오는 유혹에서 이기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유혹을 물리치려면 확고한 윤리관을 가져야 합니다.
7절,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요셉은 유혹을 받자마자 즉각적으로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의 윤리관이 분명하게 올바르게 서 있습니다.
8, 9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요셉의 이 답변을 보세요.
그는 상식적인 도덕관이나 윤리관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륜을 알고 있고 도덕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의 시대를 보세요.
인륜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땅히 지켜야 할 당연한 윤리와 도덕이 있는데 이것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날은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없어져 가는 시대입니다.
당연히 지켜야 하는 인간의 윤리와 마땅히 붙잡아야 하는 도덕관이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사랑이다” “예술이다”하면서 윤리를 넘어서고 도덕을 무너 뜨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와 문화가 다르고 이 세상의 모습이 타락해도 인간으로서는 범해서는 안 될 도덕이 있고 윤리와 법이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도덕과 윤리가 더 철저하고 엄격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도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요셉은 자기를 신임하는 주인을 배반할 수 없다는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요셉은 주인의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집안 모든 일을 자기에게 맡겼지만 그 아내까지는 맡기지 않았고 그 아내와 옳지 않는 관계를 맺으면 그것은 주인의 신뢰를 완전히 저버리는 배신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머리 속에는 이처럼 자기 것과 자기 것 아닌 것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의 주인에게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의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또한 요셉은 하나님께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나 기준보다는 하나님의 평가와 기준을 따라 살았습니다.
주인의 아내를 건드리는 것은 자신을 믿고 사랑해 준 주인에 대한 배신일뿐 아니라 하나님께 엄청난 범죄가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선포입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형상을 주신 하나님께 상처를 드리는 것이며 그 얼굴에 침을 밷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의 신앙이었습니다.
완전한 신임은 완전한 책임감을 만듭니다.
사람은 자신을 믿는 사람을 배반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은 그 신의를 굳게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의를 지키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본능으로 오는 큰 유혹을 물리칠 수 있게 하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과 자기를 신임하는 사람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가치관과 윤리관을 보세요.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그는 큰 악과 죄라고 말합니다.
요셉에게 분명한 선과 악의 기준을 제시한 것입니다.
요셉은 이런 도덕적인 표준 의식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도덕적인 표준 의식이 무너져 가는 시대에서도 그 표준을 붙들고 살았기 때문에 그는 사회적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환경이 나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타락한다고 말합니다.
“너도 나와 같은 처지가 되어 봐라!”
환경이 타락의 변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요셉의 삶을 통해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셉에게 닥친 유혹은 순간적인 쾌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영원히 망치는 결과를 낳게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덕과 윤리가 무너져 가는 시대에 우리는 변치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나오는 확고한 윤리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로, 요셉은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가졌습니다.
9절 끝부분에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요셉의 윤리와 도덕적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너희의 기준에서는 이것이 죄가 아닐 지 몰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죄이기 때문에 죄를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유혹에서 지켜 준 힘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요셉은 지금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요셉을 보고 있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이론이 아닌 실제로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빤히 내려다 보고 계시는데 내가 죄를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죄를 짓습니까? 하나님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까 하나님도 나를 안 본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잊어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보고 있다면 죄를 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보십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내 모든 행동을, 내 말을, 내 생각을, 내 마음속의 동기를 그분은 보십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나늘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보십니다.
그 분의 불꽃 같은 눈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십니다. 나의 눈물을 보십니다. 나의 아픔을 보십니다.
나의 고통을 보십니다. 나의 괴로움을 보십니다.
유혹에 빠지려고 하는 나를 보십니다. 범죄하려고 하는 나를 보십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는 사실은 위로와 축복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범죄하려고 계획을 세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는 사실은 못내 괴로운 사건입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내 삶의 현장을 감찰하시고 꿰뚫어 보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범죄할 수 있습니까?
나를 지으시고, 나를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 그리고 내게 기대를 걸고 계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기 때문에 나의 고통과 눈물과 아픔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이 도와 주십니다.
나를 지키시고 나를 보호해 주십니다.
마치 눈동자같이 지키시며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 앞에 죄를 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이 축복이지만 죄를 짓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은 나를 지켜 보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피부로는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믿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달라 집니다.
나의 신앙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열쇠는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소에도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이런 유혹속에서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 가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일들을 결정하고 그 분 앞에서 행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보는 사람이 없으면 그저 적당하게 살아가고 유혹에 넘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 해야 합니다.
