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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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본문 : 마태복음 5장 10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지난 8주동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들에 대하여 살펴 보았습니다.
이 복들은 마치 음악의 도레미파솔라시도의 팔음계가 신기한 조화를 이루어 행복의 멜로디를 연주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팔복에는 매우 뚜럿한 영적 놀리적 순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복은 두번째 복으로 이어지고 두번째 복은 세번째 복으로 이어져 마지막 여덟번째 복에 이릅니다.
오늘 8번째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8번째 복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복'은 7번째 복 “화평케 하는 자"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화평은 타협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화평케 하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불의와 타협을 거절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은 핍박을 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갈망하지만 이 평화는 악에 굴복하여 맹종하는 평화가 아니라 의에 근거한 청결한 평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복들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복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팔복을 자세히 보세요,
첫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 두번째 애통하는 자.
세번째,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여기에는 소위 우리가 말하는 행복의 조건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심령의 가난이나 애통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육적인 성향은 온유함보다 고집을 원하고 있습니다.
의보다 자기의 욕망을 더 추구합니다.
긍휼히 여기기 보다는 미음을 더 좋아하고
청결하기 보다는 부패를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평화보다는 다툼을, 핍박 받기 보다는 타협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 복들은 육에 속한 사람은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추구할 수 있는 행복입니다.
오늘 말씀도 보실까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어찌 핍박을 받는 사람이 복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이성과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참 힘든 말입니다.
더구나 의를 위하여 온전히 의로운 길을 따라가며 의를 행하는데 어찌 핍박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참 이치에 안 맞는 말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복들은 이치에 안 맞습니다.
세상의 눈을 가지고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복들은 이치에 안 맞는 모순덩어리 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 복들을 절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이 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용서함 받고 거듭나서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만 받을 수 있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그래서 이 복의 비밀을 아무에게나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가 이 팔복을 가장 좋아하며 마음에 새기고 다녔지만 그는 이 복의 참 비밀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 복의 비밀은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말려 주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영적인 귀와 마음이 열려 이 팔복의 오묘한 비밀을 들려 주심을 믿습니다.
이제 8번째 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의를 의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본문에서 교훈하는 핍박의 참된 의미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핍박이 아닌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무엇이 핍박이 아닙니까?
첫째로 우리의 잘못이나 실수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은 핍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핍박이 모두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일을 잘못 처리한 결과로 어려움이나 곤경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것은 핍박이 아닙니다. 그것은 처벌입니다.
핍박과 처벌이 어떻게 다릅니까?
핍박은 좋은 일을 한 것에 대하여 나쁜 사람에게 받는 것입니다,
의인이 악인으로 부터 받는 것입니다.
반면에 처벌은 나쁜 일을 한 것에 대하여 좋은 사람으로 부터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그릇된 행위에 대하여 처벌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핍박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사건 속에는 결코 하나님의 상급이 없습니다.
베드로 전서 2장 20절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죄가 있으면 당연히 맞아야죠. 잘못을 했으면 당연히 책망을 들어야죠.
죄를 짓고 잘못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싸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저의 어머니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청년이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 집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집행관이 그 청년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청년은 마지막으로 나의 어머니를 보고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의 어머니를 불러다가 그 청년을 만나게 했습니다.
이 청년은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웃집 닭이 알 낳는 것을 보고 그 달걀을 가져다가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저에게 “그 달걀이 어디서 낳냐?”고 한마디 물어 보시지 않고 그 달걀을 가지고 요리해 주어서 저는 그것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저는 그 달걀이 너무 맛있어서 계속해서 어머니에게 달걀을 갖다 주었고 어머니는 저에게 한마디의 꾸중도 없이 계속해서 요리를 해 주었습니다.
결국 너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이 하나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익숙해 졌고 나중에는 남의 생명에 까지 손을 대었습니다.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싸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잘못을 했으면 당연히 벌을 주어야죠.
자기의 죄나 실수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은 핍박이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 전서 4장 1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의 일을 간섭한다든지 죄를 범한다든지 하여 당하는 어려움은 핍박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성격적인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당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까다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접근하기 힘들고 가까스로 접근하였다 할지라도 윗맛이 씁쓸하게 끝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자연히 친구가 없어지고 다른 사람으로 부터 따돌림 당합니다.
마음이 좀 더 터놓고 “내가 잘못할 수 있겠지. 그래 내가 잘못했어!”라고 말할 수 있어야지,
“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네가 잘못했어!” “나는 항상 의롭고 철저한데 다른 사람들은 잘못 투성이야!”라고 말한다면 까다로운 사람이 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받는 어려움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핍박이 아니고 그 사람이 까다롭기 때문에 받는 어려움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은 나의 성격이 까다롭기 때문에 혹은 나의 실수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너무 광신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기 때문에 받는 어려움은 핍박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 열광적으로 믿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한 부인이 있습니다.
