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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화평케 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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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화평케 하는 자

본문 : 마태복음 5장 9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지금부터 약 600년 전 중세기 때 어느 수도원에 낯선 사람이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신부가 나가서 “누구를 무슨 일로 찾느냐?”고 묻습니다.

낯선 나그네는 조용히 고개를 들며 이렇게 말합니다.

“평화를 찾습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난 얼마 후에 미국과 구라파에서 여론 조사를 했습니다.

그 조사 중에서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질문에 압도적인 열망은 “평화"였습니다.

“평화를 찾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계속되는 인류의 소원입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지만 전쟁은 그칠 줄 모릅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세계 제 1,2차 대전으로 말미암아 수천만의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우리 민족도 전쟁이라면 몸서리 칩니다.

6.25 민족 동란이 일어나 이백만이 넘는 사람이 죽고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은 피바다와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전쟁이 없는 평화스러운 곳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전쟁을 막고자 국제 연맹을 만들고 국제연합을 조직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에게 전쟁은 그칠 줄 모릅니다.

어떤 학자의 말에 의하면 이 지구상에 인류가 존재한 이래 크고 작은 전쟁이 약 5만번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 가운데 전쟁이 없었던 해는 불과 몇 십년 뿐이라고 합니다.

가인이 아벨의 피를 흘리게 한 뒤부터 이 지구상에는 피흘리는 전쟁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이스라엘 전쟁,

이토록 세상은 평화를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은 늘어만 갑니다.


미국의 라디오 설교자 엘더스 벨드 목사님은 인류를 가리켜 “전쟁 포로 인생"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습니다.

“전쟁 포로 인생"    얼마나 비참한 인간의 모습일까요?

진정한 화평을 가져다 줄 수는 없을까요?

이런 전쟁포로 인생에서 해방시켜 줄 자는 없을까요?

전쟁으로 인한 절망과 어두움 속에 빠져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는 인류에게 한가닥 희망의 빛이 비쳐 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우리 주님의 음성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케 하는 자만이 전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만이 인류에게 진정한 평화와 소망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화평한 자들로 가득찰 때 이 지구상에서 전쟁을 종식되고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교회와 가정이 화평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을 때 그 교회와 가정은 평화스럽고 기쁜 곳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평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전쟁과 싸움이 종식되고 서로 도와 가며 사랑하는 평화스러운 분위기가 계속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화평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로 이 지구상에 가득차 있다면 세계에 평화가 유지될 텐데 왜 안된다는 말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화평이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화평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단순히 평화스럽고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것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가 이 ‘화평'이라는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무엇입니까? 

이 단어가 영어와 독일어 성경에는 ‘화평을 만드는 자'라고 번역되어 있고, 헬라어의 원래의 의미는 "갈라진 틈을 보수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벽이 두 쪽으로 갈라져서 이 쪽과 저 쪽 틈이 생겼습니다.

서로 분리 되었습니다.

이 분리되어 동떨어진 틈을 메꾸어 갑니다.

무엇으로 메꾸어 갑니까?

자기 자신으로 메꾸어 갑니다.  자기 희생 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갈라진 틈을 메꾸어 갑니다.

나 자신속에 뻥 뚫린 구멍을 메꾸어 갑니다.

가족과 가족 사이에 벌어진 사이를 메꾸어 갑니다.

진정하게 화평케 하는 자는 그저 기쁨을 주고 웃음을 선사하고 평안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갈라진 틈속에 집어 넣어 자기 자신을 짓밟고 뭉개어 벌어진 양쪽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시키며 자기가 손해 보고 모욕을 당하면서 양쪽을 연결시키고 화목을 줍니다.

그래서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시키지 않는 그저 말로만 화평을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까?

바로 우리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불화가 생기고 틈이 생겨 인간이 하나님께 갈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뭉개고 찢겨 피를 흘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그 갈라진 틈을 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자신을 뭉개어 죽으신 그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밟고서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죽음이 화평이고 예수님이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진정한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아무리 전쟁과 싸움이 종식되고 서로 도와 가며 사랑하더라도 진정한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진정한 화평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평화를 위한 인간의 모든 노력은 다 헛되고 무의미한 실패로 끝납니다.

예수님을 빼놓은 화평이란 그저 눈가림만 하는 타협이고 위장 휴전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진정한 화평은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까?

이룰 수 있습니다.

누가 이룰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진정한 화평이신 예수님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룰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룰 수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과 화목을 통하여 진정한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올바른 관계가 맺어질 때 화평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화평이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는 화평합니까?

욥은 욥기 22장 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하나님과 화목하면 복이 임합니다.

인간이 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평화는 아직도 진정한 평화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지 못하면 그 사람에게 참 행복과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이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합니까?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은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불신앙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상태를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속에 있다고 하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10절에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라고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며 죄 있는 곳에는 진노를 발하십니다.