사람의 눈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잠14:12)
하나님의 뜻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은 어떤 결과로 오는 댓가라도 지불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 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 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를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손에 빠지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것이 더 좋은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축복해 주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세째로, 유혹의 기회조차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10절,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이 여인은 매 순간마다 기회가 나는 대로 요셉에게 부정을 청합니다.
기회만 되면 요셉에게 윙크를 하고 그 앞에서 유혹의 손길을 벌립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특성입니다.
죄는 집요한 특성이 있어서 한번 뿌리쳤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가옵니다.
끈질기게 아마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우리를 넘어 뜨리려고 다가옵니다.
그래서 문제는 집요하게 나를 향하여 다가오는 죄를 ’어떻게 물리칠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유혹의 기회조차 없애 버리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를 범할 수 있는 상황을 가능한 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유혹이 있을만한 환경은 피해야 합니다.
요셉은 주인의 처가 하는 말을 처음부터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함께 있지도 아니하였습니다.
매일 보고 함께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할 수 있는 한 유혹의 근처에서 멀리 떠나려 노력했
습니다.
불에 데지 않으려면 불장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근처에서 불에 손을 넣었다 뺏다 하면서 불에 데이지 않기를 바란다면 어리석은 짓입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혹을 받지 않기 위해 기도 한다면서 유혹의 기회 속으로 들어 간다면 그것은 마치 손가락을 불 속에 집어 넣고 불에 데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과 같다”
불에 데지 않으려면 당연히 불 가까이 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면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조차 배제해 버리고 기회조차 갖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오늘날 왜 많은 성도들이 죄를 짓습니까?
왜 자꾸 넘어집니까?
죄 지을 수 있는 가능성과 기회를 너무 많이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도 그것을 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계시죠?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무슨 말입니까?
내가 어떤 사물을 바라 볼 때에 그 보는 것 때문에 시험을 받는다면 보지 말라는 말입니다.
어떤 물건을 만질 때 죄 짓는 유혹을 받는다면 손이 잘려져서 없는 것처럼 만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아예 죄 지을 기회와 가능성조차 끊어 버리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볼 것을 다 보면서 마음으로 죄 짓지 않기를 바란다면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에 마찬가지입니다.
돈 때문에 유혹을 받는 사람은 돈으로 범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말 때문에 죄 짓는 사람은 그 말하는 기회부터 줄여야 합니다.
유혹을 받지 않으려면 유혹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바꿔야 합니다.
시편 1편에, 복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있는 사람이 되려면 죄를 지을 수 있는 길에 서지도 앉지도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죄 지은 수 있는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은 바로 이런 원리를 알았기 때문에 집요하게 달려드는 이 여인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요셉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혹 자체는 없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아무리 조심을 해도 생각지 못한 곳에서 유혹이 손짓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어떠한 상황일지라도 유혹의 손길을 벗어 버려야만 합니다.
유혹의 가능성마저도 만들지 않으려 피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유혹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시시한 쾌락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잠깐의 즐거움 때문에 두고 두고 후회할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잠시의 쾌락 때문에 영혼을 망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마귀가 틈타지 못하도록 기회를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하기 때문에 기회만 주어지면 넘어집니다.
틈을 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유혹에서도 승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네째로, 유혹은 피해야만 합니다.
11, 12절,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 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죄의 특성은 우리가 아무리 뿌리쳐도 끝까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없을 때 요셉의 옷을 붙잡고 동침하자고 합니다.
죄는 거부할 수 없을 상황까지 가서 우리를 강요하는 무서운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이기는 방법은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혹을 이기는 최대의 비밀은 “도망가는 것”입니다. 도망 간다고 비겁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망이 승리의 최대 비결입니다.
성적인 유혹에 대하여 사단과 싸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적인 유혹은 싸워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피해야 합니다.
도망가야 합니다. 기도도 부탁하지 마세요. 성적인 유혹 앞에 있다면 기도로도 안됩니다.
성적은 유혹을 받을 때는 이미 자기 마음 속에 그것을 즐길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안 들어 주십니다.
기도보다는 도망가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롭습니다.
성적 유혹의 문제에 관한 한 성자가 따로 없습니다.
성경은 죄를 이기는 방법 두 개를 말합니다.
하나는 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죄와는 싸워서 이겨야 하지만, 성적인 유혹은 피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젊은이 한 사람이 사창가 앞을 서성거리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는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와서 말합니다. “목사님! 기도해도 안 되던데요?”
그러자 목사님이 그에게 이렇게 일러 주었습니다.