이 부인은 가정에서는 한 남편의 아내요, 여러 자녀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이 부인은 신앙 생활을 철저히 한다고 낮에는 심방 다니며 하루종일 나가서 지냅니다.
밤에는 철야기도 한다며 교회에 와서 밤새며 지냅니다. 그리고 틈만 있으면 기도원에 올라가 며칠씩 안 내려옵니다. 남편이 식사를 제대로 하는 지, 안 하는 지, 아이들이 밥을 먹는 지, 굶는지 남편의 와이셔츠가 준비 됐는지 안 됐는지, 아이들의 옷이 더러워져 아이들이 꽤 재지한 지.
가정 생활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앙 생활만 열심히 한다고 뛰어 다닙니다.
이렇게 생활하면 분명히 어려움을 당합니다.
우선 남편으로 부터 어려움을 당합니다.
아이들로부터 시달림 을 당합니다.
주위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이런 경우에 그 부인이 당하는 어려움은 핍박이 아닙니다.
그 부인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잘못된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받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전도의 길이 막힙니다.
제가 얼마 전에 전철을 타고 내려 오다가 30살쯤 든 청년이 그가 잘 아는 어떤 중년이 지난 부인을 만나서 서로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인이 청년에게 묻습니다.
“그래 요새 교회는 잘 나가고 있니?” “아뇨, 저는 바빠서 못 나가고 있어요"
“아버지는?” “아버지는 몇년 전부터 나가서 이제 집사가 됐어요"
“어머니는 여전 하시니?”
“예 어머니는 심방하신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가 계세요. 그래서 아버지 저녁 식사도 제대로 해 주지 못해 아버지가 짜증을 내세요. 제가 보기에도 별로 좋지 않던데요"
이것은 바른 신앙 생활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경 어느 곳을 찾아 보아도 광신을 칭찬한 곳은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 교회 차임벨 소리 때문에 교계와 사회간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저는 은은하게 들려오는 그 찬송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정말 아름다운 멜로디로서 저의 마음에 벅찬 감격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교회의 차임벨 소리 때문에 이웃 사람에게 괴로움을 두고 마을 동네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것은 핍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챠임벨과 복음 증거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물론 그것이 간접적으로 교회를 알리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 방황하다가 교회에서 들려 오는 종소리나 혹은 찬송 소리를 듣고 주님 앞으로 나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차임벨 소리가 사람들의 단잠을 방해하고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괴롭힌다면 그것은 복음을 막는 것이며 이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은 핍박이 아닙니다.
어떤 학생들은 교회에 나오는 것을 빙자하여 공부를 게을리 해서 성적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으로 부터 꾸중과 어려움을 당합니다.
이럴 때 이것은 주를 위한 핍박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핍박이 아닙니다.
그가 받는 어려움은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이 아니고 그의 잘못한 믿음과 신앙 생활 때문에 오는 어려움입니다.
신앙 생활을 핑계로 공부를 게을리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공부도 신앙 생활의 한부분이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열심히 믿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열심히 믿어야 하지만 믿음의 질이 떠뜰썩하고 요란해야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면서” (마 10:16)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된 신앙 생활의 태도로서 겪게 되는 어려움은 반드시 핍박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신앙 생활 태도 때문에 끝없는 고난을 자초할 수 있고 전혀 불필요한 어려움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핍박이 아닙니다.
세번째로, 어떤 이상이나 대외 명분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은 핍박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 대의나 이상을 위해서 사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올바른 정치 원리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칭찬할만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인 올바른 주장을 내세울 경우, 그 사람은 어려움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이 오늘 성경이 말하는 의를 위한 핍박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치관이나 정치 철학을 갖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기의 정치적인 소신과 신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적인 신념으로 인하여 당하는 어려움은 핍박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분들이 정치적인 신학이나 혹은 정치적인 소신에 근거하여 행동하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면 오늘 본문의 말씀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원리 때문에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를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 현실도 이 문제가 아주 날카롭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정의에 대한 문제는 야당 정치가들이나 재야 단체나 어떤 운동권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의의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과 민주화라는 어떤 대의명문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치가들이 의를 위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대의 명분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는 의가 아니라 민주화라는 대의 명분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에 어떤 정치 원리를 옹호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치 현실에 참여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현실의 부조리와 현 정치의 불의가 있다면 분연히 일어서야 합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인권을 유린하는 비민주적인 모든 처사들, 고문, 강제 연행, 구금, 언론 탄압, 학생들을 무조건 공산주의자로 몰아 매장시키는 처사들.
