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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온유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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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온유한 자

본문 : 마태복음 5장 5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팔복을 읽다 보면 이 팔복 하나 하나마다 독립적으로 깊고 오묘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복들은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축복들 사이에는 명백한 논리적 관계가 있어 각 복은 다음의 복을 암시하며 다음의 복으로 연결됩니다.

팔복은 예수님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논리적 순서가 있습니다.

첫째 복은 둘째복으로 이어지고 둘째 복은 세째 복으로 연결됩니다.

첫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어 집니다.

이 복은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을 인식하기를 요구합니다.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기독교인이 되기 시작하지도 못했습니다.

이 복은 우리가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무력합니다.

우리의 신분이 무엇이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깨달을 때 우리의 심령은 가난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첫째복은 두번째 복으로 인도합니다.

두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입니다.

여기서는 우리의 죄성과 우리의 성품을 알게 됩니다.

우리 속에 거하는 죄 때문에 우리의 무력함을 알게 됩니다.

내가 최선이라고 여기는 생각과 행동까지도 죄가 있음을 봅니다.

내 속에 죄가 있음을 애통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입니까?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낼 수 있을까?”하면서 울부짖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웃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애타게 부르짖습니다.

이런 애통이 가져다 주는 축복은 세번째 온유한 복으로 이끕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산상보훈 중 세번째 축복입니다.​


이 말씀도 얼른 보기에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인류 역사는 언제나 힘이 지배하고 힘을 숭배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강한 자를 존경하고 약한 자를 멸시하는 것이 오늘날의 사람들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을 가지려고 무척이나 애를 씁니다.

권력의 힘, 돈의 힘, 폭력의 힘.

아마 세상 사람들의 생각대로 말한다고 한다면 “강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세계를 정복할 것임이요"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강한 자는 땅을 차지할 수 있어도 온유하고 착한 사람은 땅을 차지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갖고 있는 것까지 빼앗깁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수많은 청중들이 듣는 앞에서 그들에게 말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아마 많은 군중들이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웃기지 마라.

우리는 너무나 온유했기 때문에 우리의 땅을 로마인들에게 빼앗기기 않았는가?

온유를 가질 것이 아니라 힘을 길러야 한다"고.

아마 그들의 눈에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따르라"고 말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형편없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의 눈에도 겸손하고 온유하고 온유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가장 보잘 것 없고 매력없는 인간으로 보여질 지 모릅니다.

로마 군병들에 의해 뺌을 맞으며 얼굴에 침을 뺏기우며 갖은 욕설과 능욕을 받는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어리석고 불쌍한 모습입니다.

그런 능욕과 멸시를 받으실 예수님은 그래도 말합니다.

“온유하라.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사실 예수님은 온유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힘이 약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자기를 못박고 침을 뱉는 그 사람들을 혼내 줄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힘을 그렇게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고 그로 인하여 사람들이 구원 될 수만 있다면 그 십자가를 받아 들이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온유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가리켜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저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 전서 2장 23절 이하에서 말합니다.

“그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 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온유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온유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원래 “온유”라는 말의 뜻은 “짐승을 길들여서 주인이 하라고 하는대로 하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순하고, 부드럽고, 겸손하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됩니다.

우리는 어떤 때에 어떻게 이 온유함을 나타내야 합니까?​


여기에 대해 세가지 측면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번째, 하나님께 대하여 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이고 가장 큰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가장 큰 온유와 겸손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과 다윗의 모습에서 이러한 사실들을 발견합니다.

사울과 다윗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심한 책망을 듣습니다.

선지자가 사무엘은 사울을 꾸짖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더 나은데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으므로 왕 위에서 쫓겨 날 것입니다"

사울은 이런 책망을 듣고도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백성들 앞에서 자기의 체면만 생각합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다윗도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듣습니다.

“네가 살인과 간음죄를 범했으니 네 집에서 칼과 재앙이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다윗은 죄에 대한 책망을 들을 때 “선지자여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나이다"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끓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함을 받는 순간입니다.

그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위대해 지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가리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태도가 온유하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부딪칠 때 끝내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는 자는 교만한 자요 버리운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해 올 때 이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교만한 자요 버리운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해 올 때 이 도전을 받아 들이지 않아 우리 마음이 무감각한 상태로 그냥 있다면 불쌍한 자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 시켜 새롭게 할 수 없고 이 말씀이 위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할 수 없다면 저주 받은 자입니다.