그래서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인간과는 원수된 과계, 화목하지 못한 관계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하나님과 화평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하나님과 원수 진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원수된 관계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사단이 원수이고 그리스도의 피와 죄가 원수인 것처럼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는 사탄에 매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원수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원수된 관계는 깨어지고 이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영원히 교제하며 사는 관계로 변화됩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됩니까?    예수님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예수님 때문에 원수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이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하나님과 나 사이의 불화된 문제에 대한 해결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고 기쁜 소식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고 말하고 

로마서 5장 1절에서도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을 가져다 줍니다.


세계 2차 대전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는 전선에서 통신병이 중요한 연락사항을 명령받았는데 모든 통신 수단이 두절 되었습니다.

연락은 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끊어진 전선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끊어진 곳을 찾았는데 연결한 방법은 없고 시간이 극박합니다.

이 초박한 절대 절명의 상황속에서 통신병은 끊어진 양쪽의 전선을 자기의 양손으로 붙잡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마지막 메세지를 아군 지원부대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생명을 마쳤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 사이에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한손으로는 하나님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우리를 붙잡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소통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한분이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라" (딤전 2:5)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평화를 말할 수 있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역사속에 찾아 오시던 그 날밤 천사들의 노래 소리가 기억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입었을 때 우리의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평안을 얼마나 놀랍고 큰지요!

이 평안은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런 고백을 드렸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가 당신의 품에 돌아와 쉴 때까지는 결코 평안함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평안은 한 영혼이 죄 문제를 해결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모셔 들일 때 얻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이 땅위에 완전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사람, 거듭난 사람만이 진정한 화평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럴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맨 먼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바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평강이 있기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찬송이 있고 평화의 멧세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따라서 이 화평을 거듭난 자만이 이룰 수가 있습니다.


두번째로 이 화평은 우리 자신과의 화목을 통하여 이루어 집니다.

우리 자신과의 화목입니다.

우리 자신과의 화목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마음 속에 끊임없이 몰려 오는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악과의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면 이룰수록 우리 안에 있는 죄문제에 애하여 더욱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나의 생활 속에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죄를 떨쳐 버리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안타까워 합니다.

그 죄를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그 죄를 이기기 위해서 끊임없이 싸웁니다.

성결해 지고 거룩해 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야고보서 3장 17절은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경하고 다음에 화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도 “모든 사람으로부터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고 합니다.

거룩을 도외시한 화평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시여, 내 마음을 깨끗케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방금은 마시고 좀 더 있다가 깨끗케 하옵소서"

왜그렇습니까?  

지금 즐기고 재미있게 놀 것이 있는데 그것이 죄인 줄 알지만 그것을 끊어 버리기가 아깝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즐긴 후에 깨끗케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화평을 만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중 6번째 복으로 청결케 하는 복을 먼저 말씀하시고 7번째로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화평케 하는 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청결케 하고 자기 속에 있는 죄 문제를 해결하고 거룩해 지려고 애쓰는 사람만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요 14:27)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선물로 이 평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 사도도 빌립보서 4장 6절 이하에서 걱정하며 근심하며 염려하는 이들에게 부탁하기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지옥 같던 어두움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셔 들일 때 주님께서는 놀라운 주님께서는 놀라운 평안을 주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기쁨이 샘 솟듯이 올라옵니다.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이 죄와 싸워 이김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평화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이 화평은 이웃과의 화목을 통하여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자기 자신과 화목한 사람은 더 나아가 이웃과도 화목합니다.

마태복음 5장 23에서 24절에서 예수님은 제단에 제물을 바치려 할 때 형제와 풀지 못한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가르치십니다. 


저는 세상의 교회 모습을 볼 때마다 참 이상해집니다.

교회라는 곳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의 사랑이 교제를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수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원수까지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친히 사랑의 모범을 보이셔서 원수인 우리 죄인을 위해 자기 몸을 버려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출입하는 우리들에게는 “사랑" “화목"이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대한 표준과 대강령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은 가끔 사랑이라는 말로 얼러 부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하고 있다는 떠벌림 속에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미화시키고 합리화시키는 착각속에서 벗어나 냉철하게 자신을 돌이켜 보며 반성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사랑을 하고 있는가?

아니 우리에게 사랑이 있는 것인가? 

우리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현실과 위치를 볼 때 그렇지 못함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의 식구' ‘나의 친구' ‘우리의 교인' 밖에 몰라 왔습니다.

내가 상대하는 사람은 ‘나의 친구'이고 내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우리 식구' ‘우리 교인'일 뿐입니다.

나와 관계 있고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지내온 식구 외에는 이름은 고사하고 얼굴 조차도 모릅니다.

우리는 단지 “끼리끼리"이야기 하고 “끼리끼리" 어울려 다니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가득하다는 교회에 들어 온 새 사람은 낯선 이방인 상태로 남아 있다고 그대로 교회를 또 훌쩍 떠나 버립니다.  

