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애통하는 자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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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애통하는 자의 복
본문 : 마태복음 5장 4절
설교 : 백의흠 목사 (엘림교회)
제가 학생들을 이끌고 여름 수련회를 갔습니다.
그 때 첫 개회 예배 때 학생들에게 부탁하면서 따라서 복창하게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그것은 “죽어야 한다. 우리는 죽어야만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죽는 사람만이 복이 있고 죽은 사람만이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죽고 내 속에 그리스도만이 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참 축복을 받는 인생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성경 말씀은 우리를 향해 말합니다.
“울자. 가슴을 치며 아주 아주 슬프게 울자!”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참 위로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그것도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면서 슬피 울어야 합니다.
참 이상한 말입니다.
어쩌면 어리석고 좀 모자라는 사람이 지껄이는 말 같습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웃으면 복이 와요!” 라는 TV프로가 있어도 “울으면 복이 와요"라는 프로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든 말이고 들어 볼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우는 자여 복이 있나니"
세상 사람들은 우는 것을 싫어 하고 일생동안 슬픔이 없이 지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돈과 쾌락 등으로 슬픔을 잊어 버리고 인생을 즐기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슬픔과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퍼 마시기도 하고 마약을 복용하기도 하며 향락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애통하면 위로가 있고 울어야 기쁨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이요” (눅 6:21)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문학가 괴테는 “눈물썩인 빵을 먹어 보지 않는 자는 인생을 논할 가치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유명한 설교가도 “눈물의 골짜기를지나지 않고는 낙원에 이룰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애통이 우리 신앙에 가져다 주는 축복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애통이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 줄까요?
운다고 해서 무조건 위로와 축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울어도 위로 받지 못하고 축복이 없는 애통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상에 무엇을 소유하기 원하는데 소유하지 못해서 좌절에서 오는 애통은 축복이 없습니다.
대학 입시에 낙방하고 슬퍼서 우는 애통에는 복이 없습니다.
운동 경기에 져서 슬퍼서 우는 애통에는 복이 없습니다.
몸이 아파서 우는 애통에는 복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슬픔을 당해서 우는 애통은 진정한 위로를 받기 힘듭니다.
지난 시간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영적으로 가난한 것이라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애통도 영적인 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해야 할 것을 애통하는 가치 있는 애통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애통이란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어떤 중요한 것이 없음을 인하여 아파하는 애통입니다.
우리 안에 없어야 할 것이 있음으로 아파하는 애통입니다.
우리 안에는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있어야 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음을 인하여 아파합니다.
반면에 없어야 할 죄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 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로 우리는 아파합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애통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울지 않을 것을 인하여 울고 있습니다.
반면에 울어야 할 것을 인하여 오히려 울지 않고 있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세대,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 세대와 같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울며 애통해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죄에 대한 애통입니다.
나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제 잘난 맛에 살아 갑니다.
자기가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성령께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만듭니다.
그 순간 자기의 형편없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꽤 괜찮고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허물 많고 죄악 투성이인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옷을 찢고 싶고, 마음을 찢고 싶고, 어느 먼 곳에 가서 숨고 싶은 자신의 비참함을 느끼며 울부짖습니다.
이것이 바로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이 애통은 세상적인 애통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고통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거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애통해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애통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죄와 허물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아파하며 괴로워 하면서 몸부림 치는 애통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아파하며 주께로 돌아 가기를 열망합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다윗은 아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애통입니다.
그런데 간혹 죄의 결과로부터 오는 두려움의 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랬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 때문에 두려워 합니다.그리고 그의 죄를 뉘우칩니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진정한 의미의 회개는 아파하면서 주님께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단순히 뉘우치며 죄가 가져오는 자기의 잘못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애통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참 복이 있는 애통은 이런 애통이 아닙니다.
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인은 자기 아우 아벨을 죽이고 그 죄의 결과를 생각하며 두려워서 떨었습니다.
“내 죄 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가인은 자기가 범한 죄의 결과로 인하여 그가 받을 형벌을 두려워해서 아파했습니다.
이런 애통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뉘우침입니까?
베드로의 애통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후 통곡하며 울던 것을 기억하고 계시죠?
바로 그런 애통입니다.
죄에 결과에 대해 자기가 받을 벌을 생각하며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죄 그 자체에 대해 애통하며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하여 괴로워서 애통하는 모습을 주님은 받으십니다.
바울을 보실까요?
바울이 하나님의 의에 부딪히자 불의하고 추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말합니다.
이사야가 성전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는 그 순간 그는 거룩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말하며 애통해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마다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애통은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구원이 우리의 삶속에 이루어 집니다.
그 애통은 복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애통은 어떤 죄인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자마자 끝나는 애통이 아닙니다.
이 애통은 계속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악과의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성령께서 우리 안의 죄문제에 대하여 더욱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인격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웃에 대한 애통입니다.
즉 이웃의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애통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하는 사람은 자신의 구원만으로 만좋하지 못합니다.
이웃의 영혼들을 위해 같이 애통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울부짖었습니다.
