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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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본문: 창세기 50장 15-21절
설교: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한국의 정치는 재미있으면서도 비극적이고 한마디로 웃기면서도 요지경입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정권만 잡으면 과거 청산을 외쳤습니다.
5공화국 들어서자 유산의 부정부패를 없애고 정의 사회 구현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더 부패했습니다.
6공화국에 들어서자 5공화국을 청산하기 위해 친구인 전직 대통령을 절로 귀향 보냈습니다.
문민 정부가 들어서는 군사독재 정치와 문화를 청산하려고 하나회를 척결하고 두명의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습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는 전 정권의 치적을 폄하하며 청산 하였습니다.
참여 정부에 들어서서는 전정권의 실세들을 단죄하여 감옥에 보내고 부를 가진 자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려고 난리입니다.
한국에서 항상 과거 청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청산을 외치지만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 청산이라는 올무에 발목이 잡혀서 끝없이 과거만 청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는 청산하지 못하고 과거에 매야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새로운 미래를 행해 나아가야 하는데 새 정부만 들어서면 과거를 청산하는라 아까운 시간을 다 보냅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그 과거를 청산하느라고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의 말씀은 과거에 매여 있는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버지 야곱의 화려한 장례식을 마치고 야곱의 모든 아들들이 애굽으로 돌아 옵니다.
대개 장례식을 치르고 나면 허탈합니다.
장례식을 치를 동안에는 사람들도 많이 오고 정신과 경향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장례식이 끝나고 나면 그 때부터 진짜 슬픔이 밀려 옵니다.
죽은 사람의 유물과 흔적만 남아 있고 남은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낍니다.
장례식 동안에는 모든것이 꿈 꾸는 것 같았는데 장례식이 끝나고 나면 그 때는 현실로 돌아 옵니다.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자 정신이 들기 시작합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은 기근에 애굽에 와서 생명을 유지하며 총리 동생의 덕택에 잘 살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자 모든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자신의 보호막도 사라졌습니다.
요셉이 효자니까 아버지 살아 생전에는 자기들에게 복수하지 않았는데 이제 아버지가 돌아 가셨으니까 자기들에게 복수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동생 요셉을 찾아가서 잘못을 빕니다.
얼마나 어쩌구니 없는 사건입니까?
형들이 요셉을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요셉이 복수나 할 그런 사람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심정을 모릅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면서까지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도 그 심정을 모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살펴 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 보는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과거의 죄에 매여 있다면 우선적으로 해결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언제나 불안에 떨면서 삽니다.
15절,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형들도 자기들이 요셉에게 행한 것이 악이라는 것을 압니다.
형제들의 머리 속에 나아 있는 죄책감과 두려움과 피해 의식을 보세요.
‘갚았다’는 것도 아니고 ‘갚지나 아니할까’하며 형들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불안은 불확실한 것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그런 일이 생길 것을 미리 염려합니다.
조금만 아파도 “혹시 내가 암에 걸린 것은 아닐까?” “내가 망하지나 않을까?”
“우리 자식도 다치지나 않을까?”
믿음이 없으면 불안해 지기 시작합니다.
미래는 아무도 가 보지 않은 세계입니다.
누구든지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내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나의 미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미래로 삼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나의 미래는 찬란하고 황홀한 세계입니다.
미래가 결코 불안하지 않습니다.
미래로 가면 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가슴을 느끼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용서를 믿지 못하고 살아 온 인생들입니다.
그들의 심층에 깔린 죄의식이 마지막까지 그들을 괴롭힙니다.
요셉은 한 번도 형들에게 미움을 표현한 적이 없는데도 과거 자신들이 한 일로 인해 형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미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모든 원한을 하나님 앞에서 다 청산했습니다.
그러나 형들에게는 청산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과거의 죄가 전혀 해결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사람의 과거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잠재의식 속에 다 남아 있습니다.
의식적으로는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감정이나 마음의 상처를 통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의식하지 못하는데 감정이 먼저 불안해져 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한 사람은 언제나 불안에 시달리게 마련입니다.
악을 행한 사람은 편안하게 살 수 없습니다.