참으로 온유한 심령은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심령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자기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방법에 따르는 사람입니다.​


죤 칼빈은 “말씀이 가는데 까지 가고 말씀이 멎는데서 멎으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를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바로와 싸울 때는 조금도 자신을 굽히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말씀에 순종하는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모세를 가르켜 세상의 모든 사람보다 가장 온유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마음 문을 여는 자, 그는 참으로 온유한 자입니다.

그런 심령은 마치 옥토와 같은 심령입니다.

말씀의 씨가 떨어져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이런 마음이 진리를 속히 깨닫습니다.​


마리아를 보세요,

마리아는 주님의 무릎 밑에서 항상 말씀 듣기를 좋아 했습니다.

이런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 녀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는 겸손을 보였습니다.

참된 온유와 겸손은 오직 말씀 앞에 갖는 바른 신앙과 즐거운 순종에서만 생겨지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을 보세요.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진리 수호를 위해 일사각오하고 그 심한 고문을 견디어 내고 순교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사람 앞에서는 강자였고 하나님 앞에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온유한 종이었습니다.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으며 주님께 순교의 길을 간 것입니다.​


말씀 앞에 겸손한 자, 말씀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자. 그는 참 온유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말씀을 받는 우리의 태도가 온유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나 자신에 대하여 온유해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이 가장 잘 나타내는 때가 어려움을 당할 때입니다.

이 때는 그 전에 그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던 모든 본성과 성품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안하는 사람이 없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려움 당할 때보다 더 그 사람의 인격과 본성을 파악하기 쉬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억울함 당할 때입니다.

‘어려움을 참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억울함을 참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남이 나를 욕할 때, 남이 나를 모함할 때, 참아내기가 함 힘듭니다.

이 때 변명합니다.  대구합니다. 같이 싸웁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때려 잡을려고 합니다.

진정한 온유함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모욕과 수치를 참아 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통제합니다.

분노와 복수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성도 중 지극히 작은 자가 하는 교훈과 훈계라도 받아 들입니다.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욱 더 높이 평가하게 됩니다.​


우리들에게 한가지 나쁜 습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죄인이라고 정죄하지만 다른 사람이 우리를 정죄하는 것을 싫어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정죄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정죄하는 편을 택합니다.

나 자신을 내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이 나를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나는 일을 잘 못한다. 못 생겼다"라고 말을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를 향해 “너는 일을 잘 못한다. 못 생겼다"라고 말하면 무척 싫어 합니다.

우리 인간의 단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아주 나쁜 습성입니다.

이것은 온유한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교만입니다.​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은 어떤 능욕과 수치라도 관용과 겸손과 인내로서 받아 들일 둘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온유한 것이 연약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온유한 것이 줏대가 없는 것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줏대가 없는 것은 어떠한 미풍 앞에서도 이리저리 쉽게 굽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온유는 화낼 만한 일을 당할 때에도 그 화를 부드럽게 참아 내는 것입니다.

악이나 해를 그대로 갚기보다는 차라리 기꺼이 참는 것을 뜻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다윗은 시편 37편에서 말합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령으로 즐리리로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이 말을 할 때 다윗은 고통스러운 환경 중에 있었습니다.

오해와 중상을 받고 있었으면 말할 수 없는 역경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말합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라 . 여호와를 기뻐하라.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지 말라"

다윗은 억울한 중에도 온유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온유한 인격과 태도에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불평하지 않습니다.

반항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고 참고 견딥니다.

억울한 삶속에서 나타나는 온유한 인격이 진정한 온유입니다.​


세번째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온유해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하여 온유한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는 온유하지 못한 경우를 많이 봅니다.

자기를 욕하고 미워하며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에게 온유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신앙이 좋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을 때는 양같이 온순한데 교회 밖에만 나가면 왜 그렇게 사나워지는 지요?

교회 안에서 인정 많고 사랑 많고 칭찬 듣는 믿음직한 권사님이 왜 집에 오면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가 되는 지요?

교회 안에만 있으면 그저 내가 천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만 나가면 달라 집니다.

신앙 좋다고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큰 약점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타인 중심입니다.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먼저 생각합니다.

자기의 권리가 아니라 남의 권리를 먼저 생각합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이익을 위해 자기가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다 거짓말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이웃을 향해서도 온유하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형제에게 온유하게 대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온유 해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먼저, 나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온유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대하는 것에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남이 나를 무시하고 조롱하고 욕할 때 같이 화를 내고 같이 욕을 하고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기는 싶습니다.