이 모든 불의에 대해 항거해야 합니다.
현정권이 잘못한 점이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인 항거가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의가 아닙니다.
저는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정치적인 항거를 ‘하라' ‘하지 말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 말씀의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이 복에 담겨져 있는 약속이 정치적인 어려움을 당하는 자에는 적용되지 않는 점을 여러분들에게 상기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이 정치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편을 택한다면 그 일을 계속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 이 복, 이 약속이, 여러분의 생활에서 실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원한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이 복과 이 약속은 의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만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의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일반적인 의의 개념과는 다릅니다.
일반적인 의는 사회적 정의를 가르칩니다.
선하고 고상하고 자기 희생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는 사회적 정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인 의도 아닙니다.
성경은 ‘선하고 고상하고 자기 희생적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11절을 잘 읽어 보실까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나를 위하여 핍박한다고 했습니다.
이 의는 곧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만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참 의입니다.
원컨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정치적 편견과 영적 원리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에서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란 주님을 위해서 받는 핍박을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다고 선포합니다, (고전 1:30)
예수 그리스도를 의로운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렘 23:5-6)
참된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입니다.
나와 주님과의 관계에서 드리고 내가 주를 믿고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서 주님을 믿기 때문에 받는 핍박이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핍박입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나의 삶이 변화되어 경건한 삶을 추구하다 보면 핍박을 받습니다.
직장에서 불의를 행할 수 없고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손해를 당합니다.
상사에게 뇌물을 줄 수 없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합니다.
술 담배를 하지 않기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 멸시를 받습니다.
이 핍박은 나의 실수나 잘못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아닙니다.
광신적인 신앙 태도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도 아닙니다.
이 핍박은 어떤 대의 명문이나 정치적인 편견 때문에 겪는 고생도 아닙니다.
이 핍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핍박입니다.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어두움이고 그리스도인은 빛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추면 그 어두움은 사라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 불의는 정체를 드러내고 없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불의를 다 쫓겨나야 하는데 그들은 그 불의를 쫓아 버리기가 아까워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합니다.
그리스도적인 삶을 수용할 수 없는 세상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 속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박해하며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사는 피를 흘린 박해의 역사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가 이것을 보여 줍니다.
가인에 의해 박해를 받아 죽었던 첫 순교자 아벨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시작됩니다.
모세는 애굽에서의 타협보다 광야의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다니엘은 궁중에서 부귀영화의 삶을 추구하기 보다는 차라리 사자의 굴에 던지움 받는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보디발의 집에서 쾌락을 누릴 수 있던 삶을 거부하고 옥중의 고난을 선택한 요셉의 생애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생애, 바울의 생애. 이 모든 분들의 삶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삶의 표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주님을 위하여 산다는 말이고 의를 의해서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주님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핍박은 교회 밖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온다는데 더 무서움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현실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잘 믿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헐뜯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낙심하게 만듭니다.
더 나아가 그들을 핍박합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가짜는 진짜를 핍박합니다.
진짜가 있으면 가짜는 언제나 진짜를 몰아 내거나 죽입니다.
가짜끼리 있어야 편하지, 진짜가 나타나면 자신들이 가짜라는 것이 들통나서 어떻게 해서라도 진짜를 없애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올바르게 살아 보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신앙을 어떻게 해서라도 떨어 뜨리려고 만듭니다.
그저 낙심하게 만듭니다. 교회에 대해 불평만 털어 넣습니다.
교인들과 제직자들의 잘못된 점만 꼬집고 불만만 떠뜨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으로 낙심하여 신앙의 회의를 갖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듭니다.
아주 무서운 핍박입니다.
나는 하나도 잘못한 일이 없고 핍박을 한 일이 없다고 말하지만은 한 영혼을 낙심하게 만들고 한 영혼을 타락하게 만드는 무서운 핍박입니다.
어떤 사람이 새로 신앙을 시작하면 그 사람이 신앙 생활을 잘하도록 왜 서로 격려하며 도와 주지 못할까요?
어떤 사람이 열심히 주를 섬기며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모습이 모이면 그 사람을 보면서 나도 그리스도를 따라 가려고 왜 애쓰지 못할까요?
예수 믿는데는 지나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열심되지 못해서 미안하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광신만 아니라면 우리는 할수 있는 한 열심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적당히 예수 믿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적당히 믿다 보니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어려움 한번 당해 보지 못하고 핍박 한 번 받지 못합니다.