자신이 행한 악을 해결하지 않고는 평생 그 불안감 때문에 잘 살 수 없습니다.
악은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에 불안감을 주고 초조감을 주고 긴장감을 일으켜 사람들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듭니다.
사람들의 관계를 보세요.
미묘하지 않습니까?
잘못하면 처음에는 미안한 감을 갖고 있다가 조금 지나면 오히려 상대방을 공격합니다.
이 때는 미안한 마음도 다 사라집니다.
오히려 자기가 잘못하고도 일방적으로 당한 상대방을 더 미워하고 공격합니다.
이것이 죄악된 인간의 품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지은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그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인간에게 죄책이라는 것은 얼마나 끈질기게 따라 다니며 괴롭히는 지 모릅니다.
죄책이 한번 인간의 양심을 약탈하기 시작하면 인간은 쉽게 이 죄책에서 해방되지 못합니다
성경이 용서한다고 선언하고, 하나님이 용서했다고 말씀하시만, 설교자가 용서되었다고 선언하지만 인간은 자기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악을 지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용서가 필요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용서의 확신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용서 받지 못한 사람은 고통 중에 살아 갑니다.
죄에 매여 있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언제나 불안에 떨면서 살아갑니다.
악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반드시 용서가 필요합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용서 받지 못하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상처가 치료되지 않으면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요셉은 그동안 형들과 그 자식들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필요를 다 채워주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그런 사랑을 받으면서도 늘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 하며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왔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항상 과거만 있습니다.
과거가 청산되지 못하니까 이 풍성한 생활 가운데서도 형들은 풍성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과거와 인연을 끊으시기 바랍니다. 과거가 나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세요.
기억하기 싫은 과거, 수치스러운 과거 나를 꼼짝할 수 없게 하는 과거를 모두 잊으세요.
이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를 고백했다면 더 이상 이것에 매달려 있지 마세요.
똑 같은 죄를 고백하고 또 고백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아들이 잘못을 하고 나서 아버지에게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말합니다. “아들아, 내가 다 용서하마!”
그런데 일주일 쯤 지나서 또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용서 해 주세요”
아버지가 반문합니다. “지난번에 다 용서하지 않았느냐?”
어떤 사람이 자꾸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지난 번에 지은 죄를 용서 해 주세요”
하나님이 그에게 묻습니다.
“무슨 죄를 말이냐?” “하나님이 지난 번에 제가 지은 죄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왜 너는 자꾸 나로 하여금 그것을 기억하게 만드느냐? 나는 잊어 버려서 기억도 나지 않는데!”
하나님은 이미 잊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복하면 그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옮기시고 깊은 바다에 빠뜨린 것 같이 다 없애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다 잊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잊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완전히 용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신앙 생활이 앞을 향해서 전진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돕니다.
자꾸 남의 과거를 캐고 돌아 다니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의 과거를 뒤져 그 사람의 약점을 잡아서 그를 망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과거와 결별해야 합니다.
과거가 나의 미래를 만들지 않습니다.
나의 미래는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요셉의 형들은 살아 남기 위해 머리를 써서 또 거짓말을 만들어 냅니다.
그들은 아버지 야곱을 닮아서 머리를 쓰고 말을 만들어 내는 데는 천재적입니다.
16-18절,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데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 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 형들이 또 친히 와 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
요셉이 형들을 그토록 환대하고 사랑해도 형들은 요셉을 밎지 못합니다.
얼마나 불안해 합니까?
요셉의 형제들이 그에게 엎드려서 종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용서를 잘 받아 들이지 못합니다.
또 자기 수준으로 모든 사람을 바라 봅니다.
사람은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하는대로 봅니다.
선입감을 가지고 봅니다.
경험이라는 안경을 쓰고 사물과 사건을 바라봅니다.
자신이 이해한 만큼 다른 사람을 이해 합니다.
망치를 잘 쓰는 사람은 모든 물건을 못처럼 보려고 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자신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들의 수준으로 요셉을 보고 있습니다.
형들이 말하는 표현을 보세요. “당신의 아버지가”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을 보아서 용서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하나님을 보아서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아직도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을 근거로 해서 보호를 받아 보려고 합니다.