왜 오늘날 교회에서 “좀 더 사랑하는 교회"라는 말이 나옵니까?

왜 교회에서 “가고 싶은 자 가게 하고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랑의 법칙인가요?” 라는 말이 나와야 합니까?


우리가 사랑을 말하지만 우리는 사랑보다는 다툼이 일어납니다.

우리 믿는 성도간에 서로 다툴 때 누가 제일 기뻐할까요?  원수 마귀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간에 사랑이 부족할 때 누가 제일 슬퍼할까요?  우리 주님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며 너를 위해 찔림을 당했건만 왜 너희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지 못하느냐?”

우리 주님은 탄식하십니다.


천로역정을 쓴 죤 번연은 때때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안하지 못한 관계를 볼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심정으로 가슴 아파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상하다 마귀와 더불어 대적해야 할 성도들이 자기끼리 싸우고 있다니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

싸워야 할 마귀와는 싸움을 피하고 성도들끼기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에 금이 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원수 마귀 밖에는 없습니다.

성도들간의 관계가 깨어질 때 우리 주님이 슬퍼하십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쫓겨난 예수님의 이야기를 알고 계시죠?

어떤 흑인이 다른 도시로 이사 갔습니다.

주일날이 되어 단정하게 옷을 입고 즐거운 마음으로 가까운 교회를 찾아 갔습니다.

교회에 들어 가려고 하니까 화려하고 예쁜 옷을 입은 안내 위원이 문을 가로 막고 “흑인은 들어 갈 수 없습니다. 흑인을 위한 다른 교회로 가시오"하면서 문 밖으로 내 몰았습니다.

시간도 늦었는데 막상 흑인을 위한 교회를 찾을 수 없어서 계단 끝에 쪼그리고 앉아서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피부색이 검다고 당하는 수모는 견딜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교회에서 검은 피부에 대한 차별 대우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서러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들먹거리며 울면서 기도하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툭툭 치는 것입니다.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돌아다 보니 흰옷을 입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이 흑인을 어루만지면서 “너도 쫓겨 났구나 나도 저 교회 안에서 쫓겨 났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부색이 흰사람들이 가장 아름다운 음성으로 훌륭한 예배당에서 웅장하고 거룩하게 예배를 드려도 예수님을 쫓아냈으니 어찌 참된 예배가 드려 질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모습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고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처럼 회칠한 무덤들입니다.

자기도 천국에 못 들어 갈 뿐아니라 천국 문앞에 서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을 못 들어 가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는 않습니까?

우리들끼리 즐기고 우리들끼리 속삭이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질감과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여 심지어는 거부감을 느껴 환멸을 가지고 교회를 떠나게 만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 그냥 건네는 인사 한마디가 아쉽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로부터 화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남들에게는 잘해 주는 자기 식구들에게는 못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 주고 인정도 많은데 자기의 며느리 에게만은 냉정한 시어머니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는 다 친절한데 자기 올케에게만은 딱딱한 시누이가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 나에게는 사사건건 나를 간섭하며 괴롭히는 시누이 한 분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시누이를 위해서 기도라하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일 주일 후 그 부인이 다시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 부인이 기도하면 할수록 더 관계가 악화된다고 고백합니다.

목사님이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부인이 대답하기를 하나님께 “시누이의 못된 마음을 고쳐 주세요'라고 기도를 했지만 전혀 변화가 없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런 기도는 정죄하는 기도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없으니까 축복하는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시누이의 마음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가서 나 자신이 변화되고 시누이에게 최고의 복이 이울어지도록 기도했더니 둘 사이에 정말 깊은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남을 미워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면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이 괴롭습니다.

더욱 우리 마음은 강팍해져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열리지 않아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 한국의 대기업인 범양 상선에서 회장과 사장이 서로 파벌을 조성하고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 싸우니 결국에는 회장은 자살하고 사장은 구속되었습니다.

그것도 교인 사이에 서로 싸우니 얼마나 주님이 슬퍼하시고 마귀가 기뻐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 자신이 깨어지기 전에는 절대로 상대방이 깨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변화되기 전에는 상대방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내가 부흥되지 않고는 교회가 부흥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이 먼저 깨어지고, 변화되고, 부흥되어야 그리스도 안에서 가정과 교회에 평화와 기쁨이 옵니다.

서로의  약점이나 문제점들을 감싸주고 고치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되기 보다는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고발자가 아니라 화해자입니다.

분열하기 보다는 일치자입니다. 

우리가 용서 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고 정죄하고 비판할 수 밖에 사람을 오히려 축복해 주고 기도해 줄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 크게 열려 한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복음을 통하여 누리는 축복의 비밀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향하여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복이 있으라 화평케 하는 저희여!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이 주어집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죄면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런 축복이 우리 모두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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