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살아나는 양심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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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살아나는 양심의 소리
본문: 창세기 42장 18-25절
설교: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어떤 사람이 주차장에 나와 보니 주차에 놓은 자기 자동차 뒷쪽 범퍼가 부수어져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화가 나서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짓을 했지?’하면서 씩씩거리며 보니까 유리창에 메모 하나가 꽂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양심이 있는 사람이구나. 이름과 전화 번호를 남겨 놓은 모양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안도하면서 메모를 펴서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미안합니다. 당신 차를 부수어 놓아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켜 보고 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내 전화 번호와 이름을 적고 있는 줄로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천만에! 하하하! 그럼 이만 …’
어떻습니까?
참으로 탁월하고 지혜있는 사람입니까?
오늘날은 기술적으로 남을 속이는 사람들이 성공하고 잘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주간에 저의 처를 일하는 가게까지 ride 해주었는데 같이 일하는 히스패니 여자가 오자마자 바로 앞의 K-Mart에서 어떤 흑인이 물건을 훔치다가 걸려서 경찰이 왔다고 다들 crazy라고 말합니다.
지난 주간에 홍장로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흑인들은 물건을 훔치지만 한국 사람들은 물건의 겉은 그냥 놔두고 안의 내용을 바꿔치기 합니다. 이런 것은 미국 사람들은 도저히 생각지도 못하는 일입니다”
오늘날은 양심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죄를 짓고도 그것이 죄인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의적으로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짓는 방법도 탁월하고 속이는 방법도 탁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묘하게 죄를 짓는 사람이라도 속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양심의 눈’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저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내 마음 속에는 양심의 별들이 빛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죄를 지으면 반사적으로 양심이 작용하여 나를 움찔하게 만듭니다.
남이 보지 않는데서는 남을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의 양심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요셉의 형들의 양심이 깨어나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전적으로 회개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완전히 깨어지지는 않았지만 마비된 양심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22년 전에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동생을 죽이려고 하다가 무자비하게 노예로 팔아 버린 무자비한 형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양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자기들의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자 이 모든 것이 자기들이 아우에게 범죄해서 이 일이 우리에게 임했다고 자기들의 죄를 인정합니다.
그들은 인신매매단이고 무자비한 악마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얼어붙은 그들의 양심에 하나님의 은혜의 태양열이 내려 쬐어 조금씩 녹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저절로 양심이 살아 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양심이 회복되기 위해 중요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의 성경 말씀을 통해 이 사실을 살펴 보면서 혹시 우리 가운데서도 나의 양심이 점점 마비되어 가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나는 축복이 넘치시기를 소원합니다.
첫째로, 우리의 양심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기근과 흉년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이고 저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거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들어 있습니다.
이 흉년 때문에 가나안에 있는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찾아옵니다.
그들이 애굽에 와서 요셉에게 절하므로 요셉의 꿈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이 여기서 겪는 어려움 때문에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21-22절,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값을 내게 되었도다”
28절 끝부분에도,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이것은 지금 형들의 영혼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형들의 마음 속에 묻혀 있던 양심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양심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양심이 잠들 수는 있습니다. 화인 맞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양심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의 형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죄를 깨달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까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어려운 환경을 만들게 하고 깨닫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양심이 조금씩 회복됩니다.
우리는 무너진 영혼의 세계가 다시 세워지고, 잠자던 양심의 소리가 다시 들려질 때에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있습니다.
지금 이들은 보이지 않는 어떤 징계의 손이 그들 위에 임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너진 양심이 다시 세워질 때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거기에서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손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형들의 양심이 깨어나고 있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의 역사를 깨달으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내 죄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내가 죄인이라는 것도 깨닫습니다.
아무리 내가 내 자신을 살펴 보세요.
아무리 살펴 보아도 내가 죄인 처럼 보입니까?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더 착하고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도 형편없고 나쁜 짓 많이 하는 아무개와 똑같습니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나의 죄를 구속해 주시는 우리 구원자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내가 이 땅에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증한 사람들입니다.
연약하고 무능한 인간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시고 혹시 나의 양심이 마비되었으면 회복하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소원합니다.
둘째로, 형들의 양심이 회복되는데는 요셉의 지혜로운 태도 때문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만나서 대하는 모습은 무척 거칩니다.
22년만에 만난 형들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요셉은 형들을 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부러 그들을 정탐군으로 몰면서 거칠게 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그의 형들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그 형제들을 마음 속에 용서한 지는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형들을 정탐군으로 몰고 감옥에 가는 것은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셉은 단번에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졀정적인 때를 기다리는 지혜를 보여줍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그는 오랜 세월을 인내했습니다.
인내 함으로 해결한 것입니다.
어떤 문제도 인내하지 않고는 해결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의사는 강의를 하면서 “의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의사는 환자가 잘 참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치료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의사가 치료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은 의사의 역할이 하나님이 치료할 수 있도록 환자가 그 상황을 잘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의사가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어로 ‘환자’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patient
patient의 뜻이 무엇입니까? “참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Be patient’하면, ‘참으세요’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많이 참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때에 그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지혜롭게 그 문제를 처리합니다.