야곱을 통해서 요셉의 용서를 얻으려고 합니다.
동생에게 용서를 받는 것이 얼마나 다급하고 절실했으면 아버지와 하나님을 상기시켰겠습니까?
얼마나 연약한 인간의 모습입니까?
형들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렇게까지 했겠습니까?
자신들의 죄가 용서 받지 못할 죄라는 것을 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용서 받지 못한 죄가 있으면 머리가 아프고 밤에 잠이 안 옵니다.
우울증에 걸립니다. 성격이 비뚤어 집니다.
남을 믿지 못하고 항상 불안해 합니다.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표현도 복잡합니다. 말을 비비 꼽니다.
용서 받지 못한 사람의 말은 그렇게 복잡합니다.
우리는 단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요셉의 형들의 모습이 오늘날 나의 모습은 아니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의 죄를 다 용서했는데도 나는 그 용서를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들이 요셉의 용서를 의심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를 의심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죄를 다 잊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것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완전히 용서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내 모든 죄는 다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 받았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그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나의 모든 죄는 다 용서 받았습니다.
아무 조건없이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내 반응과 내 믿음과 상관없이 그 분은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 해 주셨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불안해 하지 마세요.
기도하면서도 불안해 하지 마세요.
하나님 안에서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 받은 사람은 세상을 사는 것이 자유롭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셨다는 사실 앞에서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래도 형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용서받기 위해서 사람을 보내고 용서를 구합니다. 이것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잘못할 수 있습니다.
잘못을 하는 것은 인간의 모습이고 용서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용서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는 전혀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지은 죄만 용서를 구하는 것은 아주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자신이 미워하고 있는 사람만큼이나 불행한 사람입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마음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이나 미움을 받는 사람은 똑같은 괴로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렵고 자신이 자존심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더라도 용서를 받고 용서를 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입니다.
그래야만 자신도 그 사람으로 인해 빚어진 사건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내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살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에 용서해야 합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에게 용서해 달라는 말을 듣고 나고 울었습니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
불안해 하는 형들의 보며 요셉은 울었습니다.
요셉은 그의 형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음을 인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형들이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자신에 대해 거의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매우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 대하여 신뢰를 갖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습니까?
내가 불안해 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할때 우리 주님도 우십니다.
요셉만 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우십니다.
그런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용서를 믿지 못하고 스스로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 때문에 하나님은 괴로워 하십니다.
용서를 위해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했건만 십자가의 용서 앞으로 나오지 않는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가슴 아파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을 때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요?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댓가를 다 치르신 우리 예수님이 우십니다.
하나님은 신뢰할 만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믿음을 행사하여 말씀으로 그를 붙들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죄를 주님 앞에 고해 과거 청산 해서 용서함 받았더라면 더 이상 죄에 매여 있지 말고 기쁨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요셉은 용서의 사람입니다.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19-21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 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을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 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형제들을 오히려 따듯한 말로 위로하는 요셉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용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봅니다.
요셉은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요셉은 22년동안 그의 가슴에 복수와 원한을 키운 것이 아니라 사랑을 키워 왔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복수 대신 사랑과 용서와 축복을 베풀고 있습니다.
용서하되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이 깨끗하게 용서했습니다.
가슴 곳에 쓴뿌리 하나 남기지 않은 완전한 용서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기억력은 사람이 본능적으로 가진 기능 중에 가장 놀라운 것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될 때 그 일을 행한 사람에게 그대로 갚아 줍니다.
그러면 그는 자신이 지었던 죄를 기억해 냅니다.
지금은 요셉이 복수라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복수하기 좋은 철호의 기회입니까?
그러나 요셉은 지금 복수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지금 참으로 놀라운 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배후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진행되고 있는 사실을 보세요.
사실 원수가 보이지 않을 때에는 쉽게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때에는 쉽게 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칼을 들이대고 내 심장에 상처를 남긴 그 사람이 당장 내 눈 앞에 섰을 때에는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하면 복수를 자식들에게 대물림합니다.
액션 영화를 보세요.
옛날 중국 영화는 거의 다 아버지의 복수를 자식이 하는 것입니다.