“기도한 것은 잘했지만 기도가 너무 늦었다네”
무슨 말입니까? 시험에 들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미 시험에 든 다음에 기도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시험을 받는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시험에 빠지게 되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만일 우리가 고의적으로 시험 가운데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절대로 하나님의 도움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이성과 호텔에 들어 가면서 “하나님! 나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 없습니다.
성적인 유혹 앞에서는 무조건 도망가야 합니다.
요셉은 자기의 옷을 붙드는 여인에게서 그 옷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옷을 잃어 버리는 것이 순결을 잃는 것보다 낫습니다.
옷을 잃어 버리는 것이 양심을 잃어 버리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보세요.
이 여자에게는 체면도 위신도 찾아 볼 길이 없습니다.
이 여자는 정욕에 눈이 어두워진 나머지 노예에게 애원하다시피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여의치 않자 무력으로 일을 성사시켜 보려고 남자의 옷을 잡고 늘어 집니다.
이 여자가 이렇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완전히 정욕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여자가 자유인이고 요셉이 노예인 것 같지만 정욕의 문제에 있어서는
오히려 요셉이 자유인이고 이 여자가 노예입니다.
이것은 비단 이 여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무서운 정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교양이나 신분 때문에 지성인처럼 성인 군자처럼 생동하지만 그 속에는 동물적인 정욕이 있어서 한번 발동하기 시작하면 어떤 장사도 당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 여자의 광란하는 모습을 보세요.
이 여자도 평소에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집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을 때 속에 있는 죄성이 완전히 그를 지배하여 체면도 염치도 없는 동물의 수준으로 전략시켜 버렸습니다.
잘 생긴 이성을 보고 마음이 끌리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혹시 한 순간에 마음 속에 좋지 않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그런 음란한 생각을 통제하지 않았고 계속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요셉을 바라 보았고 그 생각을 실천할 기회를 엿보다가 그 기회가 포착되자 자신을 정욕의 노예로 내 던졌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명한 태도로 거절했고 이 여자가 욕망을 가라 앉힐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여자가 붙잡고 있던 옷을 벗어 버리고 도망 쳤습니다.
인간의 성욕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에서 건전한 부부간의 성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집 밖으로 넘어갈 때 문제가 됩니다.
성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문제입니다.
어떤 범죄든지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적인 범죄는 한 순간에 이루어 질 수 있는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생각의 씨앗을 미리 심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 생각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더러운 생각의 씨앗을 가슴에 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음란한 생각부터 없애 버려야 합니다.
다윗을 보세요.
요셉은 똑같은 상황에서 유혹을 이겼는데 다윗은 유혹에 넘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윗의 믿음이 더 없어서 입니까? 다윗이 하나님을 더 두려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다윗은 믿음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넘어진 이유가 있다면 다윗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어떤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자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알아 보게 하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아름다운 여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서요.
죄의 유혹은 우리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한 번 들어 가 보고 싶은 생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유혹이 오면 우리의 욕정 때문에 그 죄를 향하여 가까이 나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넘어지고 맙니다.
요셉처럼 단호하게 도망 가야 합니다.
유혹에 이기기가 다윗의 상황보다 요셉의 상황이 더 어려웠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알아 보려고 가까이 갔고 요셉은 도망가서 이겼습니다.
요셉이 얻은 위대한 도덕적인 승리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귀중한 상급이라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불행이라는 댓가가 뒤따라 왔습니다.
“지옥은 격분하는 여인만큼 맹렬하지는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격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녀를 사로 잡고 있었던 정욕에 대한 좌절은 증오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결국 요셉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념과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억울함을 백배나 갚아 주십니다.
요셉은 감옥에 갔지만 하나님은 더 놀라운 것으로 보답해 주셨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가지 않았으면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다면 염려하지 마세요.
그것으로 인하여 받은 손해는 하나님께서 열배, 백배의 결실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만들어 낸 어떤 악조건도 뚫으시며 어떤 나쁜 상황도 선한 것으로 변화 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모든 것을 지배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귀한 그릇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도록 하세요.
이것은 나의 노력과 결심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요셉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시고 성령의 도움을 청하세요.
하나님과 동행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요셉과 같은 사람이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요셉과 같은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성문화는 아주 어렵습니다.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순결을 지키기 어려운 세대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의 자녀가 마음과 몸이 순결하게 주님 안에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문화가 타락한 이 미국 땅에서 순결을 지키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혹시 내가 이미 넘어졌다면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며 회개하십시요.
사람에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용서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시지만 혹시 범죄했더라도 이것은 영영 용서합을 수 없는 죄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고 말씀 하셨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의 몸과 나의 자녀와 우리 가정이 유혹 많은 세상 속에서 승리하게 되시리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2-24)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오전 11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