요셉은 형들을 만났을 때 분노의 차원으로도, 복수의 차원에서도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복수하고픈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상처를 받았든지 간에 복수의 심정으로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복수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수 갚는 일을 우리에게 위임하신 적이 없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내가 원수를 갚으면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가 대신 하는 월권행위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억울한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롬 12:19)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 대신 갚아 주십니다.
요셉은 자기를 무자비하게 대한 형들이지만 전혀 복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17절, “그들을 다 함께 삼일을 가두었더라”
옛날에는 누가 갇혔습니까? 요셉이 갇혔습니다.
이제 모든 상황이 역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셉의 복수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기의 형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고 모든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가를 알기 원하는 그의 관심과 애정에서부터 이런 계획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복수가 아니라 이 문제를 하나님의 방식으로 풀어 나갑니다.
18-20절, “삼일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너희가 독실한 자이면 너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라리라 그들이 그 대로 하니라”
요셉은 형제들에게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실마리가 무엇입니까? 자기도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너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겁낼 것 없다. 나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것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마세요.
분노의 차원으로도 접근하지 마세요.
내가 누구에게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차라리 그를 만나지 마세요. 말을 하지 마세요.
분노를 통제할 수 없으면 아직은 해결의 때가 아닙니다.
좀 더 기다리세요.
다스려지지 않는 분노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말은 그 어떤 말도 유익하지 않고 문제도 해결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분노를 철저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약 1:20)
성질내서 해결될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내 속에 아직 분노가 들꿇고 있다면 차라리 가만히 계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 분노가 해결 될 때까지 기다리세요.
분노가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요셉이 이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얼마나 오래 기다린 줄 아십니까?
22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형들을 만났을 때도 자기 신분을 노출 시키지 않고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형들을 삼일동안 감옥에 가두었다가 다시 풀어 주고, 집에 돌려 보냈다가 치밀한 계획 아래 다시 애굽에 오게 합니다.
아주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준비한 것입니다.
그는 감정적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감정은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요셉은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어느 누구와도 싸우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과 경쟁하고 자신과 싸워 이깁니다.
자신의 분노를 정복하고 자신의 좌절을 정복했고 자신의 외로움을 정복했습니다.
자신의 나태와 안일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넓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에게 대하여 ‘마음에 안 든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 사람 마음에 안 들어!”
그런데 ‘그 사람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은 누구 마음에 안 든다는 것입니까?
‘내 마음에 안든다’는 말입니다.
‘내 마음에 안든다’는 말은 ‘내 마음에 안 들어 온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이 문제입니다.
왜 사람들이 내 마음에 안 들어 옵니까? 내 마음이 작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작아서 그 사람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결국 ‘내 마음에 안든다’는 말은 ‘내 마음이 좁다’라는 말입니다.
내 마음이 좁아서 그 사람이 들어 올 수 있는 공간이 없을 뿐이지 내 마음이 그 사람을 수용할만큼 크기만 한다면 그 사람을 얼마든지 내 마음에 담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엄하게 대하고 있지만 이미 사랑과 용서로 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4절, “요셉이 그들을 떠나 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 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
요셉이 철저하게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는 모습을 보세요.
인간적인 정이나 눈물은 사람들의 마음만 약하게 만들 뿐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감정을 절제하여 결국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모습을 회복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끼리는 눈물 흘리고 기뻐했는데 하나님께는 등을 돌리고 돌아가 버린다면 그 눈물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 기쁨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요셉은 웁니다.
요셉은 눈물이 있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우는 장면이 성경에 계속 나옵니다.
요셉은 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드러낼 때 흘린 눈물만 해도 이렇게 많은데 그가 종살이 하면서 감옥에서 죄수들을 섬기면서 남 모르게 흘린 눈물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을 귀히 여기십니다.
자신과 남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귀히 여깁니다.
눈물을 귀합니다. 눈물은 우리를 치료해 줍니다.
우리의 영혼의 눈을 맑게 해 줍니다.
눈물은 우리를 치료해 줍니다.
내가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눈물을 흘리지만 하늘나라에 입성하는 그 순간에 주님께서 제일 먼저 해 주시는 일은 내 눈에서 흘린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요셉의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사랑과 용서의 넓은 마음을 가지시고 서로의 속에 있는 마비된 양심이 다시 살아나서 회복되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소원합니다.
세째로, 마비된 양심은 회개를 통해 회복됩니다.
21-22절,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값을 내게 되었도다”
이제 그들의 마음이 성령의 역사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고난의 의미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스로 말합니다.
“우리 아우의 일로 범죄하여 우리가 이런일을 당하는구나”
동생을 팔아 먹은 것이 죄라는 것을 이제야 비로서 인정합니다.
지금 이들이 당하는 사건과 그 당시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처할수록 자신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면의 숨은 죄가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런 일이 많습니다.
자꾸 어려움이 오고 고통이 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진땀 나는 일들이 계속 생깁니다.