자식의 생애는 전부 부모님의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전 일생을 겁니다.
아버지도 죽으면서 “아들아, 이 원수를 꼭 갚아다오!”라고 말하면서 죽고 자식도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복수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전 생애를 오로지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삽니다
자신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고통을 참으며 무술을 연마하고 목숨을 내걸고 원수를 갚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병이 생깁니다.
과거를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니까 병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런 병은 절대로 혼자 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까지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남이 망하는 것을 봐야 직성이 풀리고 남이 괴로워 하는 것을 보아야 얼굴에 미소가 떠오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용서해야 할 대상이 너무 많은 인생을 살아 가고 있습니다.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서로 상처를 입고 상처를 입히며 살아 갑니다.
서로를 찌르며 찔리고 이리 저리 부딪히면서 살아 갑니다.
부둥켜 안으면 따갑고 헤어지면 춥고 그래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헤어지지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줍니다.
날이 갈수록 가슴 속에 쌓이는 것은 남을 향한 원망과 미움 뿐입니다.
누구에게 원통하게 당한 부당한 처사, 억울하게 받은 오해와 모함, 회복할 수 없는 피해와 상처, 나에게 그런 일을 행한 모든 사람들을 향한 미움과 원한이 쌓입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경우 그들을 향해 분노의 이를 갈면서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을 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곪아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은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들을 모두 용서하라고.”
나에게 잘못했던 모든 사람들,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모든 사람들, 나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고 비수를 꽂은 모든 원수들을 깨끗이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남편일 수가 있습니다. 아내가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이 웬수야!”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함께 봉사하고 신앙 생활을 하는 교인들일 수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손해를 준 사람들이 모두 다 나의 원수입니다.
이들을 모두 용서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물론 쉽지가 않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용서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용서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하는 거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얼마든지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받음 사람입니다.
지옥에 가야 마땅한 내가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구원얻어 천국에 갑니다.
주님의 긍휼이 아니라면 이 자리에 설 수도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긍휼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긍휼의 반대는 저주나 심판입니다.
긍휼이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사람,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대상을 향하여 오히려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긍휼이 여겼기 때문에 나도 긍휼이 여겨야 합니다.
진노 받아 마땅한 우리를 사랑으로 대하신 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이 긍휼 때문에 구원 얻는 것입니다.
요셉의 말을 보세요.
19절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요셉은 형들에게 인간적인 위로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 지난 일인데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했습니다.
자기가 형들을 용서하고 하고 벌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요셉에게 잘못했지만 그들을 징계하고 벌할 분은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요셉이 그들을 벌한다면 요셉이 하나님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그들을 용서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일빈다.
요셉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기를 거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원수를 갚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원수를 갚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원수를 갚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는 악순환이 되풀이 됩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합니다.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하나님 노릇을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심지어는 그 사람에게 보복하는데 그러면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 놓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앉아 있겠다는 말과 똑 같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세요.
그것이 용서입니다.
용서는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지속적인 용서, 변함없는 용서가 참된 용서입니다.
“내가 너를 이번에 용서하면 세번째야. 다음번에는 없어!”라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참된 용서는 용서할 분만 아니라 책임을 지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 그렇게 용서를 베풀었습니다.
용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축복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용서하여 용서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째로, 하나님은 악으로 선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까지도 선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십니다.
20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무슨 말입니까? 이제까지 이루어졌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말입니다.
당신들이 너를 미워했고 노예로 팔아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사건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좋은 일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행한 일은 분명히 악한 일입니다.
자기 자신도 그 악한 일에 희생자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이 있는데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자기에게 악을 행해도 하나님은 그 악을 바꾸어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악까지도 선으로 바꾸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에게 닥치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실수를 해도 하나님은 실수를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수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형제들의 잘못이긴 하지만 그들이 요셉을 팔았기에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고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이 악을 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그 사실보다도 더 높고 더 큰 차원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참으로 신비한 차원에서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결과를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요셉은 그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서 형제들의 범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기억하세요.