항상 적당히 믿고 눈치 보면서 이쪽 저쪽 왔다 갔다 하면서 적당히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쫓는 한 무리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을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어떤 축복입니까? 천국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본문 말씀에 나타난 우리 주님이 주시겠다는 천국에 관하여는 두가지 차원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치하시며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의 현장 속에서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고난에 처한 것을 방관하지 않으시고 그 현장을 찾아 오십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브갓네살왕의 우상숭배를 강요 받았을 때 이를 거절하여 풀무불 속에 던지움을 받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 세 사람을 찾아 오셔서 불 속에서 같이 동행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혔지만 주님은 그 곳에서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 고난이 없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오히려 고난을 당할 것이나 그 고난 중에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육신의 질병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성도들이 그를 찾아가서 위로했습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은 “내가 확실히 아픕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픔을 당하는 고난을 당하고는 있찌만 그러나 이 아픔이 내게 있는 것보다 주님은 내게 더 가까이 와 계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 중에서 주님은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의 아픔을 보고 그대로 방관할 수 없습니다.
달려가서 고난을 함께 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이 말씀은 승리의 약속이며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서 죄와 저주와 지옥을 빼앗아 가는 대신에 십자가를 남기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영광된 십자가가 아닙니다.
고통과 저주와 멸시의 십자가가 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핍박의 가시밭길 속에서 우리의 인격을 단련시켜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삶을 약속합니다.
따라서 천국은 주님의 임재 곧 그와 함께 하심을 뜻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미래의 천국입니다.
오늘 본문의 성경 말씀은 천국의 놀라운 보상을 약속합니다.
성경은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급이 큽니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에게 약속하신 축복입니다.
고난의 사람인 바울은 예수 때문에 여러가지 어려움과 고난과 매를 맞고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아무리 우리가 고난을 당해도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으로부터 받을 영광을 생각하면 그 고난을 고난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합니다.
메시야의 왕국이 열리고 우리는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신천 신지의 잔치에 참여하여 상금을 받게 되는 사람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하고 짐승에게 경배하기를 거절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천국 왕국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배하는 사람들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극심한 박해와 고난을 당한 서머나 교회를 향해 성령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우리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의를 위하여 죽어 갔습니다.
그들은 채찍으로 몹시 맞아 몸의 내장까지 환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불태워졌고 사자의 밥이 되어 죽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시베리아의 불꽃'이라는 책을 보면 오늘날 소련의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어려움을 당합니다.
공산당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회유도 하고 공갈도 하고 협박도 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공산당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새빨갛게 달구어진 철판 위에 세웁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발바닥을 지글지글 연기를 내면서 다 타버립니다.
이것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앞에서 행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믿음을 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자 새빨갛게 달군 철봉으로 팔이나 배나 다를 푹 찌릅니다.
가슴이나 등에 새빨갛게 달군 철판을 댑니다.
뜨거운 바늘로 손톱과 살갗 사이를 찌릅니다.
최후에는 눈을 찌르고 귀를 잘라내고 머리털이 난 곳의 살같을 끊어 머리의 가죽을 벗깁니다.
그리고 최후의 혀를 뽑아 냅니다.
이것은 몇 천년 전의 사건이 아닙니다. 몇 백년 전의 사건도 아닙니다.
오늘날 소련에서 행하여 지고 있는 것입니다.
스탈린과 레닌 시대의 십년동안에 3만명의 그리스도인이 체포되어 그 중에 2만 8천명이 순교 당하고 2천명의 사람들을 하나님은 증인으로 살려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최후의 숨을 거둘 때까지의 주님께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에 분명히 서서 승리하여 하늘나라로 개선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마 그들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그 순간 주님이 뛰어나와 얼싸 않고 그의 상처를 어루 만지면서
“애야! 네가 나를 위해 고생했구나 이제 이 하늘나라에서 나와 함께 영원히 편히 쉬어라"하면서 그들 머리에 친히 면류관을 씌워 지고 그들 손을 이끌어 주님 옆 보좌에 앉혀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보다 앞서 간 신앙의 선배들은 이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어느 길입니까?
세상은 불의와 타협할 성도들을 환영할 채비를 차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는 의를 위하여 핍박 받고 있는 성도를 환영할 채비를 차리고 있습니다.
나는 어느 편에 속합니까?
예수 믿기 때문에 갖은 핍박과 모욕을 받으며 자녀들을 주 안에서 길러 내기 위해 눈물 흘리며 남모르는 수고와 어려움을 당할 때 어머니들이여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을 위해 천국의 상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상관의 불의에 동조하기 않기 때문에 10년, 20면 진급하지 못하고 한 책상에 머루러 있으면서 자기의 동료나 후배가 불의와 타협하며 계속 진급하는 것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서러움과 회의를 느끼는 아버지들이여! 낙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분을 향해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복이 있으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여! 천국이 너희 것이라"
우리들에게 약속된 이 축복이 우리의 삶에 충만하여 이 약속된 축복을 소유할 수 있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존 11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