하나의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이 정도면 됐습니다’라고 말하는 데 또 생깁니다. 산 너머 산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숨어 있는 죄가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과의 차이입니다.
요셉의 형들을 보세요.
자꾸만 계속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22년 전의 죄를 떠올리는 계기가 됩니다.
만약 그들에게 고난이 없었다면 요셉 사건은 절대로 끄집어 내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요셉 사건을 잊지 않고는 있었지만, 이 사건이 없었다면 그들은 자신의 죄를 고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들이 요셉에게 행한 것을 범죄라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를 고백하는 것이 복의 시작입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심판의 시작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고난을 겪으면서 오래 전에 동생에게 저지른 잘못을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면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어떤 일들을 잊어 버리거나 무시하거나 적당하게 넘기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일들을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 갑니다.
나의 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 한이 모두 깨어 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이 강줄기를 타고 물 흐르듯 흘러 넘칩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복이 흘러 넘쳐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은 현재 자신들이 받는 고통이 과거 요셉이 당한 고통의 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고통의 의미를 스스로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에게도 이런 일은 없습니까?
“왜 일이 잘 안풀리까?” “왜 나는 하는 일마다 막힐까?”하는 의문이 든다면 빨리 영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혹시 하나님 앞에 숨기고 있는 죄는 없습니까?
나는 잊어 버리고 있지만 과거에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준 일은 없습니까?
사람들은 남에게 준 고통이나 상처를 잘 잊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은 사람은 잘 기억합니다.
그 때의 상황을 자세히 기억합니다.
이것이 상처를 주는 사람과 상처를 받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받은 상처만 기억합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모욕하고 상처를 준 일들이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한 사람에게는 인생 속에 큰 아픔으로 남아 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남에게 해를 끼칠 때에 그것이 얼마나 남에게 피해를 주고 남을 아프게 하는지 잘 모릅니다.
말을 함부로 하고 행동을 막 하면서도 그것이 남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그와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대우를 받아 보면 그제서야 깨닫게 됩니다.
자녀를 키울 때 딸들이 엄마 말을 안 듣고 속을 썩이면 “너도 엄마가 되어 너와 똑같은 딸 키워 봐! 그러면 내 마음 알지!”하고 소리 칩니다.
그러나 사실 그 때 나 자신이 나의 부모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가 부모가 되어 자식에게 똑같은 대우를 받아 보면 내가 부모님께 얼마나 불효했는지를 압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내가 전혀 기억하지도 못하는 나의 잘못과 죄악을 똑같은 상황으로 재현시킴으로써 그것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양심이라는 영혼의 소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양심이 가슴을 찌를 때에 잊었던 죄를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합니다.
내가 지금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나에게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만 합니다.
그래야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죄는 내가 숨기려고 한다고해서 숨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잊을려고 한다고 해서 잊어 지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죄는 우리를 정녕 찾아냅니다.
죄를 잊는 방법이 있다면 회개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한국에서 어느 룸살롱에 나가는 여인이 음독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떤 청년이 그 여자를 좋아하다가 청혼을 했습니다.
그 여자는 나는 몸이 더러워서 당신과 결혼할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청년은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끈질기게 구애하자 몇번을 거절한 이 여자는 그 남자의 정성과 사랑에 감동되어 청혼을 받아 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의 아버지를 만나기로 하고 드디어 만났습니다.
그 여자가 아버지를 만나 그 아버지를 바라보는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뛰쳐 나와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여자는 그동안 남자 친구의 아버지와 많은 관계를 가져 왔던 것입니다.
이 오십대의 사장은 아무도 내 사정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은밀히 이 여자와 불륜의 관계를 즐겨 왔습니다.
그 여자가 며누리가 될 려고 할 줄을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숨겨 보았습니다.
그러나 숨길 수가 없었고 이 사람의 죄는 천하에 공공연하게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죄는 나를 쫓아 다닙니다.
그러나 이 죄로 부터 해방 받는 유일한 길은 우리 예수님 앞에 나아가 내 죄를 내 놓고 자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복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나의 모든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어떠한 죄라도 자복하기만 하면 다 용서하십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다 자복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지만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를 짓고 다윗은 침상을 눈물로 적히면서 통회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32:1)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허물의 사함을 얻고 죄의 가리움을 받는 사람입니다.
돈이 많고 건강해서 복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 죄를 고해서 하나님께서로 부터 용서함 받은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나의 양심이 죄로 인해 마비되지는 않았습니까?
나의 양심이 살아나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르우벤은 자기들이 요셉에게 행한 죄 때문에 피값을 치룬다고 했는데 진짜 피 값을 치른 분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면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께 나와서 나의 죄를 내어 놓기만 하면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구원해 주십니다.
이 주님 앞에 머리 숙여 그 주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에 있는 죄를 다 고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1:9)
“하나님의 자녀들이 매일 아침 눈물로 얼굴을 씻는 것보다 더 아름답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주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고 죄에 대해 무감각해진 우리의 양심도 회복 받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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