내 실수나 잘못으로 혹은 남의 실수나 잘못으로 큰 어려움과 고통에 빠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악을 바꾸어 선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두 사람의 관계가 비틀거리고 왜곡될 때 잘잘못을 따지고 문제를 풀어가는 일에 시시비비를 가립니다.
그런데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그럴수가 있냐?”
“그 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 사람을 믿었던 것은 잘못이야!”
과거의 일을 다 들추어 내며 서로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이미 다 끝난 일입니다.
그런데도 다 끝난 것을 들추어 내면서 자기 가슴도 아프고 상대방의 눈을 찌르고 쑤셔대야 직성이 풀립니다.
상황은 벌써 다 끝났습니다.
하나님은 악으로 선을 이루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때부터 심판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보다 더 거룩해 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바꾸어 선을 이루셨는데도 이제 이것 가지고 잘잘못을 따지며 상대방을 심판합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섭리를 이끄시는 절대자 하나님이 이 일에 직접 간섭하셔서 잘 해결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의 고통과 억울함을 하나님 앞에 내려 놓은 것으로 나의 일이 다 끝났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일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께서 맡기고 그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내가 아무리 실수하고 잘못해도 그것을 바꾸어 결국 선을 이루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세상에서 악을 바꾸어 선을 이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고사성어 가운데 ‘전화 위복’이라는 말이 잇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면 전화위복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악은 항상 악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능력으로 악을 선으로 뒤집어 놓으십니다.
물론 그 악한 일을 한 사람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악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용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이 세상에 용서 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죄는 결코 용서 받을 수가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죄가 그를 찾아내 죄 때문에 망합니다.
그 사람의 죄는 그 사람의 문제이고 내가 할 일은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그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남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일만 생각하면 잠도 안 오고 마음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 사람이 내 일생 망치고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어떻게 용서를 합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이해 한다면 쉽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이루어집니다.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까지도 상처를 준 사건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되어 집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세요,
그러면 용서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나 실패를 통해서도 능히 위대한 일을 이루십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 갈 때 모든 꿈이 사라진다고 생각했을 지 모릅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댓가로 감옥에 갈 때 요셉의 꿈이 좌절된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인간의 생각보다 깊고 높았습니다.
요셉을 태운 고난의 수레는 그가 소원했던 꿈의 성취와 반대 방향으로 간 것이 아니라 점점 애굽의 궁중으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고난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과 지혜는 고난의 십자가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드러 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건을 만나든지 쉽게 판단하거나 결론을 내리지 마세요.
오히려 기대를 거세요.
다만 사건을 사건으로만 바라 보시고 사건에 대한 부정적인 해석을 갖지 마세요.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를 가지고 바라 보세요.
오히려 사건을 하나님의 안목에서 바라보는 지혜를 가지세요.
우리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이해 할 수 없는 사건들이 많이 잇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보다 높고 위대함을 깨닫게 됩니다.
요셉이 경험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높은 뜻이 이루시길 원하실 때 인간의 실수나 악함까지도 선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요셉의 형제들의 실수를 통해서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섭리라는 말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인간 역사 속에 한님이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 위대한 목적을 이루어 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우연이 없습니다.
다만 섭리만 있을 뿐입니다.
연약함도 섭리입니다.
바울은 육신의 건강을 위해 기도했지만 오히려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거절하시는 은혜속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고통스러운 사건도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우연히 전개된 것이 아닙니다.
고통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괜히 이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까지 당한 이 고통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허용하신다. 내가 좀 손해를 봤지만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이 일을 유익하게 만드실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 선하심으로 사람들을 대하며 여전히 악한 세상 속에서도 선을 베풀며 살아가는 것이 요셉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받아 들였던 요셉의 믿음이 요셉으로 하여금 그 형제들을 용서하는 삶을 살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 볼 때 그 모든 환경은 달라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세요.
그리고 악한 일을 당해도 실망하지 마세요.
악한 일을 당해도 선하신 하나님은 마침내 선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선하게 사람들을 대하고 살아야 합니다.
억울한 세상, 악한 세상, 고통 많은 세상, 상처 많은 세상 속에서도 화해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통해 사랑이 실천되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가 나타나는 간증을 하시면서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다 받고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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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939-8470
주일 예배: 오전 11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