의인 50명에서 10명으로 줄이면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킬 수 없지 않습니까?”하고 떼를 쓰는 애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레미야는 범죄하여 멸망하여 가는 자기 동족을 위해 눈물의 호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바벨론으로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을 위하여 기도하되 “금식하여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자기 죄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자복하며 애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이웃의 죄를 인하여 애통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이웃의 영혼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몸부림치며 안타까워 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 1절에서 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물에 빠진 아이를 위해서는 안타까워하면서 멸망하는 영혼을 위해서는 왜 그렇지 못한가?”
예수님은 우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민족이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해 가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내가 지옥에 빠지는 한이 있어라고 그들을 구원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웃의 영혼들을 향한 이 불타는 열망과 애통을 보세요.
우리는 물에 빠진 아이를 볼 때 안타까워 하면서 발을 동동 구릅니다.
그런데 멸망하는 영혼들을 위해서는 왜 그렇게 못합니까?
만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바다에 빠져 들어 가는 것을 깨닫는다면 안타까워 우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땅에서 사랑하던 사람의 시체를 담고 집을 나서는 관을 볼 때 통곡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 때 눈물을 흘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고귀한 영혼이 주위에서 영원히 멸망해 가며 암흑과 절망의 어두움 속으로 영원히 빠져 버리게 되는 것을 보고, 알면서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싸늘하게 식어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연민의 정을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의 시체를 담고 가는 관을 따라가는 사람의 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이 지옥의 문을 향하여 걸어가는 수많은 죽은 영혼을 볼 때 고통은 느끼며 엉엉 울면서 복음을 전하고 싶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하고 있는 악한 세상으로 점점 변해 갑니다.
옛날의 소돔과 고모라와 같습니다.
요즘에 우리는 신문지상에서 끔찍한 사건들을 봅니다.
우리 주변에서 양심을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슬픔을 느낍니다. 고통을 느낍니다. 분노를 느낍니다.
탄식합니다.
더 나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의욕을 느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사형 선고를 받은 젊은 죄수가 형 집행 날이 되어서 끌려 나왔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형무소 소장과 검사가 동석한 자리에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사형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고 또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나는 감옥에 들어 와서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었습니다.
나의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용서 받은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감사합니다.
비록 내가 오늘 죽지만 나의 영혼을 주님께서 받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사실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나쁜 사람이 되기 전에 내 이웃에 교회 다닌다는 장로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그 장로님이 왜 나에게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지 지금까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 장로님이 나에게 예수 믿으라고 해서 그 때 내가 예수를 믿었더라면 이런 끔찍한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는 이렇게 젊어서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소리가 우리 주변에서 수없이 죽어가는 영혼들을 태연스럽게 쳐다 보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마치 가슴을 찌르는 비수와 같이 들리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마음은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애통의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감람산 위에 올라가셔서 멸망할 예루살렘 성을 굽어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죄 때문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 되어야 할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죽어야 할 많은 심령들을 생각하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면서 주님을 울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애통은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성도들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죄에 사로 잡히며, 상처를 받으며, 죄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는 영혼에 대한 아픔은 우리를 함께 울도록 만듭니다.
그런 사람을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너희여 너희에게 복이 있으라"
그러면 애통하는 사람이 받는 복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위로입니다.
어떤 위로입니까?
위로라는 단어는 대단히 흥미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곁에"라는 말과 “부르다”는 동사가 결합되었습니다.
그 뜻은 "곁에 부름을 받아서 누군가가 서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위와 똑같은 말이 성경에 있습니다.
그것은 ‘보혜사'입니다.
‘보혜사'는 ‘위로자'라는 말입니다.
보혜사가 누구입니까?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이 바로 우리 곁에 서서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곁에 서서 계신 것을 경험하십니까?
진정한 주님의 위로를 발견하십니까?
한 영혼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 죄에 대하여 아파할 때 바로 그 곳에 주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할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죄가 가져 온 고통으로 말미암아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을 때 주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 입니다.
그리고 위로의 메시지 입니다.
저는 세상 속에서 힘들고 눈물 날 일을 겪을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합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7:17)
우리가 천국에 입성하는 그 순간 주님께서는 우리를 맞으러 나오시면서 내 손을 붙잡고 내가 세상에 살면서 흘린 눈물,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한 고통, 예수님 때문에 말없이 흘린 눈물을 친히 닦아 주십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다 위로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내가 똑똑하고 권력을 누리고 돈이 많다고 하더라고 남 모르는 고통을 가지고 있고 그 고통과 괴로움으로 부터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 위로를 누가 합니까?
바로 우리 주님께서 해 주십니다.
이 위로는 세상 사람이 해 줄 수 없습니다.
주위 사람이 주는 위로는 잠시 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만 진정한 위로를 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그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했습니다.
“애통한다"라는 말을 쉬운 말로 바꾸면 “자신에 대해서 깨어지는 체험"입니다.
우리 안에 없어야 할 것은 없애고 우리 자신을 비우고 깨어질 때 그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사로 잡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 깨어지는 체험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지 않아서 깨어지지 않는 사람은 새롭게 대사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 지고 부패하여 오염된 것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애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회개와 구원을 가져 온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커다란 문제는 근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인하여 근심하고 근심해야 할 중대한 문제에는 근심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 문제로 고민해 보셨습니까?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고민해 보셨습니까?
안 하셨다면 지금부터라도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슬피 울며 애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참 위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엘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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