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사랑하기는 힘듭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온유하게 대합니다.

그러나 나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온유하게 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라고 말합니까?

그들의 주장을 꺽어 버리라고 합니까?

뭐라고 말합니까?

딤후데 후서 2장 24절에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게할지니"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우리는 거스리는 사람에게 오히려 온유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정치 역사를 볼 때마다 참 안타깝습니다.

모함과 질투의 역사입니다.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숙청시킨 역사입니다.

우리편 외에는 모두가 적이고 원수입니다.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좀 더 넓은 아량을 가졌더라면 오늘의 한국 현실이 지금과 같이 어둡지는 않았을 겁니다.

왜적의 침입, 오랑캐의 침입도 막아 냈을 겁니다.

일제 36년도 겪지 않았을 겁니다.  국토가 분단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매일 최류탄의 범벅된 날을 보내지 않아도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좀 더 넓은 아량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상대방을 헐뜯습니다.

그들을 몰아내야 내가 승리하고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사랑으로 그들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원수 마귀와 한패인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피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기독교의 기준이 죄인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죄를 벌로써 다스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벌써 다 지옥에 갔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한명이라도 용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 주는 사랑입니다.

누가 우리를 거스린다고 대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반대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온유함을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다음에 우리는 죄를 범한 사람에게 온유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주변에서 죄를 범한 사람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인상을 찌푸리고 피합니다.

가까이 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도소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재범입니다.

그들이 한번 죄를 범하고 교도소에 갔다 나오면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혀 사회에게 인정을 할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사에 취직도 할 수 없고 신용도 해 주지지 않아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결국에는 다시 죄를 범합니다.

죄를 범한 자에게 손가락질하며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원래는 죄인이었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예수님이 자기 몸을 희생하며 구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잘못을 보았을 때 그 영혼을 사랑하며 안타까이 여겨 그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죄를 범한 형제에게 어떤 태도로 접근하고 있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를 용서하고 그가 정말 다시는 죄를 범치 않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은 범죄한 사람과의 관계속에서도 온유함이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온유한 심령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명령만 합니다.

그리고 남이 잘못하면 큰 소리로 비난합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온유하기를 바라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범하지 말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온유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우리의 생활과 행위를 보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특히 전도할 때는 온유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예수를 믿고 친구에게 전도를 하는데 전도하다가 지기가 싫어서 말 싸움을 하며서 다 이겼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전도는 논쟁이 아닙니다.  논쟁에는 지고 사랑을 주십시요. 그리고 예수님을 소개하시기 바랍니다.

온유하지 못하면 전도하기가 힘듭니다.

전도할 때 온유한 태도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한 사람들로 가득찬 교회의 모습은 어떻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온유한 사람들만으로 모여 있다면 우리 교회는 어떤 모습이 되겠습니까?

온유하지 못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교회가 늘 시끄럽습니다.

분열이 생깁니다.  

다툼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교회 공동체의 생활 원리를 가르치면서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가 되는데에 제일 중요한 것은 온유한 태도입니다.

온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발언, 태도, 인격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개인과 가정, 직장 그리고 교회가 큰 상처를 받게 되고 분열이 생깁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남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혀 놓고 말하기를 “나는 뒤 끝이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앗쌀해여"라고 말합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자기는 뒤끝이 없을 지 모르지만 상대방은 큰 상처를 받습니다.​


어느 날 한 부인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말합니다.

"목사님! 나는 성질을 잘 내는 것이 흠입니다. 그러나 그 화가 오래 가지 않아 참 다행입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자매님이여, 당신이 성냄을 인하여 누군가의 마음 속에 남겨 두었던 그 상처는 오래, 오래,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요"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성냄, 우리의 말 한마디가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심지어 영혼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강한 자가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틀러, 무솔린, 스탈린 같은 사람이 세계를 점령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온유한 링컨은 사랑으로 세계인의 마음을 점령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용서함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이웃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온유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의 온유함을 배워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온유한 사람에게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위해 새 하늘과 새 땅, 하늘 나라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얼마나 귀한 축복입니까?​


이제 우리 주님의 음성을 다시 한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복이 있으라 온유한 너희여, 너희는 땅을 차지하고 영광스러운 천국의 기업을 받을 것이라"​


이런 축복이 우리 모두의 삶속에서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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